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도로 발달된 매체들과 학문의 세분화로 인해 분야를 막론하고 방대한 정보가 신속하게 생산되고 유통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책과 문자는 이러한 정보의 시대에 가장 흔하고 일상적인 수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물론 애굽에서 주전 3000년 이전부터 시작된 먹물과 파피루스 ‘종이’를 가지고 그림 및 글자 방식으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인류의 획기적인 발명이며 고유한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게다가 스크린 문화에 밀려 차가운 냉대를 받고 있어서 문자문화 종말의 음울한 기운까지 감돌고 있습니다. 문자의 방식으로 기록된 책 형태의 성경이 이러한 문화적 현실에서 정보를 취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여겨지고 동영상 형태로 급속히 번역되어 성경책 펼치는 동기까지 유실되는 현상과 그런 현상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방조하며 오히려 그런 문화를 부추기고 앞다투어 취하려는 교회의 현실은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갖습니다.
이제 딱딱하고 건조한 문자의 형태로 기록된 성경책은 다른 문서들에 비해 재미와 유용성 면에서도 현저히 떨어지는 퇴물이며 그것에 교회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요 시대에 뒤떨어진 일로 여기지는 경향도 없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수단적 원리인 성경을 멀리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비록 오늘날의 고유한 현상만은 아니지만 지금 득세한 과학의 기계적인 특성과 물질주의 만연과 인간화된 자연 등에 대한 염증까지 가세하여 더욱 절박하고 강력해진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에 문자와 책의 형태로 담아낼 수 없는 신비와 기적에 과도한 호기심을 보이며 성경적 진리를 뒷전으로 돌리려는 교회의 심각한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면 오직 말씀의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뿐일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문자 덩어리가 아니며 정보를 전달하는 문헌 텍스트도 아닙니다. 성경은 비록 인간적인 문자와 책의 형태를 취하기는 했으나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기에 그 안에는 다른 텍스트와 완전히 구별되는 신적인 성격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님이 ‘내가 이르는 말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 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 자체가 영이요 생명인 것은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텍스트에 대해서도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성경은 성령과 분리될 수 없으며 생명과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혼의 양식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성령은 반드시 성경과 더불어 역사하기 때문에 성경이 배제된 성령의 역사는 없고 성경과 대립되는 성령의 역사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는 것은 죽음과도 관련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영이기 때문에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문학이나 인문과학 도서를 펼치듯이 성경을 일반 텍스트로 간주하고 기록자의 인간적인 의도를 간파하되 문법과 다양한 문맥에서 벗겨지는 정도의 인문학적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성경의 자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되 다수의 가까운 원인들을 수단으로 삼으셔서 우리에게 가까이 적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여 우리로 도달하기 원하시는 그 뜻의 신적인 차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에 성경을 펼칠 때마다 삶과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열매에 독이 있어서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 자체가 생명과 죽음을 가르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당연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는 생명과 죽음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의 엄중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당시의 호렙산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죄에서 건저내신 이후에 그들의 정체성을 법적으로 규정하는 시점에 이르러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땅이 진동하던 그때의 상황을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모세의 고백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노라(히12:21).’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현장에서 말씀의 수령자로 서 있었던 모세가 느꼈던 지극한 경외심은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이 텍스트 형태로 언어화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대하는 자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대제사장이 가장 중요한 날인 대속죄일 가장 중요한 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가 지극히 고귀하신 분인 하나님을 만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대제사장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사활을 건 일입니다. 이사야가 지적한 것처럼 스승의 눈이 어두우면 한 시대 전체가 어두운 혼돈 속에서 신음해야 하듯이 당시에 대제사장 입술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육중한 기운에 눌려 신음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생명과 죽음에 관한 일이며 그것을 들어야 할 백성들의 영적 흥망이 좌우되는 일입니다. 나아가 말씀을 버리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대외적인 책무도 져버리고 세상은 마침내 마지막 소망의 등불까지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득세하게 된 사실과 대제사장 및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 수령했던 호랩산과 지성소 안에서 느꼈던 지극히 큰 두려움과 떨림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성경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그 성경을 일개의 텍스트로 대우하고 정보전달 수단 정도로 간주하며 인문학적 분석에 성경 텍스트의 궁극적인 의미를 내맡기는 우리의 성경 대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간문맥 선에서 이루어진 태도를 극복하지 못하면 성경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영이며 생명이란 사실과 주장은 과학의 시대에 웃기고 자빠진 미신으로 치부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의 부재는 태도의 단순한 공백으로 끝나지 않고 그 빈자리를 다른 비성경적 태도가 채우고 고삐 풀린 권세를 휘두르게 된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과학의 현대적인 정밀성에 부응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물질문명 시대에 화려한 주도권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에 실망한 교회는 이제 과학과 물질에 대한 염증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신비로운 현상에 무분별한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주술적인 행위와 심령술적 주문과 기괴한 행동과 심리적인 황홀경에 기독교적 정조마저 내던지고 영적 음행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방식에 있어서는 이방 종교의 주술적인 행습을 대놓고 수용하면 대대적인 비판을 감수해야 하겠기에 성경적 표현들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선호되는 대표적인 수단은 아마도 예언일 것입니다.
예언은 개인이 듣는 경우도 있겠고 두 세 사람이 증인이 되는 집단적인 예언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 듣는 경우에는 그것의 진위를 분별하는 객관적인 검증 장치가 없습니다. 즉 예언을 받은 당사자의 확인할 길이 없는 정직성과 판단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예언은 그것이 자기의 생각인지, 사단의 생각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예언의 체험을 교회의 보편적인 질서와 방향을 설정하고 지탱하는 토대로 삼는 것은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 개인의 삶을 그런 체험의 방식으로 이끄시는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체험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권위를 갖거나 강요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체험 당사자로 하여금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만든다면 신적인 무게까지 실린 위협에 예언 당사자도 희생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마태복음 7장 후반부가 가장 엄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을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냐(21절)’고 묻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교회에서 가장 신실한 신앙의 표상으로 여겨질 분들인데, 주님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2절)’ 내치시며 ‘내 아버지의 뜻대로’를 강조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까지 밝히고 계십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들을 행하되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불법일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무리 성경적 표현들과 주의 이름을 앞세운다 할지라도 그런 '신앙적인 행위'가 사망의 악취를 풍기는 회칠한 무덤일 수 있다는 경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집단이 신적인 체험을 공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변화산에 올라가서 겪은 체험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때 세 명의 제자들은 영광의 형체로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아마도 신구약 전체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런 형체를 목격하고 하늘에서 성부의 음성이 들려온 것보다 더 놀랍고 큰 기적과 기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최고의 유일무이 체험을 한 베드로는 이러한 집단적인 체험을 언급한 이후에 아주 예리한 지적을 했습니다. 베드로 후서 1장 19절을 보시면,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이는 그토록 신비로운 체험보다 더 확실하고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는 예언이 있는데 성경의 모든 예언이 바로 그것임을 베드로는 가장 놀라운 체험과의 비교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의 뜻을 보여줌에 있어서 성경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하고 객관적인 예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언의 종결과 완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finem et complementum in Christo) 때문에 계시적 예언의 필요성도 지속성도 없다는 칼빈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6장 27-31절을 보시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쉽다’는 말씀 이후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십시오. 잘 아시는 것처럼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깁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며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이에 아브라함은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것이라’며 차가운 어조로 답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답변은 여전히 강직하게 ‘모세와 선지자를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선을 긋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다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예언이기 때문에, 기록된 모든 성경은 한 획도 떨어지지 않을 것인데 이는 천지가 없어져도 결코 변경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일점 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언이며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기록의 형태를 취하였기 때문에 보다 확실하고 절대적인 예언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꽃은 시들고 잎은 마르지만, 또한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있는 변동될 모든 것들도 체질이 녹아 없어지는 때가 올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이라는 그런 성경의 속성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신앙은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말씀 이외의 요소에 의존한 신앙은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그 다른 요소와 성경에 갭이 발생되는 경우에는 점점 성경을 멀리하게 되고 급기야 성경을 버리는 우매함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수렴되고 만나고 아무도 배제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공공의 장입니다. 거기서 얻은 유익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유익이 될 수 있으며 거기서 발견한 깨달음은 모두가 배울 수 있습니다. 거기서 받은 삶의 변화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도전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자입니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말씀의 왕성한 섭취는 교회의 모든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말씀이 거절된 사람들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그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영적 영향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고 주님과 연합하는 성경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적 우월성을 느끼고 기회만 되면 입증하고 싶은 유혹도 적어서 온유함과 겸손에 이르는 일에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면 앞뒤 문맥과 단절되어 독립적인 구절처럼 느껴지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등이 나오는데 이것은 앞뒤 문맥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대단히 깊은 저자의 의도가 숨겨진 말입니다. 즉 1장부터 시작된 내용으로 하나님이 예전에는 선지자를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이 모든 날 마지막이 되어서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면서 이처럼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전하는 내용은 구약과 신학이 다르지 않다는 내용을 진술하는 와중에 단절적인 인상을 주는 듯하지만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구절이 등장한 것입니다. 즉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과 신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란 타이틀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제안을 따른다면, 신구약의 합당한 이름은 '거룩한 책(biblia sacra 혹은 sacra scriptura)'이 아니라 성경의 본질을 가장 잘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Verba Dei)'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문자나 언어로 된 텍스트가 아니라 영입니다. 아담이 보여준 것처럼 생명과 사망이 맞물려 있으며 인류의 흥망이 그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에게 모세가 보여준 것처럼 심히 두렵고 떨리는 태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부재는 미신적인 신앙의 창궐을 초래할 것입니다. 오늘날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신비주의 운동의 날개는 교회가 달아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의 기본으로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말씀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열매를 향기와 빛으로 결실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음을 교회가 입증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해진 때입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미신적인 광기는 참으로 악한 것이지만 그것을 격파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대응이 아닙니다. 침묵할 수는 없겠으나 그러한 악을 허용하사 교회로 하여금 부끄러운 죄와 나태함을 시급히 털어내고 성경의 본질로 돌이키게 하는 선한 수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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