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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5일 일요일

성경의 완전성 Sufficientia sacrae scripturae

'완전'이란 말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완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각자의 기준에 충실한 '완전'의 불완전한 개념들이 있을 뿐입니다. 당연히 성경의 완전성(sufficientia sacrae scripturae) 개념이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완전한 것이라고 그냥 '인정'하는 것은 간단할 수 있겠으나 그 완전성의 구체적인 특성을 정확히 규명하지 않으면 극단적인 오류에 빠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첫번째 오류는 성경이 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무조건 완전한 것이라는 ‘성경주의(biblicism)’ 맹신인데, 이런 맹신자는 주로 성경의 문자적인 측면을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삶 전체에 적용하려 하기 때문에 현실의 삶을 인정하지 못하고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시대성 속으로 회귀하는 삶의 양태를 보입니다. 두번째 오류는 이런 성경의 첫번째 맹목적인 완전성 개념을 과도하게 부각시켜 그것을 트집의 빙거로 삼아 성경은 구시대의 철지난 문헌에 불과하고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하며 모든 면에서 쇠퇴한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의미의 완전성 개념마저 거부하며 성경은 고대인의 글이요 옛 시대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세번째 오류는 성경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적인 빛과 교황과 주교 및 전승이나 구전 등으로 보충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을 취하는 분들은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첨삭하는 일에 무모한 용맹을 떨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카톨릭은 초자연적 계시가 사도들을 통해 기록된 성경으로(in libris scriptis) 전해진 것도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전승들(sine scripto trandionibus) 안에도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는 입장까지 취합니다. 나아가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일종의 필연성에 의해 강제된(necessitate quadam coacti) 환경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우연적인 기록들 뿐이고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필연적인 것들은 대단히 빈약하기 때문에 기록된 계시의 임의적인 유용성이 전통의 필연성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오류를 털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님은 스스로를 진리라고 했지 습관이라 칭하지 않았다(Dominus noster veritatem se, non consuetudinem cognominavit)’는 터툴리안 및 ‘진리가 없는 습관은 캐캐묵은 오류일 뿐이라(consuetudo sine veritate vetustas erroris est)’고 한 키프리안 경구를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네번째 오류는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소위 순수한 ‘직통계시’ 한 방이면 만사가 형통인데, 굳이 수천년의 쾌쾌한 세월의 부식으로 누렇게 녹슬고 추악한 죄성의 떼가 새카맣게 묻은 성경의 기록된 계시까지 촌스럽게 읽고 연구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오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나 그 자체로는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 역사적 정황, 문화적 배경, 어원적 의미, 문법적 개념, 과학적 해석의 도움으로 온전성을 보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인의 기준에 속시원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정합성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수용하는 함정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학문과 과학이 발달하면 성경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맞인 듯 하면서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논할 때에는 먼저 성경이 누구에게 완전한 것인지, 무엇에 대하여 완전한 것인지, 어떻게 완전한 것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에 있어서 완전한 것이며, 외부에서 규정해 준 완전성이 아니며 성경 자체가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기준을 따라서 완전한 것이며, 성경이 언어로 되어 있더라도 독자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완전성이 보증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경은 인간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푸는 열쇠라는 차원에서 완전한 것이 결코 아니며, 인간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하고 말고를 따라 그 완전성이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하나의 거룩한 ‘자료’가 아니라 ‘원리’라는 말의 의미는 성경이 다른 것에 의해서 분석되고 판단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준과 권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외부의 어떤 권위나 보충에 대한 필연적인 의존 없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일 수 없다는 주장은 결코 타당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되 모든 전제들과 기준들을 제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태도를 취함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거룩하고 완전한 말씀임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 자체로는 어떠한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완전과 충분은 피조물과 무관하며 원래부터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완전하고 우리가 보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비록 단 하나의 반증도 발견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여전히 피조적인 완전이요 피조적인 충분일 뿐입니다. 땅의 모든 완전성은 하나님 의존적인 완전일 뿐입니다. 최우수 성적을 받고 최고의 수익을 올리고 최고의 이윤을 취득하고 최고의 찬사를 받고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최고의 직장에 취직하고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어떠한 완전함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어떠한 완전과 충분도 없다는 의미에서, 전도자는 눈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마음의 욕망을 억눌러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들을 취하였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피조물의 최종적인 결론에 방점을 찍습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으며 당연히 완전한 것을 분변할 수 있는 기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송곳처럼 뾰족한 비판과 차가운 멸시를 가한다는 것은 인간의 무지와 교만을 방증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외부에서 어떤 기준이 승인하고 확인시켜 준 교리가 아니며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인 주장도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성경 자체에서 발견되는 속성인 것입니다. 신명기 4장 2절에서 모세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의 마지막 부분에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릴 것이라(계22:18-1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거품이 있었다면 감해도 된다고 했을 것이고 성경에 결여가 있었다면 보충을 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하기 때문에 더하거나 빼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두 인용문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것이고, 가감의 본질은 성경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을 때에 빚어지는 일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완전성이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다 이루리라(마5:18)’ 하셨으며, 이사야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고 했습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이 배반하고 반역하고 불순종을 고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한 이오타도 없어지지 않고 영영히 설 것이라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의 모든 완전한 것들은 끝이 있어도 말씀의 완전함은 끝없이 넓습니다(시119:96). 당연히 ‘천지’가 통째로 소멸된다 할지라도 말씀의 완전성은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인간이나 천지의 운명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10:35)’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말씀의 완전성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함부로 가감하지 말아야 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불순종 여부와는 무관하게 세상 끝날까지 완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일부러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상호 교환적인 동의어와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용어의 혼돈이라 오해하실 수 있겠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동일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4장까지 보시면 저자는 예수님 이전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구약을 포함한 예수님의 계시 전체를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히4:12)’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책’이나 ‘문헌’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바울의 서신들을 ‘성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벧후3:16)을 볼 때 구약과 신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봄이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되지 말아야 하고 영영토록 없어지지 않는다는 성경의 진술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신 ‘성경’이란 말을 넣어서 생각해도 그 의미는 전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은 완전하기 때문에 가감이 불가하고 가감될 수도 없다는 성경 자체의 증거에서 우리는 성경의 완전성을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완전한 것인지를 보고자 한다면, 특별히 요한복음 5장 39절과 시편 19편과 신명기 8장 3절이 우리의 시야를 밝혀 줄 것입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성경은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인데 그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성경의 완전성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들(res necessariae ad salutem)’을 완전히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준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밝게 한다’는 노래를 읊조리고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고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인생을 지탱하고 인간의 가치를 극도로 높이고 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보증하는 유일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을 ‘믿음과 삶에 합당한 총체적 규범(regula totalis et adaequata fidei et vitae)’이라 했던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의 완전성은 성경 자체의 독립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 완전성은 하나님 의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성취를 배제하면 성경의 완전성 교리는 일언도 개진할 수 없습니다. 구원에 필수적인 것들은 성경에서 제공되는 정보로 충당되는 것이 아니며 신앙과 삶의 규범도 정보의 습득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가 유지되고 생의 가치가 고양되고 희락의 길을 걷는 것은 성경공부 열심히 해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의 계명과 지침은 그것을 그냥 행동으로 옮기면 순종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질서도 하나님께 의존적인 것처럼 순종에 있어서도 인간은 자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의도한 차원과 분량까지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설명으로 해명되고 전수될 문제가 아닙니다. 체험적 깨달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과는 무관한 이신론적 완전으로 이해하는 자들의 삶과 신앙에는 자신이 성경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주체로 남고자 하는 은밀한 교만의 악취를 풍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자신이 기념되고 자신이 만족되고 자신이 중심에 서 있기에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성경의 완전성을 설파한다 할지라도 무덤에 회를 칠하는 수준의 껍데기 고백일 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이런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적 욕망의 시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성경이 보여주는 완전한 차원에 복종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극미시 세계에서 극거시 세계까지 이르는 무수한 차원들을 분할하고 그런 개별 차원들이 요구하는 언어와 개념과 규칙과 어법에 비추어 보며 성경의 일상적인 언어들이 마치 전문성과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처럼 얕보고 무시하는 것은 성경의 완전성이 무엇이며 우리가 그런 완전성 자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모르는 무지와 오만의 소치일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차원을 제시하고 완전한 의미를 제공하고 완전한 질서를 가르치고 완전한 목적을 지시하고 완전한 기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종 학문들과 문화들과 행실들은 성경이 그어 놓은 적정선에 머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거기에서 더 미세하게 들어가고 거기에서 더 거대하게 확대되어 나가는 것은 연구의 일시적인 필요를 따라 잠시 시도될 수 있겠으나 머물러야 하는 최종적인 자리는 아닙니다. 다시 성경의 적정선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식이 없습니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가지고 육안으로 관찰되지 않는 세계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랍지만 거기에는 의미나 가치의 향기가 없습니다. 그것만 쳐다보는 생을 상상해 보십시오. 실제로 그것만 한 열시간 보십시오. 산소를 무의식 중에 호흡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에 걸러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경험의 세계가 얼마나 화려하고 다채롭고 다층적인 의미와 가치와 미가 있는지를 주체할 수 없는 감사의 탄성과 더불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안식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아름다운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세계임을 생각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의 지적 탐구는 반드시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비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에게 행하신 그 크신 은혜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의 실상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글줄 꽤나 읽으며 그럴듯한 논리 몇 토막을 다듬어 냈다고 목에 힘주는 것은 대단히 유치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전능하고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피조물의 실상을 아는 지혜가 없으면 그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그 뻗뻗한 고개를 순순히 떨구려고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할 것이라(잠29:1)’고 지혜자는 말합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우리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할 것과 성경을 모든 신앙과 삶 및 인생의 가치를 가늠하는 원리과 규범으로 삼으라는 것과, 성경과 우리가 충돌되는 경우에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서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절대적인 기준이며 돌이켜야 할 방향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어떠한 교회적 역사적 전통적 권위를 가진 신조와 고백서와 신학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수렵해야 할 궁극적인 안식의 좌소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각도로 진입하여 포착된 개념의 단편을 가지고 성경의 완전성을 취하고 버리는 행위는 늘 극단적 오류의 먹구름만 몰고 다닐 뿐입니다.

성경의 명료성 Perspicuitas sacrae scripturae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태복음 28장 20절을 근거로 가르치는 권위 즉 교도권(potestas magisterii)이 사도에게 주어진 것이며 사도시대 이후에는 사도직을 계승한 교황과 주교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이런 주장의 정당성을 성경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다는 자의적인 주장에서 찾습니다. 성령은 교황과 주교로 하여금 오류를 가르치지 않도록 도우시고 성도들은 오류에 동의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돕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성경의 애매성을 빌미로 교도권을 내세우는 로마 카톨릭의 성경해석 독점권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인물들은 구원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성경은 결코 애매하지 않다는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해 왔습니다. 이 명료성은 믿음과 관계된 것이며 하나님께 의존하고 그에게 속한 것이며 하나님 사랑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명료한가? 네, 맞습니다. 성경은 결코 애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을 언급하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훈련되지 않고 불안정한 사람들이 다른 성경처럼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을 초래한(벧후3:16)’ 사실을 지적하며 성경의 명료성에 어떤 차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동일하게 명료한 것도 아니며, 그것들이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으로 명확한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위하여 필히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까지 불명료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의 지식에 대해서는 식자와 무식자를 막론하고 통상적인 방법만 적절히 사용하면 이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교부들과 모든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인물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성경에서 보다 난해하고 애매한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동일한 주제나 동일한 내용이 보다 명료하게 나타난 구절의 조명을 받아 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이러한 확신은 성경 해석학에 적용되어 그들로 하여금 ‘성경은 자체의 고유한 주석(Scriptura sui ipsius commentarium)’이란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비교(collatio locorum) 방식을 선호하게 했습니다. 이는 성경을 성경 자체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디까지 해석하며 어떤 차원까지 이르러야 성경의 명료성에 도달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성경이 스스로를 해석하고 안내하는 지점까지 가는 것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성경이 입술을 여는 곳까지 가고 입술을 닫는 침묵의 경계선은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성경의 명료성이 우리로 머물기를 원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성경의 명료성과 직결된 문제로서 반드시 건드려야 하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성경의 명료성이 인간의 이성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과 관계된 것(ad fidem)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따라 판명한 것입니다. 당연히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성경은 결코 명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워져 있다면 그것은 멸망할 자들에게 가리워진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명료성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μέτρον πίστεως)에 따라 성경의 의미 즉 하나님의 뜻을 지혜롭게 분별해야 한다는 성경 자체의 원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똑똑한 자에게나 우둔한 자에게나 믿음을 따라서는 모두에게 지극히 단순하고 판명한 것이 이성을 따라서는 모두에게 애매하고 캄캄한 어두움인 것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연과 은총의 엄밀한 이원론을 극복한 바빙크가 잘 지적한 것처럼,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결코 ‘자연’적일 수 없으며 그 근원에 입각하여 볼 때 자연은 ‘초월’적인 것입니다. 당연히 자연의 외모는 자연의 빛(lumen naturalis)을 따라서도 보이지만 자연의 초월적인 본질은 오직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눈을 들어 광활한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다(시19:1)’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비록 모든 사람에게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즉 그의 영원하신 신성과 능력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다’는 명료성을 말하고 있지만 적장 하나님을 깨닫고 추구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의인부재 현실을 지적하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원리에 무게를 싣습니다. 자연이 인간의 삶에 안락한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는 기능도 필연적인 것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과 능력과 행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이 자연의 궁극적인 본질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으로만 명료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의 명료성도 실상은 믿음과 관계된 것이며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에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수준으로 명료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의 명료성에 있어서도 예를 들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아니면 결코 그 이해가 명료하지 않으며 믿음의 분량을 따라 이 구절이 가리키는 의미의 명료성 정도에는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명료성은 다른 것들의 접근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섬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그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맞물려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식음하고 대화하고 숨쉬고 거동하고 잠자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만나고 이별하고 아파하고 죽는 경험이 없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산과 들과 초원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와 곤충과 벌레를 알지 못한다면 성경은 단 한 마디도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곧장 일반계시 영역과 특별계시 영역 사이를 분리하고 해석학적 권위의 우열을 따지는 논의로 접어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자연을 만드시고 보존하고 통치하고 역사를 이끄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명료성 개념도 하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시는 일들을 아는 지식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듯이, 모든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 즉 그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속성과 행하신 일들을 명료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치적인' 교도권을 근거로 해석학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허세를 부리는 것은 참으로 유치하고 쪼잔한 일입니다. 물론 훈련되고 일평생 성경의 의미를 탐구한 분들의 탁월성과 그것으로 교회를 섬기는 마땅한 본분에 심술의 짱돌을 던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학자들의 배움과 도움을 받지만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영적인 삶의 자율성을 어떤 형태로도 훼손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교도권을 빙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최종적인 권위를 해석적인 차원에서 넘보는 음흉한 시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드리는 말입니다.

두번째로 건드려야 하는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성경의 명료성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분량 만큼의 명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계시된 분량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계시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이 덮으시면 벗길 자가 없고 그분이 여시면 닫을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만물과 섭리도 그렇듯이, 성경에 있어서도 오묘한 부분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분명히 드러난 부분은 우리에게 속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오묘한 부분과 명료한 부분을 구분하는 예리한 기준도 없고 두 부분으로 분리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명료하게 드러난 계시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호기심을 따라 파고들면 돌이킬 수 없도록 오묘한 미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즉 성경을 읽고 탐구하고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분명히 안다고 생각한 것들이 우리에게 완전히 소유된 것이 아니고 마치 희미한 거울을 보듯이 어떤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이 살짝 밖으로 드러난 정도의 지식일 뿐이라는 ‘불편한’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명시된 객관적인 진리의 내용이 찰라적인 사건을 통해 계시가 되었다가 순식간에 다시 인간적인 언어 본연으로 돌아오는 바르트적 계시관과 달리 말씀의 객관성은 그대로 있으면서 그것이 생명력 없는 어떤 물체가 아니라 성령의 유기적인 출입으로 인해 말씀이 생명으로 살아 있는 그런 차원의 명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명료성은 내 이성과 학식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믿음이란 형식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내게 소유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영감과 조명이 없으면 성경의 명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료성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며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방식으로 명료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면 성경은 아무리 예리한 해석의 메스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이해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그 명료성에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에 접근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온전한 연합의 길인 것입니다. 이런 명료성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며 멀리 있는 것도 아니며’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이를 행할 수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에스겔의 예언처럼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명료하게 되는 근거를 성령의 내주와 조명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랑의 하나됨이 없이는 성경은 결코 명료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뜻합니다. 사랑이 식으면 그 거리는 벌어질 수밖에 없고 사랑이 더할수록 거리는 좁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지고의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과 하나됨을 통하여 거리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 때문에 억울한 고통과 까닭 없는 환란을 넘어 부당한 죽음에 이른다 할지라도 불명료한 애매함에 빠지지 않고 '주의 인자함이 생명보다 낫다'는 고도의 명료함에 도달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경지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과 삶에 어둡고 애매했던 것들이 그 사랑 때문에 밝아지고 분명해진 탓입니다. 사랑하면 아무것도 애매하지 않습니다. 되어야 할 됨됨이를 알고 가야 할 방향을 깨닫고 행해야 할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들이 캄캄한 혼돈으로 빠질 것입니다. 아무리 밝은 식견을 가졌어도 모든 것들을 성취할 능력을 가졌어도 천하를 설득한 입술을 가졌어도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경의 어떠한 구절도 명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가시밭 여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만물은 그저 욕망의 넓은 공백을 채우기 위한 착취와 유린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애매하고 불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습니다. 삶의 명료성을 믿습니다. 만물의 명료성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큰 계명의 사람이 될 때에만 비로소 실현되는 명료성인 것을 또한 믿습니다.

성경과 일상언어 Scriptura et lingua cotidiana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영원토록 시들지도 마르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결코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의 언어는 정밀한 과학의 언어도 아니고 심오한 철학의 언어도 아니며 반듯한 논리의 언어도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 문맥에서 사용하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일상적인 언어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정한 전문가 집단만 접근하고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시대와 계층을 불문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책입니다.

신의 음성과 뜻이 담긴 책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거기에 사용되는 표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상하고 비범하고 신비로운 것이어서 범부들이 감히 접근할 수도 없고 접근한다 할지라도 판독할 수도 없고 판독했다 할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비문 이상으로 기이한 난문의 불가사의 언어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고어로 된 성경은 번역도 금하고 해석도 시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하며 범부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거룩히 구별된 금역에 보관하여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은 너무도 누추한 언어의 옷을 입었으며 평범한 가정이나 북적대는 시장에서 너무도 헤프게 쓰여지는 천박한 표현들이 난무하고 있어 이것은 도무지 하나님의 신적인 말씀일 수 없으며 인간의 생각과 붓이 지극히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고 지나간 자취일 뿐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극단은 비록 저마다의 ‘타당한’ 일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이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의 언어로 기술된 성경의 자비로운 ‘성육신적’ 적응성을 간파하지 못한 인간 편에서의 부패한 공명심과 교만에 중독된 단견일 뿐입니다.

철학적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언어의 애매함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버트란트 러셀은 일상적인 언어가 이런 필요성에 역행하는 모호함만 가중시킬 뿐이라며 타매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러셀의 견해에 맞장구를 치며 초기에 언어 분석에 몰입해 보았으나 후기에는 ‘매일 사용되는 언어를 바탕으로 철학을 성찰해야 한다’고 일갈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분석철학 방식을 철회하며 ‘일상적인 언어에는 잘못된 점이 없으며, 오히려 대다수의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가 언어와 관련된 주제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주제의 본질을 오해한 망상에 지나지 않다’고 했습니다. 1940년대에 옥스포드 대학교의 철학 교수들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 사상을 전수하고 발전시켜 일상언어 철학(ordinary language philosophy)을 만들었고 이는 일상적인 언어의 내재적 가치와 의미가 학계의 새로운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사조를 니체와 베르그송 같은 철학 거두들의 본질주의 비판과 연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일상적인 언어는 삶의 일상적인 전영역과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일상어도 단일한 배타적 어의를 가지지 않고 다소 '모호'하며 동시에 다양한 의미를 가졌으되 그 의미들이 일상의 특정한 맥락과 만나 하나의 종합적인 뜻을 발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특정한 의미와의 획일적인 동일시는 다른 다양한 의미들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의 추상화와 기호화는 일상적인 언어의 불확정성 및 다의성을 파괴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일상과의 괴리도 부득불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일상어는 개념 담지력과 내용 전달력과 의미 포괄성과 현실 밀착성과 언어 접근력에 있어서 여느 학술어의 기능보다 더 현저한 탁월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명확한 논리적 언명만이 과학의 시대에 유의미한 언어이고 의미가 애매하고 다의적인 일상의 언어들은 어떠한 학문적 상아탑도 세워질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학문과 기술과학 문명의 '본질'에 지극히 충실한 경향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최첨단 과학의 현장을 조금만 진지하게 들여다 본다면 가치의 지반이 흔들리는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급’ 두뇌들의 학문적 관심이 소홀했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던 지극히 일상적인 현상들이 지금은 최첨단 과학의 아랫목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높은 통찰력과 기술력을 발휘해도 인간은 단 하나의 일상사가 보여주는 경이와 신비와 정교함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수긍하고 있습니다. 이를 태면, 코의 기능만 보더라도 10억 개의 냄새를 분별하는 하나의 뉴런에 천여 개의 분자분별 수용체가 있어서 냄새를 종합하여 어떤 느낌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과, 백만개 이상의 정보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고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로 움직이는 눈의 자발적 커서가 가진 정밀성은 어떤 컴퓨터 커서로도 재연할 수 없다는 사실과, 빛의 출입이 없이도 시상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하되 그 안에 자아가 참여하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밖에서 그 자아를 보고 있는 자아가 구별되어 있는 꿈도 최첨단 과학으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신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물론 후각의 경우에는 바이오 전자코(bioelectric nose)가 개발되어 냄새를 식별하는 능력이 100펨토몰(10의 마이너스 15승 분의 100)의 수준까지 이르지만 2억개 이상의 뉴런으로 구성된 개의 후각보다 높은 정교함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과학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보여주는 궁극적인 놀라움은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놀라운 과학적 성취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에 있습니다. 당연히 그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성취한 과학기술 문명의 경이가 커질수록 하나의 세포에서 그렇게 놀라운 능력을 지닌 인간이 되도록 하시되 손도 대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대한 경이는 더더욱 커질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최첨단 과학이 우리에게 너무도 일상적인 것이어서 묻지도 않았던 그런 일상사에 최고의 기술을 집중하며 첨예한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신약의 언어가 세 개의 지방언어(Doric, Aeolic, Lonic) 중에 ‘아테네의 화련한 산문과 더불어 헬라의 대표적인 언어’로 성장한 Lonic 계통의 애틱어(Attic)가 아니라 헬라어가 로마제국 및 소아시아 세계로 확신되고 하나의 세계어로 성장함에 따라 애틱의 형태에서 불가피한 변형을 거쳐 다양한 인종 및 계층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 세계적인 규모의 의사소통 매체인 코이네(Koine) 헬라어로 기록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나라와 민족과 계층과 성별과 연령의 사람에게 소통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판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코이네가 최적이란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아름다운 음율로 이루어진 시도 있고 세세한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는 정교한 표현들도 있고 교훈적인 목적으로 동원된 우화들도 있으며 저자가 벗겨주지 않으면 의미의 윤곽도 파악할 수 없는 묵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전반적인 언어는 기호적인 언어도 아니고 철학적인 언어도 아니고 고도의 문학적인 언어도 아니고 논리적인 언어도 아니고 과학적인 언어도 아니고 수학적인 언어도 아닙니다. 성경은 일상적인 언어로 기록된 책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어에도 의미의 세계를 가장 많이 담아내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문적인 용어는 어떤 특정한 것만을 가리키고 특정한 의미만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 산출되는 의미는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되기 전까지는 아직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언어의 묘사가 너무 정밀하면 의미의 숲이 보이지 않고 너무 거시적인 것을 묘사하는 언어도 적당히 섬세한 의미의 개별적인 나무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와 비근하게 시각의 경우에도 우리가 극미시 세계와 극거시 세계에서 어떤 가치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극미시와 극거시 세계가 어떤 의미가 산출되는 차원의 세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상어는 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가장 폭넓게 담아내는 언어의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언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변하여도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결코 변하지 않는 일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숨쉬는 것과 움직이는 것과 보고 듣는 것과 먹고 배설하는 것과 주고 받는 것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과 시작하고 끝마치는 것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과 태어나고 죽는 것과 울고 웃는 것과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 등등의 표현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며 시대를 따라 종결되고 새롭게 생성되는 개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들은 인생의 의미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미가 변경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지도 시들지도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화려하고 세련된 애틱이나 고도로 발달된 학술어가 아니라 이러한 일상어로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이 지극히 일상적인 대중의 언어로 기록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런 언어의 질그릇에 담긴 진리의 보배를 경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짐승의 냄새가 진동하는 누추한 말구유 안에 담겼다고 해서 무시할 수 없고,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전으로 삼으셔서 거기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우습게 여길 수 없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상 사용하는 언어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토록 가깝게 다가오실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다는 감격과 더불어 질그릇에 담긴 진리의 높은 경지라는 의미의 세계를 침노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조금 정교하고 조금 세련되고 조금 화려하고 조금 합리적인 언어처럼 보이는 전문적인 학술어가 함부로 판단의 입술을 열어서는 안되는 의미의 비획일적 불특정성, 광범위한 포괄성, 풍요로운 다의성 뿐만 아니라 보존의 시간적 영구성도 가진 일상적인 용어로 기록된 책입니다. 흠모할 만한 언어적 외모를 가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는 가장 보배로운 것입니다. 성경의 이러한 적응적 기록은 그 자체로 복음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어 내용과 형식의 절묘한 조화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짧고 얕은 기준과 판단으로 성경을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고 경고하고 싶어 지는군요.

성경의 제1저자와 제2저자 Author primarius scripturae


‘성경의 신적인 영감’이란 성경의 제1저자가 하나님 자신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권위도 성경을 추월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은 성경의 궁극적인 의미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이르지 않으면 성경은 한 이오타도 해석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어떠한 피조물적 천재성과 보편성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규정해도 여전히 성경을 성경답게 알지 못하고 외적인 기준에 의존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들이 내재되어 있는 말입니다.

바빙크는 하나님이 성경의 제1저자라는 사실을 '교회의 절대적인 교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도 성경의 권위와 신뢰성을 하나님이 성경의 제1저자(author primarius scripturae)라는 사실에서 찾습니다. 즉 성경의 자증적인 권위(authenticatio in se)와 자증적인 신빙성(autopistia)은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을 연구하고 그 의미를 벗기려는 시도의 보편적인 방법론은 제2저자인 인간 기록자의 역사적인 상황과 혈통적인 출신과 성장한 배경과 지적인 수준과 몸담은 교제권과 개인적인 성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지배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접근법이 도달하는 오류의 정점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믿음의 역사적 선배들이 전수해 준 ‘오직성경’ 정신에 투철한 확신을 갖는다고 하면서도 인간 기록자를 성경의 제 1저자로 여기게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 의해 성경이 산출될 수 있다는 무의식적 망상을 불러 일으키고 만약 성경 저자들의 인격과 지적 수준보다 뛰어난 인물들이 고상한 환상을 보고 정확한 예언을 하고 정밀한 실험을 하고 합리적인 분석을 하고 설득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그 결론이 성경과 대립되는 경우에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확신이 무장해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할 단초를 제공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저자들을 비롯하여 신학을 기록한 저자들이 활동한 시대의 기술이나 학문이나 문화나 사회나 교통이나 의식이나 질서나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오늘날의 기술문명 발달에 비한다면 그 시대가 가진 모든 면에서의 포괄적인 '원시성(primitiveness)'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런 '원시적인 시대'에 쓰여졌다 할지라도 진리에 손상이 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성령의 영감)를 생략하고 가시적인 것(인간 기록자)만 과장할 경우에는 그런 진실의 왜곡이 빚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진리가 문명의 발달과 지식의 수준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도 인간의 시대별 문맥이 가진 한계와 오류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형성된 성경도 기록 당시의 문명적인 한계와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런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성경일 수 없다는 얘기지요. 나아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편협한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의 범역사적 보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발달된 문명의 수혜자가 고도로 세련된 해석학적 도구를 가지고 당시의 누추하고 유오류한 원시성의 껍질을 벗겨내고 최첨단 문명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바르트가 역사라는 유한한 무대 전체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성경에서 그런 역사의 모든 상대성과 유한성과 오류성과 조건성을 제거하려 한 시도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리꾀르가 주창한 것처럼, 주어진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에게 맡겨진 것이고 그렇다면 독자의 수준이 의미의 수준을 좌우하게 된다는 논리도 같은 흐름에서 한 몫 거들고 있습니다.

제2저자 중심적인 성경이해 결과는 인간 저자들의 실상에 맞추어진 해법이 진리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어떤 생각을 가졌고 바울의 목표는 무엇이고 자신의 공동체를 향한 요한의 의도는 무엇이고 새까만 후배의 ‘개념없는’ 지적으로 불편했을 베드로의 심기는 어떤 것인지와 같은 인간문맥 차원에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벗기려는 시도는 성경에서 인간의 처세술과 도덕적 행위와 인간 편에서 바라본 진리를 건드리는 정도의 얄팍한 깨달음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보다 정교하고 높은 설득력을 확보하면 할수록 진리는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럴수록 인간적인 욕구는 더욱 만족될 것이기 때문에 진리와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인데 그것조차 깨닫지를 못하기에 진리 부재의 위험성은 더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무지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의 ‘무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무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무지는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마땅히 알아야 하는 만물과 역사의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유혹에 넘어가고 보이는 위협에 위축되고 보이는 승리에 자만하고 보이는 멸망에 절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무지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정직하게 보면, 이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것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여 범죄한 나라요 허물질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란 정죄는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물에서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시는 창조자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역사에서 역사의 주관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듯이 성경에서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와 무관한 이방인의 어두운 무지만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 지적의 화살은 무지한 우리의 의표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성막은 모세가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물리적인 성막은 당연히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고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지극히 거룩한 처소인 성막은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것입니다. 성경도 인간 저자들이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술하신 책입니다. 물리적인 성경은 인간의 붓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진리의 빛을 비추시고 거짓의 캄캄함을 거두시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고 만나시고 우리와 하나되게 하시는 신적인 연합의 지성소인 성경은 성령의 붓으로 집필된 책입니다. 성막에서 모세를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듯이, 성막에서 모세를 만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듯이, 성막에서 만들어진 시대의 제한성과 재료와 모양에 심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에 사활을 걸듯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의 연합에 전인격을 다하는 자세로 성경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제1저자께서 제2저자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한결 같이 동일하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2저자들을 수단으로 성경을 쓰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온전하게 적응하신 것입니다. 최고의 배려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2저자들의 입술만 주목하고 그런 방식으로 적응하여 계시하신 주체요 내용이요 목적이신 제1저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의 뜻도 깨닫지 못한다면, 광야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고 혹은 오병이어 기적으로 떡 먹고 배부른 까닭에 정작 그것을 주신 하나님 자신은 망각해 버린 이스라엘 백성 및 군중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2저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의 원시성을 근거로 성경에 오류와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는데 심지어 악인들도 악한 날에 적당해 지으신 분입니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핍박받는 자와 핍박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있으며, 주인과 노예가 하나님 안에 있으며, 채무자와 채권자가 하나님 안에 있으며, 심지어 죽이는 자와 죽는 자가 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족하고 잘못되고 후지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모든 것이 아름다운 때의 적절성을 따라 합력하여 언제나 최고의 선이 구현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매이거나 실패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역사적 제약성과 당시 사회의 문화적 원시성도 진리가 계시되고 기록됨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한번도 전쟁이 없었던 적이 없고 가난과 기근이 죽음의 기운을 드리우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으며 악이 발휘되지 않은 때가 없었고 거짓이 침묵으로 지나간 단 한순간도 없었고 모순과 부조리가 완벽하게 처리된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뜻하시고 경영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되고 말았으며 앞으로도 신적인 뜻의 그런 필연적 성취는 변경되지 않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언어와 표현이 세련되지 못하고 정교하지 못하고 심오하지 못하다며 성경의 권위나 가치에 의구심을 던집니다.

성경의 완전한 영감 Inspiratio scripturae perfecta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의 다른 속성들, 특별히 무오성과 충분성과 완전성과 종결성과 판명성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이 거절되면 성경이 유오한 것이고 불충분한 것이고 불완전한 것이고 종결되지 않은 것이고 불분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감이 무너지면 성경 전체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무너지면 우리의 믿음 전체가 무너지고 신학 전체가 무너지고 교회 전체가 무너지고 소망의 빛을 상실한 세상도 가장 치명적인 절망의 늪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성경의 영감론은 과히 사단이 사활을 걸고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허물되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이루려고 우선적인 표적으로 삼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절명의 중요성을 지닌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영감성을 붙들고 사수해야 한다고 부르짓는 것이 아닙니다. 영감성 개념은 정황적인 필요에 의해 촉발된 인간의 고안물도 아니고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의 권위에 의존하여 비로소 인정되는 것도 아니며 성경이 스스로 자체의 속성을 밝힌 개념이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가 고안한 것이며 그러기에 성경의 제1 저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영감의 대상인 인간 기록자를 통하여 성경을 내셨기에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성경의 영감론은 신론,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는 신적인 속성과의 긴밀한 관계성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존재냐는 인간의 본성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자체의 영감성을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무엇을 뜻하며 어디까지 포함하는 것인지를 살피고 싶습니다.

우선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πᾶσα γραφὴ θεόπνευστος)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유익하다(딤후3:16)’ 말하였고, 베드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θελήματι ἀνθρώπου)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ὑπὸ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φερόμενοι ἐλάλησαν ἀπὸ θεοῦ, 벧후1:20-21)’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자체와 전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으며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성령의 감동을 입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성경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면서 하나님 자신이 성경의 출처도 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출처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굳이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간 기록자의 뜻을 발견하고 만족하는 '사사로운'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궁극적인 의미의 지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당위와 만납니다. 그리고 성경 기록자와 성경 자체의 영감성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피조물적 한계나 결함도 없으며 문헌의 어떠한 역사적 문화적 한계나 결함도 없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하나님의 영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성경 전체의 영감성을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성경 자체의 영감성과 관련하여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영감이 성경의 형식과 본질, 즉 성경 텍스트의 개별적인 단어와 그 단어의 의미 모두에 관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 기록자의 영감에 대해서는 레이든의 17세기 정통주의 교수들이 [순수신학 통론]에서 밝혔듯이, ‘저자들은 스스로를 항상 순수하게 수동적인 존재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 즉 기술과 정신적인 활동과 언사와 기억과 배열과 순서와 그들 자신의 스타일을 [성경의 기록에] 적용하는 자로도 여겼으나...그들을 인도하고 지도하여 그들을 마음과 기억과 언어와 붓길에서 빚어질 수 있는 모든 오류에서 보호하신 성령의 통솔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성경 자체의 영감과 성경 기록자의 영감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일반적인 오해 몇 가지를 지적하는 것이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견해를 그들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는 데에 유익할 것 같습니다. 성경 자체의 영감에 대한 현대적 이해는 축자적 영감(verbal inspiration)과 개념적 영감(conceptual inspiration)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은 그렇게 두 종류의 영감을 나누고 하나를 취하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 배타적 택일이란 접근법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통합적인 영감론을 취합니다. 성경 기록자의 영감에 대해서도 현대의 학자들은 기계적 영감(mechenical inspiration)과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을 서로 충돌하는 개념으로 대치시킨 이후에 또 다시 배타적 택일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주의 인물들의 기록자 영감론은 그 두 가지의 배타적인 대립이 아니라 보완적인 조화의 관계성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즉 기록자가 자신의 모든 ‘고유한’ 요소들이 하나도 억압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안에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충돌하고 있다거나 각각의 속성이 억압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음과 같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도 다룰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감을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그 영감이 인간적인 요소들과 상충되는 것이어서 어느 것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설익은 전제와 출처를 알 수 없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대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단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 없도록 발칙한 오류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사단을 하나님의 대립항 자리에 두는 것은 사단이 하나님과 어깨를 겨누려는 음흉한 궤계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립’이란 말은 모종의 동등성을 전제한 말이기에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비기려는 사단의 오만한 발상을 답습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하늘과 땅보다도 더 큰 격차가 있다고 이사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영감과 인간의 완전한 성정은 결코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영원과 시간이, 무한과 유한이, 계시와 이성이, 신학과 철학이, 주권과 자유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님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에 대해 우리는 성경이 기록할 당시의 찰라적인 시점과만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그때에만 하나님의 영감이 기록자와 성경에 발동한 것으로 여기면서, 성경을 기록한 당시의 기록자와 그 순간 외에서의 기록자 사이의 상태를 구분하고 비교하며 전자와 후자 사이의 차이점을 영감의 개념으로 취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과 현상 편에서 모든 것을 풀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론이 신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앞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속성 및 사람의 본성과 더불어 사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그 뜻대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지으신 창조자요, 그 모든 것들의 소유자와 보존자가 되십니다. 특별히 인간의 성정과 관련하여 시편 33편은 하나님이 온 땅과 세상의 거민을 ‘말씀으로 이루시고 명하시매 견고히 세우시는’ 분이시고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의 모든 행사를 감찰’하고 계시되 잠언 21장은 땅에서 어떠한 제약도 없이 인간의 가장 자유로운 활동성을 대표하는 임금의 마음조차 저수지의 물처럼 임의로 다스리고 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14장에 의하면, 온 세상을 향하여 작정하신 생각은 반드시 되고 경영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되 당연히 열방의 도모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도 무효케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아무도 변경할 수 없으며 펼치신 통치의 손은 누구도 능히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세계사 경영과 통치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성경 기록자 자신의 출생과 성격과 스타일과 재능과 기질과 교육과 교양과 용어와 말투와 문체가 형성되는 성장과 그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내용이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가 태어나서 가치관과 세계관과 진리관이 형성되는 배경이 된 시대의 정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질서, 일상생활, 문학, 철학, 학풍도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부터 종말까지 그 근원과 본질과 방향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시점에 이르러 아브라함 일가를 부르시듯 각 시대와 각 상황과 각 기록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게 하시되 특별히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과 완전성과 명료성과 종결성을 알리고자 그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증거되고 기록된 것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과 그 상황에 몸답고 있는 성경 기록자와 그가 기록한 모든 문자와 의미까지 다 존중되고 고려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빙크도 성경의 '기록의 과정에서 성령의 활동은 저자들의 인간적인 의식을 준비하되 출생, 양육, 자연적인 재능들, 연구, 기억, 사색, 생의 경험 및 계시라는 다양한 방편들로 준비하되 기록의 과정 자체를 통하여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생각들과 단어들과 언어와 문체로 하여금 의식의 표피로 떠올리게 하사 모든 계층과 지위, 모든 나라와 세대가 거룩한 사상에 대한 최고의 해석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일갈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강요나 억압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의 모양을 따라 창조를 하셨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의 모양을 따라 존재하고 살고 행동하는 때가 자유의 최대치가 존중되고 구현되는 때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을 행하시고 온전히 이루시되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피조물적 의존성을 가진 우리가 마치 모든 것들을 스스로 행하는 주체인 것처럼 행하여 고도의 자유가 발휘되는 방식으로 섭리하는 분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강요나 강제나 억압이나 폭력이나 위협이 고려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도 간과하지 않으시며 그 수효를 아실 정도로 섬세하고 은밀하고 깊다고 마태는 증거하고 있으며, 시편 기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어찌나 많은지 그 수효가 모래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강요와 억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문자수는 인간의 머리털 수효보다 적고 모래의 수보다도 적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전적인 영감의 대상으로 기록자와 그의 전인격과 성경의 의미뿐만 아니라 성경의 단 한 이오타도 배제되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는 어디냐며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확실한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습관과 지식과 느낌과 환경과 신체의 상태가 우리에게 가하는 강요와 위협과 억압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주권과 작정과 섭리만 언급하면 발끈하는 우리의 죄성을 겸허하게 성찰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을 가진 인간이 생각하고 쟁취하기 원하는 자유의 개념은 어떤 것일지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숙고해 본다면, 성경이 고백하고 있는 그대로를 사유와 행위의 규범으로 삼지 않고서는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것들만을 생각하고 실행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지, 어떠한 경우가 그 자유의 최대치가 발휘되는 때인지, 그러한 자유의 양태는 어떠한 것인지를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실상에 근거해서 살펴보면 성경의 전적인 영감에 우리의 본성적인 거부감은 변화의 여지가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영감된 것이 없기에 성경의 권위에 견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교회와 범교회적 전통이 우리의 신앙과 신학에 아무리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의 신적인 권위와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 유대인과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과 사중적 인과율, 그리고 그리스도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현장은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개별적인 사건을 선별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가하는 시도도 시도하는 사람들의 머릿수 만큼이나 많습니다. 이런 일상에 익숙한 우리들은 성경이 마치 각 시대에 일어난 사실을 자세히 전하려고 붓을 든 중다한 사람들 중에 선별된 몇몇 기록자의 글들을 묶은 단권의 책처럼 보일 것입니다. 당연히 성경은 인간 문맥에서 경험되는 시공간적 한계와 인간적인 오류와 부패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이것을 도려내기 위해서는 예리하고 합리적인 지성이 비판의 매스를 들고 성경을 해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극히 인간다운 발상이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런 발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을 부인하는 무지와 오만함일 뿐입니다.

성경이 시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산물이요 비록 성경을 기록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인간이며 당연히 인간적인 약점과 오류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일면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적 역사적 문헌(ein menschlich geschichtliches Dokument)으로 여기고 인간이 가진 제한적인 언어와 제한적인 문화와 제한적인 상황과 제한적인 경향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경 기록자의 인간적인 상대성, 조건성, 유한성을 벗겨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바르트 식의 결론과 타협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닙니다. 이런 귀결은 성경의 신적인 속성과 무오성이 근거하는 성령의 영감을 부인한 필연적 결과일 뿐입니다. 또한 이와는 달리 성경을 하나님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과도한 ‘성경숭배’ 행위도 건강한 대안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도록 계시하신 특별한 방식이며 또한 그 자체로서 무오한 계시의 책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성경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사중적 인과론(유효적, 형식적, 질료적, 목적적 원인)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고마루스 진술에 따르면, 성경의 유효적 원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경의 저자(auctor)요 다른 하나는 그 저자의 종(ministri illius)입니다. 당연히 저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며 종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진리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문자로 기록하고 교회의 보편적인 선을 위해 가르칠 수 있도록 인도함을 받은 자들이라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보나벤처 표현을 빌리자면, 성경은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거룩한 계시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나머지 세 가지의 원인에 대해서는 트렐카티우스의 진술이 좋습니다. 그에 의하면, 성경의 질료적 원인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시되고 우리의 능력을 따라 전달되고 기록된 신적인 실체를 뜻합니다.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 성경의 고유한 주제이며 질료가 되신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신적인 실체보다 주로 신적인 속성들과 관련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진술들과 선언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성경의 형식적 원인이 둘인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답니다. 내적인 것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 및 그 진리의 각 부분과 정확히 조율되어 있다는 것이고, 외적인 것이란 성경의 절묘한 언어를 일컫는 말인데 그런 언어로 인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말씀하신 분의 위엄에 부합하고, 선포된 말씀의 본성에 부합하고, 그 말씀이 선포된 대상의 상태에 부합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목적적 원인도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둘째는 택자들의 구원이라 말합니다.

사중적인 인과율을 성경의 무오성 문제를 푸는 분석의 틀로 취한다면 ‘무오성’ 개념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중적 인과율로 본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시고 인간은 그의 수종적인 기록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되 인간이 알 수 있도록 계시되어 있으며, 성경은 진리로 조율되어 있고 최적의 언어와 문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어떠한 오류와 모순도 없습니다. 성경은 비록 문자와 문헌의 형식을 옷입고 있지만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적이고 영원한 진리이며 온 인류와 역사와 만물의 시작과 본질과 관계와 목적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내고 있으며 세월의 풍상과 인간의 사악함도 없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보존되어 온 책입니다.

제롬은 성경에 대한 무지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무지와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실로 성경은 마치 예수님의 성육신과 같습니다. 완전한 하나님 자신이며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나시고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따라 먹으시고 걸으시고 입으시고 주무시고 피곤해 하셨지만 한 순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 적이 없으시고 어떠한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곳이 없으시며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늘 그대로 계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앙상한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볼품도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흠모한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분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아 싫어버린 바 되셨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의 길을 걸으셔야 했던 분입니다. 나아가 이사야는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뾰족한 지적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성경도 플라톤의 장엄한 체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살인적인 정교함와 과학의 엄밀한 검증성와 삶의 찰진 현실성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저자도 불분명한 문자 조각들을 긁어 모으되 언뜻 보기에는 개념 없이 조립한 상상의 괴물 텍스트일 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고 별 희한한 잡동사니 글들이 조잡하게 짜집기 된 누더기 문서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적인 냄새가 풀풀 나고 설혹 지성인이 지문도 묻히기를 꺼려하는 하류층의 잡서로 오해하고 고의로 왜곡한다 할지라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길 중단한 적이 한번도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구석이 한군데도 없도록 영원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은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특정한 계층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원래가 믿음이 없이는 읽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도록 기록되어 있는 ‘거룩한 혼돈’의 책입니다. 성령의 은혜로운 조명이 없이는 눈에 차지도 않는 ‘초라한 몰골’을 가진 책입니다. 그래서 질고를 겪습니다. 무시와 멸시를 당합니다. 성경의 이러한 대우는 마치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과도 같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만이 이런 무례한 대우의 주체가 아닙니다. 이사야가 자성의 목소리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도 세상의 풍조에 편승하여 성경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비록 생존과 채면을 위해 주변 이목들에 부응하고 양심의 가책을 적당히 달랠 목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가르치는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막상 타인의 시선이 미칠 수 없는 깊고 은밀한 중심에선 야비한 조소로 성경을 조롱하는 자들이 우리들 중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 개념을 어떤 틀로 이해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명제의 수용 문제가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성경의 신적인 절대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본이나 이문이나 시공간적 불일치 문제나 명칭의 문제로 성경의 무오성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상대적인 차원으로 밀어내는 논법에 말려들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성경의 무오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면 어떻게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정직하고 면밀하게 성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학의 원리 6: 성경의 속성들 2


성경의 무오성은 성경 내에 스스로 충돌되는 ‘모순’이 없다거나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대립되는 ‘불합리’가 성경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인간적인 상식과 합리가 두손두발 다 들어야 하는 ‘거룩한 모순’과 ‘초월적인 불합리’가 대단히 많습니다. 이를테면 무에서 존재가 나오는 것과, 물이 흐르기를 중단하는 것과, 시간이 정지하는 것과,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과, 당나귀가 말하는 것과, 완전한 신이면서 완전한 인간이신 분이 계시다는 것과,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등은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과 자연의 보편적인 질서 편에서 본다면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신비들을 거절하며 성경을 단숨에 싸잡아서 비판하되 도무지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는 공상과학 소설에 버금가는 허구라고 정죄하는 일반인의 냉소에 아무리 정교한 지성적 반박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성경의 무오성 교리는 결코 논증과 설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날짜나 인물이나 사건의 정확성과 일치성을 따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문제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시대에 모든 만물에게 모든 사안에 대하여 적용되는 진리이되 그 모든 것들의 본질을 드러내고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가 진정한 자유를 얻도록 안내하는 길로서의 진리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면에 있어서 어떠한 오류도 실패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그러한 무오성은 현상적인 관찰에 의존하는 우리의 지각과 판단을 따라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단절적인 믿음의 확신과 관계하며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인간의 마음이 그런 심각성을 스스로는 헤아리지 못하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에라도 우리에게 안식과 평강과 자유를 주는 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시며 그가 말씀하신 언약도 늘 동일하여 세상 끝날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며 모든 역사는 그 말씀의 빛을 따라왔고 앞으로도 말씀이 헛되이 하늘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사야의 증언처럼 그 말씀의 뜻하신 바가 성취되는 역사가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차원에서 성경은 무오한 것입니다.

바빙크와 같이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영감을 구별하고 계시를 위한 영감과 기록을 위한 영감 사이를 구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도 계시, 영감, 조명을 구분하고 있으며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받았다고 말합니다. 잔키우스 경우에는 계시와 영감은 창조의 때부터 거룩한 소통의 기본적인 방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직접 드러나는 계시는 없기 때문에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이나 상황의 방식으로 계시가 일어나는 계시의 영감은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에 주어지는 기록의 영감과는 당연히 구별될 수 있겠으나 그 둘 사이의 분리나 차이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당시에 계시를 의도하신 하나님이 그 계시가 기록됨에 있어서도 그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특별한 섭리로 주장하신 탓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와 기록의 영감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일컬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르트와 같이 시간이 영원과 접족하는 사건의 찰라적인 시점(Momentum)에서 성경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가 되었다가 계시라고 여기는 순간 다시 '역사'적인 문자로 돌아오는 위태로운 계시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계시가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성경 이면에, 성경 위에, 성경을 초월하여(hinter, uber, jenseits der Bibel)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표현도 성경의 어떤 일부는 계시와 무관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길 여지 때문에 사용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영감(inspiratio)과 조명(illuminatio) 사이에도 구별은 있지만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로서 성경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동일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질 수 있으며 이를 성령의 조명이라 하는데 영감과 조명이 결코 다르지 않은 이유는 영감과 조명의 주체로서 성령이 동일한 탓입니다. 특별히 영감과 조명의 구별이 무시될 경우에 인간은 무절제한 교만에 빠지게 되고 성경의 규범적 종결성과 완전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문자적인 면에서든 문자의 해석적인 면에서든 해석의 실천적인 면에서든 추가와 첨삭을 허용하지 않는 규범적 종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감과 조명을 혼돈하게 되면 성경을 보다가 혹은 묵상을 하다가 떠오른 생각과 환상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계시로 간주하며 권위에 있어서 성경과 동일한 혹은 거기에 준하는 규범적 계시성을 부여하게 되고 결국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을 성경의 자리까지 높이는 방식으로 성경을 가감하게 되기 쉽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은 궁극적인 저자로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차원과 분량은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는 포섭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도록 무한하기 때문에 의미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에 겨우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의 분량을 따라 지혜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비록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계시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군다나 우리에게 깨달음이 주어졌을 경우에는 우리가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분량은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거기에 담아 놓으신 본래의 의미까지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권위에 있어서나 객관성에 있어서나 진리의 분량에 있어서 어떠한 깨달음도 성경과 동일시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마치 성경에 버금가는 규범적 계시인 양 과장할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일부를 조금 알게 되었다는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품는 것이 보다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억의 결함이나, 무지나, 대중적인 편견이나, 상충되는 표현들과 같은 오류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지적이나 비판 때문에 성도님들 및 신학자들 중에도 성경의 무오성에 우려를 표하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해설서(A Body of Divinity)를 저술한 토마스 리즐리(Thomas Ridgley)의 견해만 보더라도 그런 우려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입니다.

1) 성경에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은 때때로 성경 필사자의 부주의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자 자신은 비록 유한하고 오류가 있지만 그의 기록은 성령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오류가 없습니다. 이레니우스 표현을 빌리자면, 거기에는 무관심할 만한 것이나 피상적인 것은 도무지 없으며 모든 것들이 신적인 지혜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리겐 경우에는 점이나 획까지도 무익한 것이 없으며 신적인 권위의 충만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quod non a plenitudine divinae maiestatis descendat)고 했습니다. 제롬은 하나의 말이나 철자나 점까지도(singuli sermones, syllabae, puncta) 천상적인 신비로 가득하기 때문에 연대기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들도 흠이나 오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필사자는 유한하고 유오한 인간이고 성경 기록자가 받은 성령의 영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본에 있어서는 성경의 원본과는 달리 때때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시의 부주의로 발생한 오류들은 지극히 미미해서 성경의 무오성을 파괴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필사조차 주관하고 계신 탓이라고 리즐리는 말합니다.

2) 성경에는 동일한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돌려지는 경우도 있고 동일한 일이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동일한 장소나 인물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경우가 많은 탓입니다. 모세의 아버지만 하더라도 ‘이드로’나 ‘호밥’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산도 ‘호렙’과 ‘시내’라는 이름들이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3) 연대기적 차이는 주로 계산법 혹은 계산하는 시점이나 범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를 테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렀던 기간이 때로는 430년 때로는 400년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전자는 아브라함 자신이 본토를 떠날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고 후자는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은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역대기나 열왕기에 언급된 유다 혹은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기간을 살펴보면 분명한 차이가 보이지만 모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통치의 시점과 종료를 다르게 취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서, 솔로몬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의 죽음 이전에 통치를 시작한 것으로 계산하는 것과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목된 시점을 통치의 시작으로 보는 것과 백성들이 왕으로 외치며 인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 것 등에 따라 통치의 기간은 달리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 어떤 성경들이 동일한 주제를 다루지만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각 성경의 의도에 있어서 다른 강조점과 개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모순이라 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과 야고보의 입장이 충돌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즉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른다고 말하지만,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의는 죄인의 의로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자유와 관계된 의로움을 뜻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의는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야고보의 '의' 개념은 우리의 믿음이 단순한 역사적 신앙이나 어떤 개념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로서 거룩한 행위들로 말미암아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듯하지만 의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표현과 개념과 강조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6) 동일한 것을 어떤 곳에서는 절대적인 것처럼 묘사하고 다른 곳에서는 비교급 형태로 묘사될 때에 성경의 두 텍스트가 서로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모든 자들에게 실천해야 하는 요청을 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내게 나아오는 자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자는 절대적인 명령이고 후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 사이의 말할 수 없는 격차를 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7) 서로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은 모순이 아니라 대체로 말씀의 대상이 다른 사람들 혹은 다른 성격의 사람들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자비할 것'을 명하시고 '아무도 판단하지 않으면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전자의 대상은 모든 개별적인 인간이고 후자의 대상은 공적인 정의를 집행하는 관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 명령이 주어지는 대상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8)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성경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에 모두 진실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말씀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말씀은 모순이 아닙니다. 전자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현존에 대한 언급이고 후자는 그의 영적인 현존 혹은 권세의 지속적인 영향을 뜻하는 것입니다.

9) 성경을 이해할 때에 시점이나 시대의 차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이나 규례들 중에는 반포되던 당시에는 믿음과 의무의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이후에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할례와 정화법과 제사법이 대표적인 것으로서, 비록 구약 시대에는 순종해야 할 법이지만 신약에는 세례로 바뀌기도 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단번의 제사가 이루어져 의식법적 유효성을 종결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승화되는 법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파괴하는 정신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계몽주의 시대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가우젠(L. Gaussen)이 잘 지적한 것처럼 유대주의 학자들은 영감을 따라 기록된 구약의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 무오성을 유대 랍비에게 적용하고, 로마 카톨릭 학자들은 그런 무오성을 교황에게 적용한 전례들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 저자들이 가진 영감의 무오성은 인간적인 무오성 개념으로 추락을 했습니다. 게다가 로마 카톨릭은 거룩한 전승(sacra traditio)의 교리를 등장시켜 성경의 충분성 및 완전성 교리마저 파괴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 2장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거룩한 전통과 성경은 교회에 위탁된 하나님 말씀의 단일하고 거룩한 좌소이다(Sacra Traditio et Sacra Scriptura unum verbi Dei sacrum depositum consituunt Ecclesiae commissum).’ 이처럼 로마 카톨릭은 전통과 성경에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되 순서에 있어서는 성경보다 전통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게다가 ‘거룩한 전통과 성경과 교회의 교도권은 하나님의 지극히 지혜로운 의논을 따라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성립될 수 없으며 이 모두가 동시에 각각의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행하심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유효하게 기여하도록 서로 연관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음이 분명하다(Patet igitur Sacram Traditionem, Sacram Scripturam et Ecclesiae Magisterium, iuxta sapientissimum Dei consilium, ita inter se connecti et consociari, ut unum sine aliis non consistat, omniaque simul, singula suo modo sub actione unius Spiritus Sancti, ad animarum salutem efficaciter conferant)’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성경에 일종의 무오성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전통이 가진 무오성에 미치지는 못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고 권위와 속성에 있어서 전통과 성경과 교회의 해석 사이에는 구분조차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계시를 역사로(Offenbarung Als Geschhichte) 이해한 초기의 판넨베르그는 비록 그가 신학의 지평을 묵시적인 보편역사 전체로 펼쳐서 새로운 신학을 시도한 혜성처럼 등장한 분이지만 그의 방법론도 계시성 면에서는 성경과 역사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성경에 일어난 사건에 시간의 역사 전체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응축된 계시가 역사의 현장에 풀어지고 역사가 종결되기 전까지는 계시가 다 벗겨질 수 없다는 계시의 개념을 전제하면 해석에 있어서 성경과 역사의 우선순위 문제가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성경이 먼저이고 역사가 뒤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역사가 펼쳐지면 그것에 의존해서 성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 말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판넨베르그 입장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헤겔의 결정론적 역사와는 달리 그의 입장은 ‘열린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면 할수록 성경의 진리가 더 잘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고, 성경이 저술되던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도 성경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간주되고 이로써 성경 해석학은 고고학 의존적인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자증적인 속성과 성경의 명료성과 성경의 완전성 교리는 묵시적 역사의 보조가 없으면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의 원리 5: 성경의 속성들 1


성경이 단순한 문자 덩어리나 텍스트가 아니라 신적인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가장 확실하고 판명한 계시이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것들보다 더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되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은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성경의 구체적인 신적 속성들을 알고 숙지하고 성경해석 및 신학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마치 말씀의 수호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경건한 환각제’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의 속성들 중에는 자율성과 적응성과 완전성과 충분성과 종결성과 영감성과 무오성과 판명성 등이 있지만 계시의 주체로서 하나님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 성경의 속성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성경의 각 구절들은 바르게 해석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스스로 계시하신 것입니다(Deus se nobis patefacit). 여기서 우리는 계시의 자발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즉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의 지으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롬1:20)’는 바울의 증언은 우리에게 창조가 하나님의 첫번째 계시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심심해서 혹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대화 파트너가 필요해서 혹은 본성의 필연적인 원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창조는 외적인 이유나 압력이나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전적으로 자유롭게 행하여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충만이 주체할 수 없어 흘러나온 유출(emanation)이나 확산(diffusion)도 아닙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로서 스스로 행하시되 명하시는 명령의 방식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창조라는 계시의 방식과 그 안에 담긴 계시의 내용은 아담과 하와가 원하였던 방식이 아니고 그들이 알기를 원하였던 내용도 아니며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그들에게 알리기 원하셨던 방식이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결코 알려지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계시를 의도하신 한에서만 알려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알리시기 원하지 않는 내용들은 결코 알려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계시의 내용을 계시의 대상에게 전달하되 어떠한 상의나 요청이나 조건을 따르지 않고 계시자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와 뜻을 따라서 전달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물과 역사를 대할 때에 우리의 호기심과 물음을 따라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불과 물과 흙과 공기와 수와 모나드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자신을 위해 그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파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인간적인 것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초래된 불가피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기를 원하시고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찾고 구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그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창조의 계시와 동일하나 하나님이 친히 말씀을 하신다(Deus dixit)는 독특한 방식과 내용의 상세함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과 창조의 연관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성경의 계시가 창조의 계시에 기초하고 있으며 동시에 창조의 계시를 완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의 질서라는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전개되며 또한 창조의 계시는 말씀을 통해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선순환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1장이 잘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는 계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출생과 삶과 죽음이란 지극히 일상적인 창조의 질서를 따라 계시의 종결자가 되셨기 때문에 성경과 창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계시는 비록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방식이며 하나님이 계시하기 원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호기심을 풀어주고 사변적인 물음에 답변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리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교회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교회의 권위로 말미암아 성경이 계시로 인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창조의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삼으시되 하나님이 친히 계시와 영감으로 만드신 것이며 성경의 권위는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도 인간적인 목적과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과 명시하신 방법을 따라 진리의 영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방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영이시며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는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외에 다른 어떤 이에게도 결코 알려질 수 없으며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에 압도되지 않도록 우리의 제한적인 지각에 스스로를 적응시켜(Deus se ad modulum nostrum accommodavit, ne mentes nostras immensitate suae gloriae absorbeat)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자연과 성경의 방식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적응계시 개념은 비록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Johannes Kepler)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의 적응적인 성격을 강조할 때 도입한 것이지만 그것은 종교 개혁자들 및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크리소스톰 같은 교부들도 주장했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는 성경이 인간의 오류에도 적응되어 무오할 수 있다며 성경의 무오성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적응계시 이론을 동원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이 이론에 짙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천지와 그 사이의 만물을 창조하신 것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자신을 알리시는 적응적 계시이며, 우리의 언어와 표현을 사용하여 기록하신 성경도 우리에게 적응하신 계시라는 사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창조물도 우리는 그것의 있는 그대로를 보거나 알 수 없습니다. 빛이나 입자 방식의 중계나 번역이 없이는 지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물이 지각되는 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적응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우리의 본성적 지각을 벗어난 하나님은 더더욱 우리의 우둔한 머리에 적응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그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적응계시 중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은 죄 이외에는 우리와 한결 같이 동일하실 정도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최대의 적응이며 그런 적응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 지식의 최고점인 동시에 한계선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종국에 우리가 하늘에 속한 형체를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마지막 적응의 형태가 될 것입니다.

적응계시 이론과 관련하여, 인간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성경이 적응된 것이라면 성경도 인간이 가진 모든 제한성과 부패성과 죄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과 의심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경이 인간의 불완전에 적응된 계시지만 성경의 계시 자체는 결코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인간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사랑하고 계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 당신이 의도하신 내용을 의도하신 방법대로 의도하신 분량만큼 계시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성경은 어떠한 모자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무엇보다 하나님 편에서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도달하기 원하는 결론이나 디테일에 성경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성경을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이 보기에는 인간이 원하는 내용과 원하는 방식과 원하는 차원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불완전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편에서의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서는 평가될 수 없는 책입니다. 다른 만물들도 그렇듯이 성경도 하나님의 자발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식과 방향과 목적을 따라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는 책입니다. 인간 중심성을 포기하는 자기부인 없이는 성경을 펼쳐도 종이와 잉크의 혼합물일 뿐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스스로 증거하고 있기에 성경은 자체의 주석(scriptur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이 된다는 성경의 자체 가신성은 성경 자체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원리이며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되 마치 논의나 논증을 통하여 도달하는 결론이 아닌 일방적인 계시를 대하듯이 진리의 영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이런 자세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숙지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확신은 구원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고 성령의 조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믿음 이외의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어 보입니다.

성경의 오류 불가능성(infallibility) 및 무오성(inerrancy)도 이와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 교리는 성경의 권위가 전통이나 교회와 같은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보다 높다는 것을 설명하고 변증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으로 16세기 칼빈의 경우에는 성경의 무오성이 성경의 무오한 원본과 이후의 다른 여러 사본들 사이의 차이에 기초하여 논의되지 않습니다. 칼빈은 비록 사본 텍스트의 실수와 변경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이 선지자들 및 사도들을 수단으로 삼아 교회에 실패할 수 없는 믿음의 규범을 주셨다고 확고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순이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성경이 인간의 연약한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가르치고 있는데 하나님은 참되시며 그의 말씀도 진실하기 때문에 성경도 참되며 인간을 기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진정한 믿음은 성경에 증거된 모든 것들을 믿는 것이며 성경에서 도출되지 않은 어떠한 것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는 어떠한 것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7세기의 에드워드 레이(Edward Leigh)는 성경의 무오성을 논하되 인간적인 기준이 작용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성경의 진리가 1) 인간의 어떠한 지각적 진리보다 탁월하고 2) 모든 자연적 이성보다 뛰어나며 3) 자증적인 진리이며 4) 모든 진리의 규범이 되기 때문에 이것에 동의되지 않는 어떤한 교리나 경배도 진리일 수 없다는 입장을 펼칩니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의장 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e)의 견해에 따르면, 참된 진리가 논증될 수 있다(true knowledge is demonstrable)는 주장이 자연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타당하나 하나님의 말씀에만 기초하는 기독교적 진리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어떤 것을 증명하는 것은 ‘논증(demonstration)’으로 불리울 수 없다고 트위스는 말합니다.

제네바 신학자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현존하는 사본 텍스트에 기계적인 결함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은 하면서도 그것을 교리적 논의의 대상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사본들은 스펠링과 구두점에 있어서 불규칙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문 독법들(variant readings)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필사자의 부주의 때문에 때때로 발생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기호로서 가리키고 있는 의미의 실체에는 결코 오류나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성경 텍스트는 원본의 고유한 의미를 결코 상실하지 않았으며 비록 난해한 구절들은 있지만 우주적 결함(menda universalia)은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무오성 논의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무오성의 의미가 틀리다/맞다에 관한 것인지, 바르다/그르다에 관한 것인지, 무엇에 대하여 틀리다/맞다인지, 무엇에 대하여 바르다/그르다에 대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틀리다 혹은 그르다는 언어는 그 양상이 형용사든 동사든 양심과 관계하는 고도의 인간 문화적인 말이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논하는 기준 개념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기록된 성경은 폐하여질 수 없다’는 말이든지 마태복음 5장 18절의 ‘결단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전해지는 어감처럼 무오성은 인간의 지적인 판단이나 과학적인 기준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신뢰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시누스 학자들과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각을 세웠던 호른벡(Johannes Hoornbecke)은 성경의 무오성을 옹호하며 성경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세부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성령 하나님은 그의 필사자(amanuenses)를 오류에서 벗어나게 하셨으며 항상 모든 것에 있어서(semper et in omnibus) 가장 확실하고 변함이 없고 항구적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시편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며 여호와의 말씀은 흠이 없이 순수하며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며 여호와의 증거는 진실하며 여호와의 명령은 순결하고 바르다는 시편 기자의 말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오류나 거짓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무오성은 말씀에 대한 이러한 신뢰에 대한 것이지 사실과의 일치나 차이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보기에 사실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진술이라 할지라도 칸트의 선험적 가상의 오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한 것도 무오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도 ‘무오’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은 인간의 구원과 성령의 역사와 확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확신시켜 주기 전에는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어떠한 확신도 있을 수 없다(verbum ipsum non valde certum nobis esse nisi Spiritus testimonio confirmetur)는 칼빈의 견해에 비추어 본다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는 것은 무한한 신비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의 원리 4: 성경을 대하는 태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창조적 본성 때문에 본성적인 종교성(semen religionis naturalis)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은 본성의 부패로 인해 인간은 원인과 결과 방식으로 취득되는 지각의 범주를 벗어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쉽게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는 반면 인과율 방식으로 쉽게 파악되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그것을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신비롭고 희귀한 사물이나 현상을 접하였을 때에 그것을 종교의 대상으로 삼든지 아니면 그것에 본래적인 분량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동시에 일상 속에서 빈번하게 발견되고 경험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 존재성도 망각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도 놀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은 고도로 발달된 매체들과 학문의 세분화로 인해 분야를 막론하고 방대한 정보가 신속하게 생산되고 유통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책과 문자는 이러한 정보의 시대에 가장 흔하고 일상적인 수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물론 애굽에서 주전 3000년 이전부터 시작된 먹물과 파피루스 ‘종이’를 가지고 그림 및 글자 방식으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인류의 획기적인 발명이며 고유한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게다가 스크린 문화에 밀려 차가운 냉대를 받고 있어서 문자문화 종말의 음울한 기운까지 감돌고 있습니다. 문자의 방식으로 기록된 책 형태의 성경이 이러한 문화적 현실에서 정보를 취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여겨지고 동영상 형태로 급속히 번역되어 성경책 펼치는 동기까지 유실되는 현상과 그런 현상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방조하며 오히려 그런 문화를 부추기고 앞다투어 취하려는 교회의 현실은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갖습니다.

이제 딱딱하고 건조한 문자의 형태로 기록된 성경책은 다른 문서들에 비해 재미와 유용성 면에서도 현저히 떨어지는 퇴물이며 그것에 교회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요 시대에 뒤떨어진 일로 여기지는 경향도 없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수단적 원리인 성경을 멀리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비록 오늘날의 고유한 현상만은 아니지만 지금 득세한 과학의 기계적인 특성과 물질주의 만연과 인간화된 자연 등에 대한 염증까지 가세하여 더욱 절박하고 강력해진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에 문자와 책의 형태로 담아낼 수 없는 신비와 기적에 과도한 호기심을 보이며 성경적 진리를 뒷전으로 돌리려는 교회의 심각한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면 오직 말씀의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뿐일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문자 덩어리가 아니며 정보를 전달하는 문헌 텍스트도 아닙니다. 성경은 비록 인간적인 문자와 책의 형태를 취하기는 했으나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기에 그 안에는 다른 텍스트와 완전히 구별되는 신적인 성격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님이 ‘내가 이르는 말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 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 자체가 영이요 생명인 것은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텍스트에 대해서도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성경은 성령과 분리될 수 없으며 생명과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혼의 양식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성령은 반드시 성경과 더불어 역사하기 때문에 성경이 배제된 성령의 역사는 없고 성경과 대립되는 성령의 역사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는 것은 죽음과도 관련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영이기 때문에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문학이나 인문과학 도서를 펼치듯이 성경을 일반 텍스트로 간주하고 기록자의 인간적인 의도를 간파하되 문법과 다양한 문맥에서 벗겨지는 정도의 인문학적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성경의 자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되 다수의 가까운 원인들을 수단으로 삼으셔서 우리에게 가까이 적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여 우리로 도달하기 원하시는 그 뜻의 신적인 차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에 성경을 펼칠 때마다 삶과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열매에 독이 있어서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 자체가 생명과 죽음을 가르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당연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는 생명과 죽음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의 엄중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당시의 호렙산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죄에서 건저내신 이후에 그들의 정체성을 법적으로 규정하는 시점에 이르러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땅이 진동하던 그때의 상황을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모세의 고백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노라(히12:21).’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현장에서 말씀의 수령자로 서 있었던 모세가 느꼈던 지극한 경외심은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이 텍스트 형태로 언어화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대하는 자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대제사장이 가장 중요한 날인 대속죄일 가장 중요한 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가 지극히 고귀하신 분인 하나님을 만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대제사장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사활을 건 일입니다. 이사야가 지적한 것처럼 스승의 눈이 어두우면 한 시대 전체가 어두운 혼돈 속에서 신음해야 하듯이 당시에 대제사장 입술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육중한 기운에 눌려 신음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생명과 죽음에 관한 일이며 그것을 들어야 할 백성들의 영적 흥망이 좌우되는 일입니다. 나아가 말씀을 버리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대외적인 책무도 져버리고 세상은 마침내 마지막 소망의 등불까지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득세하게 된 사실과 대제사장 및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 수령했던 호랩산과 지성소 안에서 느꼈던 지극히 큰 두려움과 떨림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성경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그 성경을 일개의 텍스트로 대우하고 정보전달 수단 정도로 간주하며 인문학적 분석에 성경 텍스트의 궁극적인 의미를 내맡기는 우리의 성경 대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간문맥 선에서 이루어진 태도를 극복하지 못하면 성경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영이며 생명이란 사실과 주장은 과학의 시대에 웃기고 자빠진 미신으로 치부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의 부재는 태도의 단순한 공백으로 끝나지 않고 그 빈자리를 다른 비성경적 태도가 채우고 고삐 풀린 권세를 휘두르게 된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과학의 현대적인 정밀성에 부응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물질문명 시대에 화려한 주도권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에 실망한 교회는 이제 과학과 물질에 대한 염증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신비로운 현상에 무분별한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주술적인 행위와 심령술적 주문과 기괴한 행동과 심리적인 황홀경에 기독교적 정조마저 내던지고 영적 음행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방식에 있어서는 이방 종교의 주술적인 행습을 대놓고 수용하면 대대적인 비판을 감수해야 하겠기에 성경적 표현들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선호되는 대표적인 수단은 아마도 예언일 것입니다.

예언은 개인이 듣는 경우도 있겠고 두 세 사람이 증인이 되는 집단적인 예언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 듣는 경우에는 그것의 진위를 분별하는 객관적인 검증 장치가 없습니다. 즉 예언을 받은 당사자의 확인할 길이 없는 정직성과 판단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예언은 그것이 자기의 생각인지, 사단의 생각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예언의 체험을 교회의 보편적인 질서와 방향을 설정하고 지탱하는 토대로 삼는 것은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 개인의 삶을 그런 체험의 방식으로 이끄시는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체험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권위를 갖거나 강요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체험 당사자로 하여금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만든다면 신적인 무게까지 실린 위협에 예언 당사자도 희생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마태복음 7장 후반부가 가장 엄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을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냐(21절)’고 묻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교회에서 가장 신실한 신앙의 표상으로 여겨질 분들인데, 주님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2절)’ 내치시며 ‘내 아버지의 뜻대로’를 강조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까지 밝히고 계십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들을 행하되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불법일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무리 성경적 표현들과 주의 이름을 앞세운다 할지라도 그런 '신앙적인 행위'가 사망의 악취를 풍기는 회칠한 무덤일 수 있다는 경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집단이 신적인 체험을 공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변화산에 올라가서 겪은 체험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때 세 명의 제자들은 영광의 형체로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아마도 신구약 전체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런 형체를 목격하고 하늘에서 성부의 음성이 들려온 것보다 더 놀랍고 큰 기적과 기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최고의 유일무이 체험을 한 베드로는 이러한 집단적인 체험을 언급한 이후에 아주 예리한 지적을 했습니다. 베드로 후서 1장 19절을 보시면,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이는 그토록 신비로운 체험보다 더 확실하고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는 예언이 있는데 성경의 모든 예언이 바로 그것임을 베드로는 가장 놀라운 체험과의 비교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의 뜻을 보여줌에 있어서 성경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하고 객관적인 예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언의 종결과 완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finem et complementum in Christo) 때문에 계시적 예언의 필요성도 지속성도 없다는 칼빈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6장 27-31절을 보시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쉽다’는 말씀 이후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십시오. 잘 아시는 것처럼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깁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며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이에 아브라함은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것이라’며 차가운 어조로 답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답변은 여전히 강직하게 ‘모세와 선지자를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선을 긋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다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예언이기 때문에, 기록된 모든 성경은 한 획도 떨어지지 않을 것인데 이는 천지가 없어져도 결코 변경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일점 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언이며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기록의 형태를 취하였기 때문에 보다 확실하고 절대적인 예언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꽃은 시들고 잎은 마르지만, 또한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있는 변동될 모든 것들도 체질이 녹아 없어지는 때가 올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이라는 그런 성경의 속성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신앙은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말씀 이외의 요소에 의존한 신앙은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그 다른 요소와 성경에 갭이 발생되는 경우에는 점점 성경을 멀리하게 되고 급기야 성경을 버리는 우매함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수렴되고 만나고 아무도 배제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공공의 장입니다. 거기서 얻은 유익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유익이 될 수 있으며 거기서 발견한 깨달음은 모두가 배울 수 있습니다. 거기서 받은 삶의 변화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도전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자입니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말씀의 왕성한 섭취는 교회의 모든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말씀이 거절된 사람들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그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영적 영향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고 주님과 연합하는 성경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적 우월성을 느끼고 기회만 되면 입증하고 싶은 유혹도 적어서 온유함과 겸손에 이르는 일에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면 앞뒤 문맥과 단절되어 독립적인 구절처럼 느껴지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등이 나오는데 이것은 앞뒤 문맥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대단히 깊은 저자의 의도가 숨겨진 말입니다. 즉 1장부터 시작된 내용으로 하나님이 예전에는 선지자를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이 모든 날 마지막이 되어서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면서 이처럼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전하는 내용은 구약과 신학이 다르지 않다는 내용을 진술하는 와중에 단절적인 인상을 주는 듯하지만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구절이 등장한 것입니다. 즉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과 신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란 타이틀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제안을 따른다면, 신구약의 합당한 이름은 '거룩한 책(biblia sacra 혹은 sacra scriptura)'이 아니라 성경의 본질을 가장 잘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Verba Dei)'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문자나 언어로 된 텍스트가 아니라 영입니다. 아담이 보여준 것처럼 생명과 사망이 맞물려 있으며 인류의 흥망이 그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에게 모세가 보여준 것처럼 심히 두렵고 떨리는 태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부재는 미신적인 신앙의 창궐을 초래할 것입니다. 오늘날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신비주의 운동의 날개는 교회가 달아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의 기본으로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말씀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열매를 향기와 빛으로 결실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음을 교회가 입증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해진 때입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미신적인 광기는 참으로 악한 것이지만 그것을 격파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대응이 아닙니다. 침묵할 수는 없겠으나 그러한 악을 허용하사 교회로 하여금 부끄러운 죄와 나태함을 시급히 털어내고 성경의 본질로 돌이키게 하는 선한 수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학의 원리 3: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 2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의 원리로 삼다는 것이 16세기 및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안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게다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하나님의 존재방식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신학의 체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교리들 중의 하나로 다루어 온 관행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의 원리로 다루면 마치 어떤 중심적인 교리에서 신학의 전 체계가 인간의 논리적인 연역을 따라 산출되고 결국 성경과는 동떨어진 듯한 인상을 주어 낯선 거부감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에, 구약의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다른 하나님도 없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까지 부인하는 유대적인 단일신론 입장이나 오직 하나님은 한 분 뿐이라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신이 있다는 이방적인 다신론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의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그 속성을 논하고 그의 행하신 일을 논하기 이전에 하나님 자신을 먼저 상고하는 것이 너무도 마땅하며 여기서 ‘하나님 자신’이라 함은 특정한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학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근원적인 결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의미는 주어가 누구냐에 달려 있기에 주어가 바뀌면 성경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의 종결자로 저는 어거스틴 이름을 거명하고 곧장 그의 삼위일체 이해로 뛰어들고 싶지만 그도 역시 교회의 출중한 선생들이 남긴 삼위일체 가르침을 물려 받고 연구하고 집대성한 인물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순차를 따라 그 이전에 이루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먼저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시온(Marcion, 85-160)이 로마에서 이단적인 활동을 개시하기 이전에 바나바(Barnabas, 70-128)는 유대교에 강한 적대감을 보이면서 모세가 받은 두 돌판을 주 예수의 언약(διαθήκην κυρίου Ἰησοῦ)으로 규정했고,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은 신약과 구약의 저자가 항상 동일하신 분(τὸν αὐτὸν ὄντα ἀεὶ)이시며 그 동일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고 궁극적인 법(αἰώνιός νόμος καὶ τελευταῖος)이며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탁월한 언약(διαθήκη κυριωτάτη πασῶν)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 그리스도 예수는 성자시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모세에게 사람과 천사와 영광으로 나타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스틴은 아브라함 부르신 동일하신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부르심을 따라(διὰ τῆς ὁμοίας κλήσεως) 우리를 불렀으며 아브라함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통하여(διὰ τὴν ὁμοίαν πίστιν)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폴리캅(Polycarp, 69-155)의 제자로 알려진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 입장도 구약과 신약은 하나요 동일한 본질을 가졌으며(unius et ejusdem substantiae) 하나요 동일한 하나님이 주신 것(ab uno et eodem Deo)이기 때문에 하나요 동일한 것(unum et eundem)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모두 한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완전한 믿음(πίστις ὁλόκληρος)을 가졌으며 하나님의 영 안에서의 확신(πεισμονὴ βεβαία)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실에서 이레니우스는 온 세상과 모든 시대에 하나의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출해 냈습니다. 나아가 고린도전서 12장 4-7절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이 수행하는 고유한 사역으로 이해하되, 성부는 모든 것들과 모든 시대 속에서 다양한 은사를 베푸시는 동일하신 성령과 다양한 직분을 수행하는 동일하신 성자를 통하여 계시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1-2세기 교부들의 생각은 주로 신구약 및 그 저자의 통일성과 상당히 결부되어 있으며 구원에 있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터툴리안(Tertullian, 155-220) 경우에는 한발짝 더 나아가 신구약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용어들과 개념들을 확립해 나갑니다. 말시온은 이러한 작업에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며 그는 복음과 율법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하나님과 율법의 하나님을 대립적인 존재로 설정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 모두에 대단히 치명적인 왜곡과 위협을 가하였던 자입니다. 말시온을 반박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터툴리안 이해는 신구약 모두에서 성자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이 비록 계시의 명료성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며 이는 결국 세 위격(tres persona)과 한 실체(una substantia)라는 도식으로 하나님을 표상하는 단계까지 간 것입니다. 나아가 복음적인 가르침(evangelica doctrina)은 아담과 더불어 시작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믿음이며 이는 오고오는 모든 이단들을 격파하는 한결같은 권능을 가진 규범(regulam)이라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터툴리안 개념화의 중요한 요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시간차를 두고 이름만 바뀌었을 뿐 하나요 같은 존재성을 가진 단일신 개념으로 이해하는 자들의 오류와 성자가 성육신 당시에 비로소 나타나신 것처럼 여겨 그의 신성과 구약 속에서의 현현을 부정하는 자들의 오류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을 일체성이 삼위성 안으로 분배되는(unitatem in trinitatem disponit) 경륜(dispensatio)으로 표현하되 실체(substantia)와 지위(status)와 권위(potestas)에 있어서는 ‘하나’라고 말하고 각각에 대응되는 형식(forma)과 신분(gradus)과 나타남(species)에 있어서는 ‘셋’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여기에서 셋이라는 것은 분할할 수 없는 수(numerum sine divisione)를 뜻합니다. 성부를 제 1위격, 성자를 제 2위격, 성령을 제 3위격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첫째(primus) 둘째(secundus) 셋째(tertius)라는 말은 서수적인 것이며 분리가 아니라 구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샛째,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ego et pater unum)라고 하셨을 때에 그 ‘하나(unum)’는 ‘실체의 통일성(substantiae unitatem)’을 가리키는 것이지 ‘수의 단수(numeri singularitatem)’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동방의 교부들 중에는 오리겐(Origen, 185-254)의 가장 탁월한 제자로 알려진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트루구스(Gregorius Thaumaturgus, 205-270)가 신앙 해설(Expositio fidei)에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졌으며(ὁμοούσιον) 삼위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μίαν τὴν οὐσίαν τῆν Τριάδος)’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성자는 성부가 참된 발생(γεννηθέντος)을 따라 낳으셨고 성령은 성부의 본질에서 성자로 말미암아 영원히 보내어진(ἐκπεμθέντος) 분으로 묘사하되 발출이란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인 점입니다. 나아가 그는 성부와 성자가 단지 우리의 인식(cogitatione nostra)에 따라 다를 뿐이고 본질을 따라서는 다르지 않다고 한 것과 성자를 하나의 피조물 및 만들어진 것(κτίσμα καὶ ποίημα)이라고 표상한 것 때문에 바질(Basil of Caesarea, 330-379)에 의해 아리우스 광란에 편승한 자라는 정죄를 받습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9)는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서 한 본질(μὶα οὐσία), 본성(ϕύσις), 형상(μόρϕη), 유형(γένος), 신성(θεότης)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세 위격들(τρία πρόσωπα)에 대해서는 본체들(ὑποστάσεις), 고유한 것들(ἴδια), 분들(ἄτομα), 형체들(χαρακτῆρας)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되 위격과 본질의 관계에 있어서는 삼위성 안에 한 하나님(ένα Θεό ἐν Τριάδι) 혹은 유일성 안에 삼위성(τῆν Τριάδα ἐν μονάδι) 등의 표현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터툴리안, 어거스틴, 칼빈과 다른 아타나시우스의 특이한 점은 원인자(αἴτιος)란 용어를 사용하여 성부만이 성자를 발생하고 성령을 발출하기 때문에 유일한 원인자가 되시며 성자나 성령은 원인자가 아니라 원인으로 말미암은 자(τὰ αἰτιατὰ)라고 하였으며, 삼위일체 안에는 첫째도 없고 둘째도 없고 셋째도 없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시적인 분(ἅμα Πατὴρ, ἅμα Υἱὸς, ἅμα Πνεῦμα ἅγιον)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논함에 있어서는 성경에 두 위격들을 가리키는 신적인 성격의 이름들과 행하신 일들을 근거로 논증하는 전례를 남긴 분입니다.

바질은 사용되는 전치사가 다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성도 다르며 위격의 본성이 서로 다르면 표현에 있어서도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의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 마치 하나의 표현이 어떤 특정한 위격에 고유하게 배당되는 것처럼 ‘으로부터(τὸ ἐξ οὗ)’ 고유성은 성부에게 돌리고 ‘를 통하여(τὸ δἰ οὗ)’ 고유성은 성자에게 돌리고 ‘안에서(τὸ ἐν ὧ)’ 고유성은 성령에게 돌리는 아에티우스(Aetius) 류의 주장을 거절하고 전치사의 구별은 본성의 차이를 수반하지 않으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전치사 사용에 자유로운 바질은 당시에 통용되던 영광송인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τῷ θεῷ καὶ Πατρὶ διὰ τοῦ Υἱοῦ ἐν τῷ ἁγίῳ Πνεύματι)’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성령과 더불어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τῷ θεῷ καὶ Πατρὶ μετὰ τοῦ Υἱοῦ σὺν τῷ ἁγίῳ Πνεύματι)’ 영광을 돌린다로 바꾸어 공예배 때 쓰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바질은 당시 성령 하나님을 본질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에 비해 열등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이단적인 사상이 팽배한 와중에 성령 하나님은 성부 및 성자와 동일한 본질을 가졌으며 영광과 위엄에 있어서도 동등하며 성부가 비출생, 성자가 출생이란 고유성이 부여되듯 성령은 성화의 원천(Ἁγιασμοῦ γένεσις) 혹은 성화하는 능력(ἁγιαστκὴ δύναμις)이란 고유성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덕성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한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제누스(Gregorius Nazianzenus, 329-390)는 삼위일체 방식의 신적 존재성을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본성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본성을 아는 것이 ‘어렵다’고 한 플라톤의 겸양보다 더 나아간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기에 감히 사변을 동원하지 말 것이며 물질적인 사유도 버려야 할 것이며 결국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신학의 방법으로 부정의 방식(via negationis)을 권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무한성과 불변성 등인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οὐσία)이 아니라 성부의 특성(ἰδιότης) 혹은 위격(ὑπόστασις)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바질과 더불어 세 위격과 한 실체라는 삼위일체 도식을 수용한 그레고리우스는 성부의 고유성이 비출생성(ἀγεννησία), 성자의 고유성이 출생성(γένησις), 성령의 고유성(ἐκπόρευσις)이 발출이라 했습니다. 그는 각 위격에 별칭도 주었는데 성부는 기뻐하는 분(τὸ εὐδοκεῖν), 성자는 협력하는 분(τὸ συνεργεῖν), 성령은 영감하는 분(τὸ ἐμπνεῖν)이라고 했으며 아리우스 주장을 의식한 탓인지 ‘그가 계시지 않은 때가 없었다(οὐκ ἦν ὅτε οὐκ ἦν)’는 진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사역(ἐνέργεια)이 아니라 위격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질의 단일성도 강조하며 그는 요한일서 1장 9구절에 착안하여 세상에 이르러 모든 인간들을 비추는 참된 빛이 ‘있었고 있었고 있었으나 하나로 있었으며 빛과 빛과 빛이 있지만 하나의 빛이듯이 한 하나님이 계시다(Ἧν καὶ ἧν καὶ ἧν ἀλλ̉ ἓν ἧν. Φῶς καὶ φῶς καὶ φῶς ἓν φῶς εἷς θεός)’고 말합니다. 그의 그리스도 이해가 특이한데, 신성과 인성의 두 속성은 서로 침투하기(περιχωρεῖν) 때문에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θεοτόκος), 그리스도 탄생을 하나님의 탄생(γεννησις θεοῦ), 수난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παθὼν θεός) 혹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θεὸς σταυρούμενος), 그리고 그리스도 보혈을 하나님의 보혈(αἷμα θεοῦ), 그리스도 죽음을 하나님이 죽으신 것(θεὸς τέθνηκε)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 신성에 방점을 찍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성경의 신비적 해석에 심취하여 신비신학 창시자로 불리우는 그레고리우스 뉘쎄누스(Gregorius Nyssenus, 335-395)는 당연히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이성적 이해보다 신앙적 수용의 중요성을 외쳤으며 신앙적인 면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너무도 많다고 말합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현저한 격차를 한 시도 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였으나 최소한 ‘초보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이성적인 논증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며 그 일환으로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이며 실체는 셋(μία οὐσία τρεῖς ὑποστάσεις)’이라는 삼위일체 공식의 신학적 논증에 각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비출생성, 출생성, 발출 개념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동방의 마지막 정통적인 교부라고 불리우는 요하네스 다마스케누스(Johannes Damascenus, 676-749) 역시 앞선 교부들의 입장을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나시지 않음과 나심과 발출이란 존재의 고유한 방식들 이외에는 전적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세 실체들의 관계성을 말하면서, 그는 세 실체들이 ‘서로 나누어질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도록 하나이며 혼합됨이 없이 서로 통전하며 혼합됨이 없이 하나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이며 분리될 수 없으면서 구별되어 있는 자들(ἀνεκφοιτήτους δὲ αὐτὰς καὶ ἀδιαστάτους ἀλλήλων καὶ ἡνωμένος καὶ ἐν ἀλλήλαις ἀσυγχύτως περιχωρούσας ἐπιστάμεθα καὶ ἡνωμένας μὲν ἀσυγχύτως τρεῖς γὰρ εἰσιν εἰ καὶ ἥνωται διαιρουμένας δὲ ἀδιαστάτως)’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는 한 실체, 신성, 능력, 권세, 의지, 역사, 근원, 주권, 왕국 등의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은 이렇게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세 실체들은 모두 동일한 경배와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실천적인 측면의 강조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어거스틴 입장을 다루고자 하는데, 동방에서 사용하는 본질-실체(οὐσία-ὑποστάσεις) 도식을 서방의 실체-위격(essentia-persona) 도식으로 이해하면 언어상의 혼동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거스틴 이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됨이 없이 존재하는 대로 분리됨이 없이 일하시는 분이며...그들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되신다(quamvis pater et filius et spiritus sanctus sicut inseparabiles sunt, ita inseparabiliter operentur...ideoque non sint tres dii sed unus deus)’는 것은 신구약 성경의 정통적인 해석자들(divinorum librorum veterum et novorum catholici tractatores)의 고백이며 범교회적 신앙(catholica fides)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조금 확대한 함의를 말한다면, 신구약 전체를 이해한 결론이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신구약 성경은 벗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통성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체계와 규모에 현저한 발전을 보인 어거스틴 신학은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의 관계성에 있어서 신학의 지평을 경이로운 수준까지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를 따라(primum secundum auctoritatem Scripturarum sanctarum) 탐구해야 한다는 것과 성경을 대함에 있어서 경건과 지식과 능력과 생각과 정결함과 지혜보다 훨씬 긴요한 것으로서 하나님 경외함(timorem Dei)를 강조하는 그의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천재성을 동원하고 만들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아무리 넓은 보편성을 확보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계시하지 않으면 알려질 수 없고 다가갈 수도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을 시공간적 존재로 격하시켜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하신 대상의 하나로 간주하고 결국 고의든 무의식적 본능이든 하나님과 비겨 이기려는 극도의 교만을 발산하는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신 성경의 권위 아래로 인간의 상식과 천재성과 보편성과 심지어 본능까지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은 지극히 간악하고 교활한 우상으로 전락하여 외부에서 가해지는 속임수나 위협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은밀하고 강력하게 진리를 빼앗고 이로써 교회의 근본을 뒤흔들고 파괴하는 복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인간적인 언어의 방식으로 적응된 것이지만 결코 문자나 정보가 아닙니다. 성경의 한 이오타를 읽을 때에라도 우리는 마치 모세가 호랩산에 올랐을 때 땅이 진동하여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히12:21)’고 하였고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하신대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지극히 작은 흠만 있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그런 각오로 들어간 것처럼 흠결이 많은 나는 죽고 완벽하게 거룩하신 그리스도 예수만이 살도록 우리의 전인격과 삶 전체를 벌거벗은 것처럼 하나님께 의탁하며 성경을 펼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어거스틴은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자체로는 분리될 수 없으나 가시적인 피조물의 모양으로 분리되게 보인다’고 말해야 했을 때에 심히 떨었다(timuit)고 말합니다. 그런 경외심을 가지고 그는 분리된 것처럼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다 명료하게 깨닫기 위해 언어 현상을 먼저 간략하게 논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기 위하여(utique)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서(consuetudine humana) 발견되지 않는 언어는 결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언어가 우리에게 가깝다 할지라도 언어의 물리적인 단위는 파장일 뿐이며 무언가를 운반하는 수레에 불과한 것이기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와 그 수레에 담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언어는 무수한 얼굴을 갖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이 성경에 자신의 뜻을 담으셨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성경의 모든 구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였으며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추구하는 자에게 성경은 하나의 얼굴(una facies)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비록 하나의 단어라도 그것이 쓰이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르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말이 많은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아니며 지극히 풍성하고 다양하나 그 안에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언어는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며 시간차를 두고 공간의 진동에 의존하여 비로소 소통의 기능을 발휘하는 시공간 의존적인 것입니다. 무한하고 영원하고 시간공적 제약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고 불변적인 뜻을 그런 언어로 담으려고 할 때에는 적응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적응의 상태 자체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뜻이 계시되는 최종적인 내용인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오시는 성육신의 방식으로 적응하신 성자 하나님을 비록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후에는 그렇게 알지 않게 되었다(고후5:16)’고 한 바울의 고백이 암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어적인 적응을 궁극적인 추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바울이 육신의 안목을 따라 범하였던 오류를 동일하게 답습하는 격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 뜻의 언어적 계시는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문자를 생략하고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의 언어는 한 이오타도 타협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문자에 머무는 것을 의도하는 것은 ‘죽이는 문자’와 ‘살리는 영’의 대립을 망각한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의 언어적 계시는 살리는 진리의 영으로서 동일하신 성령의 조명이 없다면 인간의 언어에 불과하고 역사의 산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잠시 접어두고 언어현상 자체를 살펴보면, 언어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언어로 계시될 때에 불가불 시간적 간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 사이에 음절과 음절이 채워지는 현상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입술에서 파장을 입고 밖으로 출고된 언어만이 아니라 마음의 언어(locutiones cordis)라는 생각도 눈과 귀의 지각만 생략된 형태일 뿐 시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현상이기 때문에 여전히 언어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밖으로 소리나는 말은 안에서 빛나는 말의 기호(verbum quod foris sonat signum est verbi quod intus lucet)’이기 때문에 말과 생각은 본질상 동일한 것이며 어거스틴은 오히려 내면의 언어를 말이라고 부름이 옳다는 입장까지 취합니다. 마음의 생각이든 입술의 언어적 출고이든 그런 분할적인 언어의 시공간적 한계를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시간적 간격(intervallis temporum)이 개입하며 그 사이로 각 이름의 음절들이 채웁니다(vocabuli syllabae occupant nominari).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언어로 분할되어 명명되는 것은 하나님의 다양성(diversitate)에 있어서가 아니라 분배(distributione)에 있어서며 분리(divisione)에 있어서가 아니라 구별(distinctione)에 있어서란 터툴리안 입장을 어거스틴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적인 한계를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을 부를 때에는 마치 단독적인 존재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되며 동시에 거명할 수 없지만(nec simul dici potuerunt)’ ‘실체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셋이 하나이며 시간적 운동이나 시공간의 간격 없이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며 진리와 사랑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요 동일하신 분입니다(simul unum atque idem).’ 게다가 언어의 한계는 인간적인 인식의 한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한계를 인식한 어거스틴은 무한한 생명의 주인이며 비가시적 본성을 가지신 불변적인 하나님을 더군다나 보이고 변하고 죽고 부족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 말한다는 것은 더더욱 가당치도 않은 일이며 하나님을 형언할 수 없는 분이라고 표현할 때조차도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형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경외심을 보입니다. 게다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는 지성이 그 지성 자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지적 겸손의 하한선도 긋습니다.

하나님은 ‘질이 없는 선, 양이 없는 최대성, 부족함이 없는 창조자, 위치가 없는 좌정자, 가진 것이 없이 만물을 포괄하는 자, 장소 없이 어디에나 전적으로 거하시는 분, 시간 없이 영원하신 분, 움직임 없이 움직이게 하는 분, 어떠한 수동성도 없으신 분’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하나님을 표상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속성을 따라 많고 적고 크고 작고 높고 낮고 넓고 좁고 뜨겁고 차갑고와 같은 술어들을 적용할 수 없으며, 인간의 조악한 상상력을 펼쳐 하나님이 땅의 물질적인 것들에 비해 더 낫다는 식의 비교급 표상도 부당하며, 하나님은 무엇이 아니다는 식의 부정신학 접근법도 하나님을 표상하는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삼위일체 논의는 전적으로 성경의 계시된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동시에 성경을 이탈하지 말되 성경의 한 단어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오직성경 및 전성경(sola scriptura et tota) 정신에 충실할 것을 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격(persona), 실체(substantia), 본질(essentia), 삼위일체(trinitas) 등의 용어들이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개념들을 도용하는 것이 마치 성경을 벗어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변증에 따르면, 비록 그러한 신학적 용어들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성경이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는 운을 띄우면서 이단자의 올무와 오류들을 정확히 논박하고 극복할 수 있다면 그러한 용어들의 사용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한 치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이단들의 신학적 광란은 그냥 침묵으로 지나갈 수 없는 불가피성 때문에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 때에라도 마음의 깊은 구석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세 위격들을 말하면 마치 본질의 동등성 내부에 어떤 다양성(ulla diversitas)이 있는 것처럼 여길까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까지 걱정한 탓입니다. 이러한 경외심을 가지고 오직 성경의 계시된 말씀에 기초하되 말씀 밖으로 이탈하지 않는 적정과 절도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저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의 관점에 따라 크게 세 가지의 종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즉 1) 하나님 자신에 따른 것 혹은 실체에 따른 것(ad se ipsa, secundum essentiam), 2) 위격적 관계에 따른 것(secundum relativum, ad invicem atque ad alterutrum), 3) 우연에 따른 것 혹은 피조물에 대한 것(secundum accidens, secundum ad creaturam)입니다. 첫째, 하나님 자신 혹은 실체를 따르는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및 본질을 가리키는 말로서 세 위격들의 일체성(unum)과 통일성(unitas)과 동시성(simul)과 동등성(aequalitas)에 관한 말씀이며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존귀하다’ ‘하나님은 거룩하다’ 등이 여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무한성과 불변성과 영원성을 비롯한 다른 모든 본질적인 신적 속성들이 하나님의 본질 혹은 실체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질을 따르는 표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할 수 없는 동등성 안에서 단일한 본질의 신적인 통일성(unius substantiae inseparabili aequalitate divinam unitatem)을 가지고 계시기에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어거스틴 이해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 그것은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자체가 한 하나님이 되신다(nec in uno Deo sit illa Trinitas, sed unus Deus)’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위격적 관계에 따른 말씀은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아니며, 성자는 성부와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말로서 어떤 한 위격에는 해당되나 다른 위격과는 공유할 수 없는 고유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무엇보다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고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전 신성의 근원(totius deitatis principium)이라 하면서도 성령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런 태도를 취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성부에게 발출하신(de patre procedit)’ 것 때문에 성부를 성령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과 만약 성부가 성령의 근원이라 한다면 왜 성령을 성부의 아들이라 부를 수 없느냐는 문제에 있습니다. 이에 어거스틴은 요한복음 15장 26절에 근거하여 답하기를 ‘성령이 나오시는 것은 났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지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아들이라 부르지는 않는다(Exit enim, non quomodo natus, sed quomodo datus et ideo non dicitur Filius)’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모두가 근원이되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이 되시기에 두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으로 여겨야 합당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아리우스(Arius, 250-336) 오류를 의식한 탓인지 그는 성자의 발생(generatio)과 성령의 발출(procedens)이 시간성 없이(sine tempore) 이루어진 일이며 그러기에 발생과 발출에는 시간의 선후(prius et posterius)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발생과 발출의 능동성 및 수동성 문제에 대해서도 논하는데, 성자의 발생에서 능동성은 인정되지 않고 오직 수동성만 인정되며 성령의 발출에 있어서는 능동성과 수동성 모두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런 위격적 관계에 따라 우리는 성경에서 언급되는 ‘낳으셨다’는 말을 성부에게 돌리며, ‘나셨다’는 말은 성자에게 돌리고, ‘나온다’는 말은 성령에게 돌립니다. 또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은 삼위일체 전체가 아니라 오직 성부에게 돌리며, 성육신과 수난은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에게 돌리지 않고 오직 성자에게 돌리며, 예수님의 세례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임하신 것과 오순절에 불의 혀 같이 각 사람에게 임한 것도 삼위일체 전체가 아니라 오직 성령에게 돌리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자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본체를 따른 것과 종의 형체에 따른 것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전반적인 흐름(universam seriem scripturarum)을 면밀히 검토하지 못한 자들이 범하는 오류로서 종의 형체를 따라 예수님에 대해 언급된 말씀들을 마치 성육신 이전에도 영원했고 지금도 영원하신 그의 신적인 본성에 적용하는 잘못을 지적하며, 어거스틴은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같은 말씀은 종의 형체를 따라 하신 표현이며 신적인 본질을 따라서는 결코 성자가 성부보다 못하거나 작거나 부족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종의 형체를 따라서는 성부의 동일한 독생자며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인간 그리스도 예수’시나 하나님의 형체를 따라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표현과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니라’는 말씀이 동시에 등장해도 진리에 아무런 충돌이나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셋째, 피조물 혹은 우연에 따른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할 수 없이 존재하신 대로 분리할 수 없이 역사하는 분’이라는 범교회적 신앙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장소나 상태나 시간과 관련된 모든 언급은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이나 위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꿈으로(translate) 혹은 유비를 통한(per similitudines) 말씀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역사는 세 위격들에 공통적인 것(opera ad extra sunt communia tribus personis s. trinitatis)입니다. 창세전 영원한 의논과 작정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며, 선택과 유기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며, 창조와 보존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인데, 이처럼 창조전의 신적인 의논을 비롯하여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삼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 단어의 음절을 채우면서 분리되어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시공간적 간격이 있지만 삼위일체 자체에 있어서는(in se ipsa)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 위격에(ad personas singulas) 고유한 것으로 돌리는 성부의 음성, 성자의 육신, 성령의 비둘기 같은 위격적 표상들에 대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성자를 육신의 몸으로 보내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은 발생이나 발출과 같은 무시간적 사건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서 피조물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보내심(missio)에 해당되는 외적 사역이기 때문에 위격적 성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통적인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어거스틴 이해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모든 문자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며 이단들의 모든 비성경적 사색과 오류를 막으면서 동시에 성경의 모든 부분들을 모순이나 충돌 없이 읽으려는 그의 경건과 성경 해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산출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에서(ex rationibus suis) 끌어내되 성경의 그럴듯한 증거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수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단들의 태도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거스틴 자신이나 그의 글에 빠지거나 매이지도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바르게 해석한 교부들의 범교회적 가르침 따를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하는 문맥에서 어거스틴은 진리를 탐구하고 성경을 연구할 때에 오류를 범하는 자들 중에서 대단히 용납하기 어려운 두 가지 문제를 말하는데 첫째는 진리가 알려지기 이전에 전제를 가지는 것이며 둘째는 진리가 알려진 이후에도 그 잘못된 전제를 여전히 옹호하는 것(Praesumptio priusquam veritas pateat, et cum iam patuerit praesumptae defensio falsitatis)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들을 해석할 때에 ‘이야기의 내용(continentia lectionis)이 어떤 가능한 증거들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세 위격들 중의 어느 한 위격이 족장이나 선지자들 중에 나타나신 것처럼 성급하게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자와 성령만이 아니라 성부도(sed etiam Patrem) 육체적인 종류나 유비를 통하여 인간의 제한적인 지각에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모두 육체적인 형태나 환상들에 의해 나타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어느 한 위격에만 고유하게 돌리지 말고 삼위일체 자체가 사려되는 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이해하되 다만 본문의 문맥을 따라 특정한 위격에게 돌려지는 의미가 있을 경우에는 그것도 지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는 계시의 속성을 따라 우리는 성경 전체를 삼위일체 중의 한 위격이신 성자만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하여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고 성경의 저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또한 동시에 성경 전체의 의미이며 목적이 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를 알아야 할 것이고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처럼 그것이 우리에겐 영생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성경은 전체가 구원에 관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은 이렇게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기며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알지 않기로 자랑치 않기로 작정한 바울의 의도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삼위일체 중의 한 위격이신 성자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알고 자랑키로 한 작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물과 역사와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그것을 깨닫도록 조명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며, 만물과 역사 전체가 다 동원되어 깨닫게 된 신학의 모든 내용도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며,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루시는 은혜를 따라 우리가 추구하고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상급과 목적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을 선포하는 증인의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신학이 그에게로 와서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라’는 문맥에서 그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성경에서 신학을 시작하고 성경과 더불어 신학을 전개하고 성경으로 말미암아 신학을 형성하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그러나 지극히 본질적인 문맥을 떠나서는 아무리 멀리 앞서간 발걸음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방향을 따라 전인격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거룩하고 흠없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리를 논하기 이전에 신학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성과 대상성과 목적성을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신학의 원리로서 견고히 붙드는 신학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늘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신학의 원리 2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


신학은 스스로의 자체적인 원인(self-caused)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학의 근원 혹은 원리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16세기 및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체계적인 교리적 진술에 돌입하기 이전에 신학적 교리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신학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그 신학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필연적인 원리 혹은 보다 더 근원적일 수 없는 최종적인 근원으로 신학의 존재론적 원리(principium theologiae essendi)와 인식론적 원리(principium theologiae cognoscendi)에 대한 논의를 제공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산출하고 그것의 정통성을 검증하는 궁극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신학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리(principium)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작 혹은 원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프린키피움(principium)’이 헬라어 ‘아르케(ἀρχή)’와 대응된 것은 이전 시대 교부들의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한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 340-410)가 오리겐의 『원리에 관하여(Περὶ ἀρχῶν)』를 De principiis로 번역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of Cilicia)와 히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 견해에 따르면, ‘아르케’에 사물의 본질(φυσίς), 비결정 혹은 무한(ἄπειρον)이란 개념을 부여한 최초의 인물은 아낙시만더(Anaximander, BC 610-546)입니다. 그는 문헌상 아르케(ἀρχή)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탈레스(Tales, BC 624-546)의 제자이며 물이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라고 주장한 스승과는 달리 ‘아페이론(ἄπειρον)’ 개념을 도입하여 만물의 시초는 물과 같은 어떤 요소가 아니며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산출되는 어떤 결정되지 않고 제한되지 않은 최초의 ‘무엇’이라 했습니다. 아낙시만더의 아르케(ἀρχή) 정의에 ‘원인’이란 개념을 추가하고 모든 원인들을 원리들(πάντα τὰ αἴτια ἀρχαί)로 규정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며, 그는 만물의 원리(ἀρχὴ πάνπων)란 어떤 사물이 거기에서 산출되는 근원(τὸ ἐξ οὗ γίγνεται)이라 규정하고, 모든 원리들의 공통적인 것은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 혹은 산출되는, 혹은 알려지는(ὅθεν ἢ ἒστιν ἢ γίγνεται ἢ γιγνώσκεται)’ 최초의 지점이라 했습니다.

2세기의 교부들 중에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는 만물의 첫번째 원리로서 어떤 요소보다 탁월하고 고상한 것을 추구하되 무한한 것(ἀπειρία)들을 열거하는 철학자로 아낙시만더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와 아르켈라우스(Archelaus)를 거명하며 그들은 마음(τὸν νοῦν)을 그 무한한 것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한편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3-165)는 아낙시만더의 ‘아페이론’ 개념을 수용하며 ‘무한성은 모든 만물의 첫번째 원리이며 거기에서 모든 만물이 산출되고 소멸되어 다시 돌아가는 곳(τὸ ἄπειρον ἀρχὴν ἁπάντων ἔφησεν εἶναι· ἐκ τούτου γὰρ δὴ τὰ πάντα γίνεσθαι καὶ εἰς τοῦτο τὰ πάντα φθείεσθαι)’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적 개념을 존중하긴 했으나 저스틴은 만물의 원리 혹은 시작을 물이나 공기나 흙이나 불로 이해한 철학적 관점이나, 만물의 두 가지 근원으로 신과 물질(θεὸν καὶ ὕλην)을 만물의 두 가지 주요한 근원으로 주장한 아리스토테레스 관점이나, 신과 물질과 형상(θεὸν καὶ ὕλην καὶ εἶδος)을 만물의 근원으로 본 플라톤의 견해를 거절하고 성경의 진술에 의존하여 ‘최고의 유일한 원리는 하나님 뿐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클레멘트는 시작이 없으시며 산출되지 않으신 하나님(τὸν ἄναρχον θεόν...ἀγένητος)을 일컬어 위대한 원리(ἄρχοντα)요 모든 만물의 조성자(τὸν πάντων τοιητὴν)며 모든 원리들의 창조자(τῶν ἀρχῶν αὐτῶν δημιουργὸν)며 자연적인 논제와 추론 및 판단의 원리(ἀρχὴ τοῦ φυσικοῦ τόπου...τοῦ λογικοῦ καὶ κριτικοῦ)라고 했습니다.

‘원리’라는 개념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해서 사용된 경우는 어거스틴 안에서 처음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을 ‘전 신성의 원리(totius deitatis principium)’라고 했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만물의 ‘단일한 원리(unum principium)’라고 말합니다. 이와 동일하게 존 후스(John Hus, 1369-1415)는 롬바르드 『문장집(Sententiae)』을 주석하는 곳에서 창조되지 않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increata Trinitas ipsa)이 모든 만들어진 것들의 원리(principium omnium rerum productarum)라고 했습니다. 뉘앙스가 약간 다르지만 칼빈도 말하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과 삼위성은 경외해야 할 진리로서 참된 신학의 원리이며 머리(theologiae verae principium & caput)라고 하였고, 나아가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규범(fide & religionis nostrae regula)으로 다른 모든 교리들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premierement, principio) 사려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가 철학자에 의해 먼저 언급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특별히 루베르투스(Sibrandus Lubbertus)는 원리(principium)를 모든 기독교 가르침의 원인(causa)으로 규정하고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 교리가 존재하게 되고(sunt) 알려지게 된다(cognoscuntur)고 말합니다. 당연히 하나의 교리가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는 바로 이 원리에 의해서 규명되는 것입니다. 케커만(Bartholomaeus Keckermann)은 신학의 체계(systema)를 원리와 부분들로 구분하고 원리는 다시 사물(res)과 앎(notitia)으로 나눈 이후에 하나님 자신만이 지고한 첫번째 원리(principium primum & summum)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원인(causa)과 원리(principium)의 긴밀한 관계성에 대하여 네델란드 개혁주의 신학자 바빙크(Herman Bavinck)는 '모든 원인은 하나의 원리가 되지만 모든 원리가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alle causa is principium, maar niet alle principium is causa)'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원형적인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계시를 통하여 그것을 나누시는 것도 하나님 자신이며 그것을 인간에게 전하시는 것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신학의 인식론적 원리는 신학의 존재론적 원리가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신학의 도구적인 유효적 원인(causa efficiens instrumentalis der theologie)이라 했습니다.

이상에서 보건대, 신학의 원리는 존재와 인식의 원리로 구분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성경이 그러한 구분에 각각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보더라도 모든 피조물을 존재로 부르신 이후에도 창조자 하나님이 권능의 말씀으로 그 피조물을 계속 보존하고 계시듯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도 쓰신 이후에 인간 독자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말씀의 주어가 되셔서 성령의 조명으로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수단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성경 사이의 엄밀한 원리적 분리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만을 신학의 궁극적인 원리로 이해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시는 최상의 방식으로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기독교 진리의 모든 교리들은 성경의 우선성과 절대성과 규범성을 전제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러기에 신학의 원리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수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폴라누스, 샬피우스, 마코비우스, 트렐카티우스, 코케이우스, 픽테트, 튜레틴, 마스트리히트 등)과 그 시대에 확립된 신앙 고백서들(헬베틱, 갈리칸, 벨직, 웨스트민스터 등) 대부분이 하나님 자신을 논하기 이전에 성경을 신학의 원리로 규정하고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와 관련된 인식론적 관점에서 선호되는 순서이고,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당연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먼저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트렐카티우스가 하나님을 성경론 다음으로 다루면서 ‘거룩한 신학의 이차적인 원리(secundum sacrae theologiae principium)’라고 주장한 것은 진리의 인식론적 원리를 강조한 것이지 하나님 자신만이 존재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의해서 산출되는 분이 아닙니다. 계시보다 계시하신 분이 더 크시기 때문에 성경에 가두어질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산출하는 존재론적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시기 원하셔서 택하신 계시의 방식이며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 존재성에 비추어 본다면 성경은 우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성경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지극히 사소하고 미미하게 보이는 진리의 단 한 조각도 깨달을 수 없다는 차원에서 성경은 절대적인 인식론적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원리와 인식론적 원리를 구분하지 않고 성경만을 원리로 강조하면 하나님이 성경이란 우연적 계시에 종속되는 듯한 오해가 빚어질 수 있으며, 성경이 생략되고 하나님만 원리로 강조되면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알고 있는 모든 우상들의 거짓과 오류를 제어할 장치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만물과 신학의 존재론적 원리시고, 성경은 만물과 신학의 인식론적 원리라는 선명한 구분선이 그어질 수 있다는 발상도 최선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신학의 존재와 인식 모두에 관여하고 계시기 때문에 존재와 인식의 원리를 구분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나 그 이후의 정통주의 시대는 로마 카톨릭이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전통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실제로는 교황에게 무오성과 그에 따르는 성경의 절대적인 해석권을 부여하여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아래로 끌어 내리던 시대였기 때문에 성경이 신학의 절대적인 원리로서 거의 유일한 것처럼 강조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인문주의,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 자체는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고 그 텍스트를 푸는 주체로서 인간에게 해석의 열쇠가 넘어간 것처럼 간주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라는 물리적인 대상에 국한되지 않고 피조물 전체를 고려한 인식의 보다 정교한 원리를 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정교함을 기하면서 논하자면, 하나님의 진리를 인식하는 원리는 외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주도적인 조명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그 둘이 합류하는 성도의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 위하여 성경 텍스트에 접근한다 할지라도 진리의 영이시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성령께서 하늘의 거룩한 빛으로 밝히시고 인도하지 않으시면 그런 접근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정도의 일반적인 은총에만 머물고 말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고, 재능과 모략의 신이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신이신 성령의 은혜로운 조명이 없이도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읽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추론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다고 하는 순간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수정된 하나의 세포가 자라서 성인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한 사람의 일대기는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도 불가능한 신비로 충만하여 그렇게 긴 시간동안 참으로 탁월한 지성들이 인생의 비밀을 벗기려고 희귀한 천재성의 최대치를 발휘해 왔지만 여전히 인생은 신비의 베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경험하고 일평생 고민하고 숙고한 인생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두텁고 심오한 신비로 둘러싸여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1) 진리를 사랑하는 지혜와, 2) 밝히 이해하는 명철과, 3) 그 이해에 이르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관찰, 숙고, 분석, 비교, 대조, 유추, 논의, 통합이란 재능들과, 4)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과, 5) 지식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연합의 경험으로 아는 것과, 6)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소유하는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산출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의 주체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신비로운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 해석학에 깊이 관여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이러한 성령의 비가시적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무시하고 마치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조명 없이도 성경이 풀어지고 이해되는 독자 의존적인 해석학을 주장하는 것은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방위적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의 공로를 가까운 가시적 원인으로 인간에게 돌리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몰지각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신학의 존재론적 원리라고 할 때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theologia nostra)은 하나님의 자기지식 '신학'과는 달리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자체가 원리나 목적이 되는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 근원와 원인과 목적을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신학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라는 기준을 따라 사려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부로 구분되나 피조물에 대하여는 언제나 특정한 위격만이 사려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들과 존재방식 모두가 포괄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의 원리로 간주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신학적 교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원리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실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모든 교리적 진리를 존재하게 만드신 저자시며 그 모든 교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신학이 주석과 교리와 변증과 실천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 원리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적인 고려와 위격적인 고려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성경으로 계시하신 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며 의논, 작정, 예정, 창조, 섭리, 구원 등등의 일들도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도 성경의 의미를 성육신한 성자라는 한 위격에만 국한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파괴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나 그리스도 예수는 비록 능동적인 의지를 따라서도 오셨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의논을 따라 작정되신 대로 오셨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요7:16)’으로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씀하신 것이며,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들도 아버지가 명하시고 보여주신 대로 행하신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을 본 자들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친히 말씀하고 계시다는 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만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de kern van het christelijk geloof)이며 모든 교리들의 뿌리(de wortel aller dogmata)이기 때문에 기독교 전체, 즉 특별계시 전체(het gansche Christendom, de geheele bijzondere openbaring)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존립(staat en valt)이 좌우되고 있다는 바빙크의 생각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연적인 것이며 도구적인 것이라는 말 때문에 ‘오직성경(sola scriptura)’ 개념에 도전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빚어질 수 있어 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기 원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 특별히 폴라누스 경우에 성경을 인식의 원리로 여겼던 이유는 그 성경이 우리 신학의 가깝고 즉각적인 유효적 원인이요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이 증거되고 있으며, 모든 신학적 교리들이 녹아 수렴되는 첫째가는 하나의 필연적인 전체적 원리로서 ‘하나님이 가라사대(Deus Dixit)’ 원리가 모든 선지자들 및 사도들이 우리로 하여금 돌아가길 원하는 궁극적인 지점임을 모든 성경을 통하여 증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Deus dixit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마코비우스(Johannes Maccovius)와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는 우리 신학의 외적인 인식론적 원리로 여겨지는 성경을 내적인 원리(principium internum)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하는 하나님(Deus dixit)이 인간의 능력과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계시하지 않으시면 그분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계시한 성경은 우리의 본성과 머리에 적응하여 주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학의 원리지만 우연적인 것이며 Deus dixit에 이르게 하는 도구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Deus dixit 개념의 폴라누스 선행자로 버미글리 및 부써는 신학이 Deus dixit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원리라고 했습니다.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도 Deus dixit을 신학에 있어서 최상의 논증(summa demonstratio)이라 했습니다. 바빙크도 Deus dixit은 모든 신학적 교리들을 산출하는 원리이며 모든 신학적 논쟁의 종결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Deus dixit)’는 것보다 더 높고 확실한 권세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신학의 원리이며 이로써 종교 개혁자들 및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인간의 이성이나 다른 어떤 학문적 성과가 아무리 탁월하고 높은 보편성과 천재성을 담보하고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권위를 그것에 양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교회의 제도적인 대표성을 가진 인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두렵고 떨어야 하며 그 말씀의 권위를 수종드는 자로서의 신분을 떠나거나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할 로마의 관원들과 당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여겨지는 대제사장, 서기관들 및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이는 Deus dixit의 의미와 중요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며, 땅의 어떠한 권위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고 궁극적인 권위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삶의 모든 원리과 규범은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온 말씀 안에서만 찾아져야 된다는 것과 인간의 모든 지식과 판단과 합의와 결론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의해서 검증되고 수정되고 판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기독교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사람의 증거를 취하지 않으시고(요5:34) 두 세 증인을 요구하는 모세의 법을 존중하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한다(요8:18).’ 신학의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졌으며 다른 어떤 외적인 상위 권위도 없다는 것을 뜻이며,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선포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이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예수님 자신을 포함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 신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발성과 명령을 따라 자기를 이 땅으로 보내신 그 ‘아버지’를 증인으로 세운 것은 단순히 복음의 진리가 인간 예수 개인에 의해 스스로를 위하여 증거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선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 자신이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증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신학의 원리는 존재의 원리(principium essendi theologiae)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식의 내적인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interna theologiae)로서 성령의 내적인 조명과 인식의 외적인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externa theologiae)로서 성경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스스로를 계시하신 그 성경 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믿음(principium cognoscendi instrumentalis theologiae)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구분된 신학의 원리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원리를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Deus Dixit! 이것은 하나님과 성경과 믿음과 성령의 조명이 다 포괄되어 있는 것으로서 신학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과 삶 전체에 대해서도 온 세상에서 최고의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원리인 것입니다.

신학의 원리 1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성의 중요한 인식론적 특징으로 의지에 방향이 있다는 지향성과 만족스런 명료함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 방향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판명성은 적정한 기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기준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즉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창조시 원래 의도된 인간성 전체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살아가되 하나님 경외를 지향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지극히 마땅한 것이며 인간의 인간다운 참모습을 회복하는 근원적인 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지향성과 판명성의 적정한 기준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를 통해 알려지는 것입니다. 알려진다 하더라도 알려진 대로 지향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없으며 알려진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혜도 인간에겐 없습니다.

폴라누스 구분법에 따르면, 우리에게 지향성과 판명성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상 유일하고 단순하나(substantia unicum et simplex) 하나님이 은혜의 언약을 세우시며 친히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사59:21)’이라고 구분하신 것처럼 계시에 있어서는 이중적인 형태(revelationis modo duplex), 즉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말씀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말씀하는 것이기에 성령의 내적 증거(testificatio spiritus sancti interna)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외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성령의 외적 증거(testificatio spiritus sancti externa)라고 부릅니다. 비록 내적인 말씀은 주된(principale) 것이며 외적인 말씀은 도구적인(instrumentale) 성격을 갖지만,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non separandum) 필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conjunctum necesse).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말하시는 하나님의 내적인 말씀과 동일한 성령께서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글에 담으시고 혹은 그들에게 예언으로 선포하신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은 실체와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단지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만 다를 뿐입니다(non differunt re & ratione, sed tantum modo). 게다가 성령의 증거가 없으면 외적인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없으며 외적인 말씀이 없다면 성령이 증거하는 말씀의 객관성은 확인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을 한 반짝도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해석의 주체가 되지 않고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내적인 말씀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전적인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이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이 만나는 지점이란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인식은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을 성령의 내적인 조명으로 깨닫되 마치 우리가 주체인 것처럼 우리의 전인격이 그 말씀과 교통하며 아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허물고 진리의 절대적 객관성을 훼손하는 모든 시대의 인식론을 극복하고 궁극적인 해답으로 주어진 기독교 인식론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히11:3)’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는 성경적 인식론을 우리에게 설명하되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객관적인 사실도 함께 진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우주의 신비를 가장 거시적인 안목으로 푸는 객관적인 사실과 그런 객관성에 대응되는 유일한 원리로서 성경적인 믿음의 인식론을 생각하고 사실과 믿음의 그러한 관계성을 설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보이는 어떠한 것의 근원과 원인을 나타난 것, 즉 눈의 관찰을 통해서는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만물의 근원을 찾고 우주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극거시 세계와 극미시 세계 관찰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최고의 최첨단 기술과 지성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기준으로 본다면, 그런 활동들은 보는 기능을 확대하고 여전히 보이는 대상에 머물러 있을 뿐 보이지 않는 근원을 찾는 것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무관하게 시도된 노력이라 할지라도 무작정 거부하고 버릴 수만은 없는 유의미한 교훈이 없지는 않습니다. 비록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실패가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은 보이는 현상이 보이지 않는 것에 원인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의 과학은 생명의 신비라고 할 수 있는 세포분열 원인을 연구하되 보이지도 않고 인과율 방식으로 추적할 수도 없는 외부의 어떤 정보로 말미암아 분열의 첫 조짐이 촉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극거시 세계 연구도 우주의 모든 질서와 움직임의 원인을 어떤 힘(impetus)으로 돌리고 있지만 이는 인과율이 통하지 않는 단절적인 사실과 대면했을 때에 ‘모른다’는 자존심 구겨지는 인간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변명의 궁색한 방편일 뿐입니다. 현대의 물리학은 개념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힘’이라는 대상을 설정하고 이 세상의 모든 힘들, 즉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을 통합하여 풀어내는 ‘대통합 이론(grand unified theory)’ 찾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테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신에게(Ảγνώστῳ Θεῷ)’라 칭하며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위하는 미신과 본질적인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과율이 사라지면 인간의 지적 활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인과율의 단절과 비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보이는 것의 근원과 원인이 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고자 지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인과율과 무관한 활동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과가 벌어질 수 있을까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최첨단 과학은 이제 특이하고 경이로운 현상보다 우리에게 너무도 가깝고 익숙한 일상을 관찰과 연구의 대상으로 주목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상조차 인간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다는 불쾌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왔습니다. 신비롭고 특별한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나타난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어떤 근원과 결부되어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직면한 인간의 문명 혹은 과학은 거짓 종교와의 은밀한 결탁의 악수를 청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 해법이 보이지 않는 경우에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인간의 충만한 종교성은 신이나 종교 자체를 거부하는 무신론 혹은 무종교의 옷으로 가장될 때가 많습니다. 그 무신론은 신이 차지하던 자리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신적인 절대성에 버금가는 객관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필요성을 따라 지금 인류가 도달한 객관성의 최종적인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눈으로 보는 것’이며 할 수만 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동일한 것을 보는 것’에 있습니다. 당연히 실험과 반복이 강조될 수밖에 없으며, 실험과 방법이 수리화된 것이 통계인데 그것은 객관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고 동원된 수단이요 심리적 안정제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에서 이론이 나오고 현장에서 진리가 산출되고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는 사고가 진리의 절대적 객관성을 허무는 무신론 주장의 방편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선호되고 있습니다. 실험적 결과와 현장의 관찰과 경험되는 실존에만 의존하는 보는 눈의 기능이 극도로 과장된 오늘날의 문화는 보이는 것을 나타난 것에서만 찾으려는 인간의 본질적인 지향성과 판명성의 한계가 극명하게 구체화된 결과인 것입니다.

지금 스크린이 문명과 문화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현상은 과학의 발달을 입증하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는 ‘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나무(창3:6)’에 대한 호기심이 삶의 전 영역에 구체화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에서 사단이 인간에게 속임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바로 ‘인간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창3:5, 7, 22)’ 결과를 본다면 사단의 말이 속임수가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속임수는 삼척동자 상식만 가지고도 쉽게 식별될 수 있도록 그렇게 허술하지 않고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거짓이 아니며 더군다나 보기 때문에 거짓이 더욱 은폐되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아져 선악을 알게 된다’는 사단의 말이 왜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까? 동기와 목적이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밝아지는 것은 하나님과 질적으로 같아지는 것도 아니며 선악을 분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수준 만큼의 분별력을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눈의 밝아짐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과 비기려는 사단의 본성대로 본질상 의존적인 인간이 자존하는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을 스스로 취함으로 하나님과 비기려는 대립항의 오만한 자리로 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자체가 본질상 하나님 의존하고 있는데도 독립성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재앙이요 저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의 밝아짐은 인간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눈으로 보되 스스로의 기준과 관점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눈이 밝아진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등장했던 모든 인간적 인식론의 근원적인 형태이며, 그것의 성격을 규명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시대의 인식론도 해명될 수 없고 극복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타락 이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인간의 눈이 밝아진' 타락의 첫 증상을 고려해 본다면, 타락 이전에는 인간의 눈이 밝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의 밝아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식하는 일이 있었다면 밝아진 눈에 의존하지 않는 인식의 독특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눈을 밝히시는 신적인 조명에 의존하여 사물을 보았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신의 조명 의존적인 인간의 인식론은 신 의존적인 인간의 본성에도 부합한 것입니다. 만물의 처음과 원인과 본질과 목적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안목을 따라 사물을 보았다면 아마 그것보다 더 탁월하고 축복된 상태의 인식론은 인간에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전적으로 주체가 된 인식론을 취하라는 가장 탐스럽고 지혜롭게 할 것 같고 보암직도 한 미끼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신적인 관점에 의존하고 있는 지복한 인식론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적인 관점을 상실하고 인간이 자신의 관점을 취하며 하나님과 비기려는 사단의 속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단은 마치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하던 패턴과 동일하게 천하만국 영광을 아끼지 않고 미끼로 사용하는 대담함을 보인 것입니다. 또한 영혼의 창문인 눈만 빼앗으면 인간의 삶 전영역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어 결국 천하만국 및 그 영광은 하나도 축나지 않는 교묘한 전략을 구사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자신의 어두운 권세 아래 결박해 두려고 했던 사단의 이 교활한 수법은 한 시대에 제한된 것이 아니며 특정한 집단에게 적용되는 전략만도 아닙니다. 사단은 비록 변신술에 능하지만 그 본성과 핵심적인 전략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탈취한 사단이 광야에서 동일한 수법으로 예수님을 유혹할 때에 예수님의 저항 방식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한 답변은 사단이 우리에게 노리는 궁극적인 대상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취하려고 하는지를 정확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다 주더라도 이것 만큼은 빼앗아야 하겠다고 한 바로 그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빼앗는 방식은 우리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 구체적인 전략은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좋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모두 댓가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돌로 떡이 되게 하실 능력도 있었으며, 시장하실 때였기에 돌덩이로 떡을 만드는 정당한 명분도 있었으며, 그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다 않더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를 따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창조자의 정당한 권위도 갖고 계셨지만, 사단은 그토록 정당하고 당연하고 마땅한 것을 속임수의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임수의 빌미로 사용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도 사단이 우리를 속이는 방편으로 동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독립된 기준과 안목을 가지고 독립된 생각을 하고 독립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독립된’ 인간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자 하는 것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가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사55:8-9)’는 말씀을 본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전혀 다른 것을 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고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했다’는 신명기 29장 29절 말씀을 근거해서 본다면, 나타나지 않은 오묘한 일 혹은 나타나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일은 인간의 기준을 따라 육안으로 관찰되고 분석된 결론을 통해서는 벗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이사야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보았다(신29:2)’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주시지 않았다(신29:4)’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도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밝아진 눈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께서 친히 우리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를 믿음의 방식으로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보이는 온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는 수단이라 했습니다. 또한 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소멸될 것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는 효력이 없어질 것입니다. 자연을 인식할 때에 믿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이는 자연을 있게 만든 비가시적 원인인 하나님의 말씀과 바라는 것들의 비가시적 실상인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도무지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인과 목적이 생략된 사물 자체의 물질적인 인식은 허무주의, 상대주의, 해체주의, 개인주의, 다원주의 관점들의 ‘제멋대로’ 잔치일 뿐입니다. 세상은 이런 찬치의 충만으로 도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보지 않는 자들의 해괴한 성경분석 및 해석과 결론도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말씀을 읽어도 보이지 않는 모든 요소들은 모조리 생략되고 마땅히 지향해야 할 보이지도 않는 소망의 실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박국과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3, 롬1:17)’고 했습니다.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믿음은 진리 인식의 외적인 원리(principium externa cognoscendi)로서 성경과 진리 인식의 내적인 원리(principium interna cognoscendi)로서 성령의 조명을 이어주는 진리 인식의 원리이며, 동시에 그런 인식론을 따라 삶의 전 영역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붙들면서 살아가는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과 사는 것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란 인간의 존재와 보존의 본성적인 원리이며,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식과 삶의 원리로서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나의 눈과 그런 눈으로 얻어진 모든 것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안목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과 안목을 취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어떤 물건의 소유권이 이전되듯 내게 속한 어떤 물건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인간됨이 가장 높은 가치까지 높여지는 역동성과 포괄성을 가진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의 본성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까지 규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되 오직 성실한 공부와 관찰과 분석과 추론만을 통하여 도달한 결론으로 안다면, 그것은 단순한 정보이며 보이는 것을 언어와 지각의 형태로 번역했을 뿐입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전히 나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료만 성경책을 사용했을 뿐이지 내용은 여전히 나의 기준과 관점에서 걸려지고 인간화된 신학에 불과하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시는 있는 그대로의 계시에 왜곡과 첨삭을 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어떤 미세한 간격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나의 판명성을 충족시킨 어떤 지식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을 아는 그런 간격조차 없습니다. 믿음은 대단히 신비로운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험과도 다르고 학문과도 다른 독특한 인식의 원리인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이 신학의 주체요 대상이요 목적이 되시도록 하는 유일한 신학의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계적인 도식이나 명제적인 언어나 빛으로 번역된 정보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인식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앎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요구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똑똑함과 지혜와 경험과 증거로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적인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믿음을 주시고 그것을 계속해서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강조는 결코 반지성 운동으로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지성인의 대열에서 만족하고 계신 분들에게 불편할 수도 있겠으나, 믿음은 지성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있어서 화려한 학벌과 방대한 박학은 결코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거라도 있으면 좋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직도 진리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계시가 무엇이며, 또한 그런 계시가 이 세상에서 저절로는 결코 발생할 수 없는 기적 중에 기적이란 사실을 모르고 단순히 정보를 취득하는 정도로 여기는 '눈의 보이는 인식론'에 머물러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각 기관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적인 진리인식 원리로서 제가 생각하는 믿음은 진리의 차원까지 이르는 지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빠지면 하나님을 포함해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생략하는 무서운 무지의 광란에 빠지고 말 것이며, 진리 인식와는 무관한 정보 취득의 유희에 중독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문맥에서 성경의 개별적인 가르침을 다루기 이전에 신학의 전제요 원리로서 하나님과 성경과 믿음을 신학서론(prolegomena)에서 다루었던 것입니다.

신학과 인간본성 2


인간의 본성에 지향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타락의 결과로만 보는 것은 창조의 신비로운 본래적 의도를 고의로 거부하는 지적 나태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한다는 본성적인 전제로 인해 온전한 객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객관성의 원천적인 불가능이 그 자체로 죄나 타락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지향성에 근원적인 오류 혹은 한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넘어 인간이 그런 제한적 성향을 갖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까지 살피는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이 좋습니다. 타락 이후에 우리에게 발견되는 인간의 지향적 오류 및 한계는 그것이 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에 치중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잠시 접고 이 사안을 살핀다면 인간의 보다 본래적인 본성이 한층 명료해질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방향을 향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그 방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조의 독특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당연히 하나님 자신일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만물 자체에 내재된 방향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과 감성과 생각과 언어와 행위 등 인간의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은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후적인 형벌이 아니라 창조될 때부터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것으로 여김이 옳아 보입니다. 문제는 지향성 자체보다 지향성이 발휘되는 궁극적인 대상과 실질적인 방향인 것입니다.

또한 지식의 명료함에 도달하여 만족을 취하기 전까지는 결코 무언가를 향하는 그 지향성이 중단하지 않는다는 판명성의 오류 및 한계도 죄와 결부된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 이전에 그런 제한성을 만드시고 의도하신 창조자의 뜻으로 소급하는 보다 진취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시광선 바깥의 파장은 볼 수 없으며 가청 주파수를 벗어난 범위는 듣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감지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은 비록 전자 현미경을 통해 10의 마이너스 9승(10-9) 세계까지 관찰할 수 있고 10의 마이너스 18승(10-18) 초, 즉 아토초(Attosecond)의 시간까지 감지할 수 있다지만 지각의 범위가 넓어진다 할지라도 만물의 근원까지 보는 판명성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제한적인 지각의 지평을 놀랍도록 넓혀 놓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과 진리를 앎에 있어서는 여전히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넓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정도의 진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할 때부터 설정해 놓으신 판명성의 한계를 따라 말씀하신 만큼 듣고 계시하신 만큼 보고 깨닫게 하신 만큼의 깨달음을 취하는 하나님 편에서의 창조적 의도에 입각한 판명성의 적정과 절도에 머무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창조적인 한계로서 지향성과 판명성을 창조자의 뜻에 맞도록 올바르게 조율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학은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지향성이 올바른 대성을 지향할 때에 인간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본질을 지혜인 동시에 지식이라 한다면, 그 출발점은 시인과 지혜자가 명시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시111:10, 잠1:7, 9:10)’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는 모든 지혜와 교훈과 지식을 포기하고 멸시하는 자라는 이면의 진리를 고려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가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신학교나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가 신학교의 교수직을 장악하고 교회의 강단을 점거할 때에 초래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방법과 제도를 리모델링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회의를 열고 운동을 벌인다고 수습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하고 근본적인 해법은 하나님께 돌이켜 그를 경외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 않아서 대충 안심하고 낙관적인 기대감을 가지시는 분도 계실 것이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죄악으로 창궐해 있습니다. 죄악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인류가 소모하는 에너지와 식량과 시간은 천문학적 규모로 절약될 것이며 그것을 복지로 돌린다면 세상은 천국을 방불하는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그 죄악을 근절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감시와 처벌의 수위를 높이며 전문화된 기관들을 만들어 감금하고 억업하고 처형하는 방식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 틈새에서 사적인 이윤을 챙기는 자들은 욕망의 지속적인 만족을 위해 수익과 관계된 죄악을 고의로 부추기게 되는 어두운 악순환이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은 또 다른 문제가 양성되는 음흉한 온상으로 변하는 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격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죄 문제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죄문제의 해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8:13)’고 말합니다. 호흡이 중단되는 일순간의 순교도 있지만, 어쩌면 순교자적 정신을 일평생 발휘해야 하는 대상은 죄악과의 싸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죄악은 그 자체로 온 인류에게 가장 무익하고 해로운 것이지만 동시에 주께서 인간의 죄악을 따라 그러한 것까지 이 땅에 허락하신 배후에는 그 만큼의 역설적인 순기능도 없지는 않습니다. 즉 죄악은 우리로 하여금 일평생 여호와 경외하는 것에 매달릴 수 있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일한 해법은 그것 뿐이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고 죄악이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의 죄악조차 수단으로 삼으셔서 선을 이루시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와 죄악을 미워하는 것이 동일시 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성도들로 하여금 죄악을 미워하고 이기도록 하는 그러한 신학 산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혜자의 진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잠14:27)’이요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19:23)’는 개념까지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신학은 성경적 지식의 근사한 진열과 과시를 통해 머리 뻣뻣한 희열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며 생명의 지속을 위해 계속해서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거룩한 진리의 수종적인 출구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잠14:26)’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시34:9)’고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신학이 애매하지 않고 견고한 확신에 찬 진리를 증거하되 인생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필요를 다 채워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규모와 깊이와 넓이와 체계를 가져야 하고 또한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신학에 뛰어들 수도 없으며, 신학을 시작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인간화된 신학을 산출할 것이며 그런 신학은 세상에 관영한 죄문제를 외면할 것이며 당연히 사망에 이르는 죄와 씨름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의 샘과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는 수종적인 기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호와 경외함과 무관하게 산출된 신학은 결코 견고한 확신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세상의 유력한 지식 조각들의 어정쩡한 짜집기로 오히려 혼돈과 모순만 일으켜 성도들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권위까지 의심하고 결국 현대의 편만한 상대주의 개인주의 및 다원주의 문화가 던지는 고상한 추파에 무장해제 당하는 위경까지 내몰고 갈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다윗이 ‘죽은 개’ 같은 시무이가 퍼부은 부당한 저주의 혼탁한 잡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을 헤아린 것처럼 상대주의 개인주의 및 다원주의 정신의 시대적 요청을 정죄하기 이전에 그런 시대상을 초래한 기독교의 낯뜨거운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이 우선적인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와 절대적인 주권과 가장 두려운 공의와 한없는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함에 있어서 그렇게 고귀한 것을 증거하는 일에 걸맞은 '역량'이 준비되지 못한 미성숙을 노출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쁘심을 따라 말씀의 권위와 교회의 독특한 지위를 행사하지 않고, 이권 취득의 시녀로 부려먹고 사리사욕 챙기는 수단으로 오용하고 원수들을 섬멸하는 신적인 명분으로 동원하는 등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앞장서서 훼손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권위라는 거들떠 보기도 싫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만 갑절로 촉발했던 사실을 통렬하게 회개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호등을 잘못 읽어서 무례한 원수들의 거북한 입술에 철퇴를 가하는 공격적인 변론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격분한 논쟁의 침만 튀기고 마땅히 보아야 할 교회의 현주소와 읽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인 부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문제의 실상을 주변에서 찾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주목하며 ‘여호와를 버림과 그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 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모든 무지와 오류를 수습하는 가장 긴급하고 근본적인 답입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지혜와 지식의 근본을 내던져서 혹은 최소한 망각해서 초래된 결과인데 그 못마땅한 결과 자체를 뜯어 고치는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고 한다면 문제의 근원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더 깊은 혼돈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또한 교회의 엄청난 인력과 재원과 시간은 허탄하고 주변적인 잡사에 매달려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본성적인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성을 상실하면 아무리 성실하고 정직해도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으로 신학의 시작과 핵심이며 사망의 전령이라 할 죄를 미워하고 극복하게 하여 결국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견고한 확신을 수혈하는 전제이며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우는 풍성한 보고이기 때문에 모든 영적 문제수습 일번지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또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판명성의 정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디까지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가리키는 다림줄과 같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자의적인 기준을 따라 편차가 생길 수도 있겠으나 최소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지식에 머물러 있는지를 물을 수 있겠고 그리하여 진리의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가 적정에 달하도록 조율할 가장 종합적인 준거는 분명하게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인간의 끝모를 지적 추구는 극미시 세계와 극거시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한지 오래 되었으며, 어떤 의미가 직접 산출되지 않는 극미시 차원의 세계를 조작하여 다소 먼 원인을 조정하고 결국 원하는 결과를 작위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능력까지 발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하고 고통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절대적인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영역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영역을 가능한 한 넓게 확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넓히고 장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물론 연약한 분들을 돌보고 도와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온 세상을 다 아시고 그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목적도 다 아시고 모든 일의 완급과 경중을 신적인 안목으로 조절하며 통치하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가 고려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에 펼쳐진 필요를 당장 해소하기 위해 밟지도 말아야 할 경계선을 양심의 고발까지 묵살하며 무모하게 출입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수습할 수도 없는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킬 여지가 있으며 우리 시대에는 그것을 풀지 못하고 결국 후대에 무거운 숙제로 물려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인간화된 자연을 자연 자체보다 더 확대해 나간다면 자연의 본래적인 질서와 기능에 심각한 변이가 발생할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다음 세대에게 끔찍한 재앙의 표정으로 고개를 들 수도 있습니다. 오존층의 파괴와 지구의 온난화는 자연의 전방위적 인간화가 초래할 거대한 재앙의 관대한 서곡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되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와 관련된 판명성의 요구에 적정과 절도의 경계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영역의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우리가 어떤 것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하는지를 분별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런 분별의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교통을 통해서 취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애매하고 개인마다 다른 기준이 설정될 것이 뻔한 이런 방식보다 모두가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서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인격적 교통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진위가 뚜렷하게 밝혀지는 언어의 명제적인 방식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원래 인격적인 것이며 언어적인 형태로 다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이 뚜렷한 수학적 혹은 언어적 명제로 진리가 가려질 수 있다면 이 땅에 하나도 동일하지 않으면서 저마다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가졌으되 그 무한한 다양성이 함께 어우러져 생산되는 조화로운 미는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판명성을 제공하는 기준이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과 교류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도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고 완전하게 분명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다 창조자 탓이라며 무조건 나쁘다고 성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성을 가지되 여전히 인간 편에서는 해석과 적용의 다양성이 있다는 사실에는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기초하여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인격적 교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은 그리스도 신학이나 천상적인 의인들의 신학과는 달리 거울을 비추어서 보듯이 희미한 가운데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학’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논하게 될 자기부인(self-denial) 개념과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제 요약하면, 인간 자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및 하나님의 명령 지키는 것과의 ‘본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인격적인 동시에 앎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향하는 경향성과 희미하고 애매한 것을 싫어하는 판명성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본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그 본성에 지향성과 판명성이 있다면 서로 분리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향성과 판명성은 하나님 경외하는 방향을 지향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경외라는 기준이 제시하는 경계선에 머물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따라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에 신학의 근본이며 죄문제의 해법이며 그래서 생명의 샘이며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견고한 확신을 주고 부족한 것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논지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에 해를 끼치는 신학을 산출할 것이고 이에 부수적인 폐해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뒤따를 것입니다. 모든 시대적 문제의 해결책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본래적인 인간성 자체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신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와 그의 명령 준행하는 것을 동등한 것으로 묶은 전도자의 결론(전12:13)을 본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 즉 하나님께 돌아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 경외하는 것은 광야의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워야 했던 가장 중요한 교훈(신8)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지향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타락의 결과로만 보는 것은 창조의 신비로운 본래적 의도를 고의로 거부하는 지적 나태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한다는 본성적인 전제로 인해 온전한 객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객관성의 원천적인 불가능이 그 자체로 죄나 타락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지향성에 근원적인 오류 혹은 한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넘어 인간이 그런 제한적 성향을 갖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까지 살피는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이 좋습니다. 타락 이후에 우리에게 발견되는 인간의 지향적 오류 및 한계는 그것이 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에 치중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잠시 접고 이 사안을 살핀다면 인간의 보다 본래적인 본성이 한층 명료해질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방향을 향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그 방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조의 독특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당연히 하나님 자신일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만물 자체에 내재된 방향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과 감성과 생각과 언어와 행위 등 인간의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은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후적인 형벌이 아니라 창조될 때부터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것으로 여김이 옳아 보입니다. 문제는 지향성 자체보다 지향성이 발휘되는 궁극적인 대상과 실질적인 방향인 것입니다.

또한 지식의 명료함에 도달하여 만족을 취하기 전까지는 결코 무언가를 향하는 그 지향성이 중단하지 않는다는 판명성의 오류 및 한계도 죄와 결부된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 이전에 그런 제한성을 만드시고 의도하신 창조자의 뜻으로 소급하는 보다 진취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시광선 바깥의 파장은 볼 수 없으며 가청 주파수를 벗어난 범위는 듣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감지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은 비록 전자 현미경을 통해 10의 마이너스 9승(10-9) 세계까지 관찰할 수 있고 10의 마이너스 18승(10-18) 초, 즉 아토초(Attosecond)의 시간까지 감지할 수 있다지만 지각의 범위가 넓어진다 할지라도 만물의 근원까지 보는 판명성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제한적인 지각의 지평을 놀랍도록 넓혀 놓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과 진리를 앎에 있어서는 여전히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넓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정도의 진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할 때부터 설정해 놓으신 판명성의 한계를 따라 말씀하신 만큼 듣고 계시하신 만큼 보고 깨닫게 하신 만큼의 깨달음을 취하는 하나님 편에서의 창조적 의도에 입각한 판명성의 적정과 절도에 머무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창조적인 한계로서 지향성과 판명성을 창조자의 뜻에 맞도록 올바르게 조율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학은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지향성이 올바른 대성을 지향할 때에 인간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본질을 지혜인 동시에 지식이라 한다면, 그 출발점은 시인과 지혜자가 명시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시111:10, 잠1:7, 9:10)’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는 모든 지혜와 교훈과 지식을 포기하고 멸시하는 자라는 이면의 진리를 고려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가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신학교나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가 신학교의 교수직을 장악하고 교회의 강단을 점거할 때에 초래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방법과 제도를 리모델링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회의를 열고 운동을 벌인다고 수습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하고 근본적인 해법은 하나님께 돌이켜 그를 경외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 않아서 대충 안심하고 낙관적인 기대감을 가지시는 분도 계실 것이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죄악으로 창궐해 있습니다. 죄악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인류가 소모하는 에너지와 식량과 시간은 천문학적 규모로 절약될 것이며 그것을 복지로 돌린다면 세상은 천국을 방불하는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그 죄악을 근절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감시와 처벌의 수위를 높이며 전문화된 기관들을 만들어 감금하고 억업하고 처형하는 방식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 틈새에서 사적인 이윤을 챙기는 자들은 욕망의 지속적인 만족을 위해 수익과 관계된 죄악을 고의로 부추기게 되는 어두운 악순환이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은 또 다른 문제가 양성되는 음흉한 온상으로 변하는 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격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죄 문제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죄문제의 해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8:13)’고 말합니다. 호흡이 중단되는 일순간의 순교도 있지만, 어쩌면 순교자적 정신을 일평생 발휘해야 하는 대상은 죄악과의 싸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죄악은 그 자체로 온 인류에게 가장 무익하고 해로운 것이지만 동시에 주께서 인간의 죄악을 따라 그러한 것까지 이 땅에 허락하신 배후에는 그 만큼의 역설적인 순기능도 없지는 않습니다. 즉 죄악은 우리로 하여금 일평생 여호와 경외하는 것에 매달릴 수 있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일한 해법은 그것 뿐이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고 죄악이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의 죄악조차 수단으로 삼으셔서 선을 이루시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와 죄악을 미워하는 것이 동일시 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성도들로 하여금 죄악을 미워하고 이기도록 하는 그러한 신학 산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혜자의 진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잠14:27)’이요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19:23)’는 개념까지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신학은 성경적 지식의 근사한 진열과 과시를 통해 머리 뻣뻣한 희열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며 생명의 지속을 위해 계속해서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거룩한 진리의 수종적인 출구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잠14:26)’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시34:9)’고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신학이 애매하지 않고 견고한 확신에 찬 진리를 증거하되 인생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필요를 다 채워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규모와 깊이와 넓이와 체계를 가져야 하고 또한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신학에 뛰어들 수도 없으며, 신학을 시작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인간화된 신학을 산출할 것이며 그런 신학은 세상에 관영한 죄문제를 외면할 것이며 당연히 사망에 이르는 죄와 씨름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의 샘과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는 수종적인 기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호와 경외함과 무관하게 산출된 신학은 결코 견고한 확신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세상의 유력한 지식 조각들의 어정쩡한 짜집기로 오히려 혼돈과 모순만 일으켜 성도들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권위까지 의심하고 결국 현대의 편만한 상대주의 개인주의 및 다원주의 문화가 던지는 고상한 추파에 무장해제 당하는 위경까지 내몰고 갈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다윗이 ‘죽은 개’ 같은 시무이가 퍼부은 부당한 저주의 혼탁한 잡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을 헤아린 것처럼 상대주의 개인주의 및 다원주의 정신의 시대적 요청을 정죄하기 이전에 그런 시대상을 초래한 기독교의 낯뜨거운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이 우선적인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와 절대적인 주권과 가장 두려운 공의와 한없는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함에 있어서 그렇게 고귀한 것을 증거하는 일에 걸맞은 '역량'이 준비되지 못한 미성숙을 노출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쁘심을 따라 말씀의 권위와 교회의 독특한 지위를 행사하지 않고, 이권 취득의 시녀로 부려먹고 사리사욕 챙기는 수단으로 오용하고 원수들을 섬멸하는 신적인 명분으로 동원하는 등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앞장서서 훼손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권위라는 거들떠 보기도 싫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만 갑절로 촉발했던 사실을 통렬하게 회개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호등을 잘못 읽어서 무례한 원수들의 거북한 입술에 철퇴를 가하는 공격적인 변론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격분한 논쟁의 침만 튀기고 마땅히 보아야 할 교회의 현주소와 읽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인 부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문제의 실상을 주변에서 찾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주목하며 ‘여호와를 버림과 그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 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모든 무지와 오류를 수습하는 가장 긴급하고 근본적인 답입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지혜와 지식의 근본을 내던져서 혹은 최소한 망각해서 초래된 결과인데 그 못마땅한 결과 자체를 뜯어 고치는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고 한다면 문제의 근원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더 깊은 혼돈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또한 교회의 엄청난 인력과 재원과 시간은 허탄하고 주변적인 잡사에 매달려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본성적인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성을 상실하면 아무리 성실하고 정직해도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으로 신학의 시작과 핵심이며 사망의 전령이라 할 죄를 미워하고 극복하게 하여 결국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견고한 확신을 수혈하는 전제이며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우는 풍성한 보고이기 때문에 모든 영적 문제수습 일번지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또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판명성의 정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디까지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가리키는 다림줄과 같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자의적인 기준을 따라 편차가 생길 수도 있겠으나 최소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지식에 머물러 있는지를 물을 수 있겠고 그리하여 진리의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가 적정에 달하도록 조율할 가장 종합적인 준거는 분명하게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인간의 끝모를 지적 추구는 극미시 세계와 극거시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한지 오래 되었으며, 어떤 의미가 직접 산출되지 않는 극미시 차원의 세계를 조작하여 다소 먼 원인을 조정하고 결국 원하는 결과를 작위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능력까지 발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하고 고통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절대적인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영역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영역을 가능한 한 넓게 확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넓히고 장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물론 연약한 분들을 돌보고 도와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온 세상을 다 아시고 그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목적도 다 아시고 모든 일의 완급과 경중을 신적인 안목으로 조절하며 통치하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가 고려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에 펼쳐진 필요를 당장 해소하기 위해 밟지도 말아야 할 경계선을 양심의 고발까지 묵살하며 무모하게 출입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수습할 수도 없는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킬 여지가 있으며 우리 시대에는 그것을 풀지 못하고 결국 후대에 무거운 숙제로 물려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인간화된 자연을 자연 자체보다 더 확대해 나간다면 자연의 본래적인 질서와 기능에 심각한 변이가 발생할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다음 세대에게 끔찍한 재앙의 표정으로 고개를 들 수도 있습니다. 오존층의 파괴와 지구의 온난화는 자연의 전방위적 인간화가 초래할 거대한 재앙의 관대한 서곡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되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와 관련된 판명성의 요구에 적정과 절도의 경계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영역의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우리가 어떤 것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하는지를 분별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런 분별의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교통을 통해서 취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애매하고 개인마다 다른 기준이 설정될 것이 뻔한 이런 방식보다 모두가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서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인격적 교통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진위가 뚜렷하게 밝혀지는 언어의 명제적인 방식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원래 인격적인 것이며 언어적인 형태로 다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이 뚜렷한 수학적 혹은 언어적 명제로 진리가 가려질 수 있다면 이 땅에 하나도 동일하지 않으면서 저마다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가졌으되 그 무한한 다양성이 함께 어우러져 생산되는 조화로운 미는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판명성을 제공하는 기준이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과 교류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도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고 완전하게 분명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다 창조자 탓이라며 무조건 나쁘다고 성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성을 가지되 여전히 인간 편에서는 해석과 적용의 다양성이 있다는 사실에는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기초하여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인격적 교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은 그리스도 신학이나 천상적인 의인들의 신학과는 달리 거울을 비추어서 보듯이 희미한 가운데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학’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논하게 될 자기부인(self-denial) 개념과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제 요약하면, 인간 자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및 하나님의 명령 지키는 것과의 ‘본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인격적인 동시에 앎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향하는 경향성과 희미하고 애매한 것을 싫어하는 판명성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본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그 본성에 지향성과 판명성이 있다면 서로 분리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향성과 판명성은 하나님 경외하는 방향을 지향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경외라는 기준이 제시하는 경계선에 머물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따라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에 신학의 근본이며 죄문제의 해법이며 그래서 생명의 샘이며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견고한 확신을 주고 부족한 것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논지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에 해를 끼치는 신학을 산출할 것이고 이에 부수적인 폐해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뒤따를 것입니다. 모든 시대적 문제의 해결책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본래적인 인간성 자체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신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와 그의 명령 준행하는 것을 동등한 것으로 묶은 전도자의 결론(전12:13)을 본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 즉 하나님께 돌아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 경외하는 것은 광야의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워야 했던 가장 중요한 교훈(신8)과도 동일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