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음성과 뜻이 담긴 책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거기에 사용되는 표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상하고 비범하고 신비로운 것이어서 범부들이 감히 접근할 수도 없고 접근한다 할지라도 판독할 수도 없고 판독했다 할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비문 이상으로 기이한 난문의 불가사의 언어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고어로 된 성경은 번역도 금하고 해석도 시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하며 범부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거룩히 구별된 금역에 보관하여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은 너무도 누추한 언어의 옷을 입었으며 평범한 가정이나 북적대는 시장에서 너무도 헤프게 쓰여지는 천박한 표현들이 난무하고 있어 이것은 도무지 하나님의 신적인 말씀일 수 없으며 인간의 생각과 붓이 지극히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고 지나간 자취일 뿐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극단은 비록 저마다의 ‘타당한’ 일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이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의 언어로 기술된 성경의 자비로운 ‘성육신적’ 적응성을 간파하지 못한 인간 편에서의 부패한 공명심과 교만에 중독된 단견일 뿐입니다.
철학적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언어의 애매함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버트란트 러셀은 일상적인 언어가 이런 필요성에 역행하는 모호함만 가중시킬 뿐이라며 타매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러셀의 견해에 맞장구를 치며 초기에 언어 분석에 몰입해 보았으나 후기에는 ‘매일 사용되는 언어를 바탕으로 철학을 성찰해야 한다’고 일갈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분석철학 방식을 철회하며 ‘일상적인 언어에는 잘못된 점이 없으며, 오히려 대다수의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가 언어와 관련된 주제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주제의 본질을 오해한 망상에 지나지 않다’고 했습니다. 1940년대에 옥스포드 대학교의 철학 교수들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 사상을 전수하고 발전시켜 일상언어 철학(ordinary language philosophy)을 만들었고 이는 일상적인 언어의 내재적 가치와 의미가 학계의 새로운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사조를 니체와 베르그송 같은 철학 거두들의 본질주의 비판과 연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일상적인 언어는 삶의 일상적인 전영역과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일상어도 단일한 배타적 어의를 가지지 않고 다소 '모호'하며 동시에 다양한 의미를 가졌으되 그 의미들이 일상의 특정한 맥락과 만나 하나의 종합적인 뜻을 발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특정한 의미와의 획일적인 동일시는 다른 다양한 의미들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의 추상화와 기호화는 일상적인 언어의 불확정성 및 다의성을 파괴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일상과의 괴리도 부득불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일상어는 개념 담지력과 내용 전달력과 의미 포괄성과 현실 밀착성과 언어 접근력에 있어서 여느 학술어의 기능보다 더 현저한 탁월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명확한 논리적 언명만이 과학의 시대에 유의미한 언어이고 의미가 애매하고 다의적인 일상의 언어들은 어떠한 학문적 상아탑도 세워질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학문과 기술과학 문명의 '본질'에 지극히 충실한 경향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최첨단 과학의 현장을 조금만 진지하게 들여다 본다면 가치의 지반이 흔들리는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급’ 두뇌들의 학문적 관심이 소홀했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던 지극히 일상적인 현상들이 지금은 최첨단 과학의 아랫목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높은 통찰력과 기술력을 발휘해도 인간은 단 하나의 일상사가 보여주는 경이와 신비와 정교함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수긍하고 있습니다. 이를 태면, 코의 기능만 보더라도 10억 개의 냄새를 분별하는 하나의 뉴런에 천여 개의 분자분별 수용체가 있어서 냄새를 종합하여 어떤 느낌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과, 백만개 이상의 정보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고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로 움직이는 눈의 자발적 커서가 가진 정밀성은 어떤 컴퓨터 커서로도 재연할 수 없다는 사실과, 빛의 출입이 없이도 시상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하되 그 안에 자아가 참여하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밖에서 그 자아를 보고 있는 자아가 구별되어 있는 꿈도 최첨단 과학으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신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물론 후각의 경우에는 바이오 전자코(bioelectric nose)가 개발되어 냄새를 식별하는 능력이 100펨토몰(10의 마이너스 15승 분의 100)의 수준까지 이르지만 2억개 이상의 뉴런으로 구성된 개의 후각보다 높은 정교함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과학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보여주는 궁극적인 놀라움은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놀라운 과학적 성취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에 있습니다. 당연히 그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성취한 과학기술 문명의 경이가 커질수록 하나의 세포에서 그렇게 놀라운 능력을 지닌 인간이 되도록 하시되 손도 대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대한 경이는 더더욱 커질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최첨단 과학이 우리에게 너무도 일상적인 것이어서 묻지도 않았던 그런 일상사에 최고의 기술을 집중하며 첨예한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신약의 언어가 세 개의 지방언어(Doric, Aeolic, Lonic) 중에 ‘아테네의 화련한 산문과 더불어 헬라의 대표적인 언어’로 성장한 Lonic 계통의 애틱어(Attic)가 아니라 헬라어가 로마제국 및 소아시아 세계로 확신되고 하나의 세계어로 성장함에 따라 애틱의 형태에서 불가피한 변형을 거쳐 다양한 인종 및 계층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 세계적인 규모의 의사소통 매체인 코이네(Koine) 헬라어로 기록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나라와 민족과 계층과 성별과 연령의 사람에게 소통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판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코이네가 최적이란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아름다운 음율로 이루어진 시도 있고 세세한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는 정교한 표현들도 있고 교훈적인 목적으로 동원된 우화들도 있으며 저자가 벗겨주지 않으면 의미의 윤곽도 파악할 수 없는 묵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전반적인 언어는 기호적인 언어도 아니고 철학적인 언어도 아니고 고도의 문학적인 언어도 아니고 논리적인 언어도 아니고 과학적인 언어도 아니고 수학적인 언어도 아닙니다. 성경은 일상적인 언어로 기록된 책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어에도 의미의 세계를 가장 많이 담아내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문적인 용어는 어떤 특정한 것만을 가리키고 특정한 의미만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 산출되는 의미는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되기 전까지는 아직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언어의 묘사가 너무 정밀하면 의미의 숲이 보이지 않고 너무 거시적인 것을 묘사하는 언어도 적당히 섬세한 의미의 개별적인 나무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와 비근하게 시각의 경우에도 우리가 극미시 세계와 극거시 세계에서 어떤 가치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극미시와 극거시 세계가 어떤 의미가 산출되는 차원의 세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상어는 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가장 폭넓게 담아내는 언어의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언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변하여도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결코 변하지 않는 일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숨쉬는 것과 움직이는 것과 보고 듣는 것과 먹고 배설하는 것과 주고 받는 것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과 시작하고 끝마치는 것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과 태어나고 죽는 것과 울고 웃는 것과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 등등의 표현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며 시대를 따라 종결되고 새롭게 생성되는 개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들은 인생의 의미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미가 변경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지도 시들지도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화려하고 세련된 애틱이나 고도로 발달된 학술어가 아니라 이러한 일상어로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이 지극히 일상적인 대중의 언어로 기록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런 언어의 질그릇에 담긴 진리의 보배를 경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짐승의 냄새가 진동하는 누추한 말구유 안에 담겼다고 해서 무시할 수 없고,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전으로 삼으셔서 거기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우습게 여길 수 없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상 사용하는 언어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토록 가깝게 다가오실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다는 감격과 더불어 질그릇에 담긴 진리의 높은 경지라는 의미의 세계를 침노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조금 정교하고 조금 세련되고 조금 화려하고 조금 합리적인 언어처럼 보이는 전문적인 학술어가 함부로 판단의 입술을 열어서는 안되는 의미의 비획일적 불특정성, 광범위한 포괄성, 풍요로운 다의성 뿐만 아니라 보존의 시간적 영구성도 가진 일상적인 용어로 기록된 책입니다. 흠모할 만한 언어적 외모를 가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는 가장 보배로운 것입니다. 성경의 이러한 적응적 기록은 그 자체로 복음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어 내용과 형식의 절묘한 조화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짧고 얕은 기준과 판단으로 성경을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고 경고하고 싶어 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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