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신학의 원리 3: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 2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의 원리로 삼다는 것이 16세기 및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안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게다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하나님의 존재방식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신학의 체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교리들 중의 하나로 다루어 온 관행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의 원리로 다루면 마치 어떤 중심적인 교리에서 신학의 전 체계가 인간의 논리적인 연역을 따라 산출되고 결국 성경과는 동떨어진 듯한 인상을 주어 낯선 거부감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에, 구약의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다른 하나님도 없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까지 부인하는 유대적인 단일신론 입장이나 오직 하나님은 한 분 뿐이라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신이 있다는 이방적인 다신론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의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그 속성을 논하고 그의 행하신 일을 논하기 이전에 하나님 자신을 먼저 상고하는 것이 너무도 마땅하며 여기서 ‘하나님 자신’이라 함은 특정한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학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근원적인 결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의미는 주어가 누구냐에 달려 있기에 주어가 바뀌면 성경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의 종결자로 저는 어거스틴 이름을 거명하고 곧장 그의 삼위일체 이해로 뛰어들고 싶지만 그도 역시 교회의 출중한 선생들이 남긴 삼위일체 가르침을 물려 받고 연구하고 집대성한 인물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순차를 따라 그 이전에 이루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먼저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시온(Marcion, 85-160)이 로마에서 이단적인 활동을 개시하기 이전에 바나바(Barnabas, 70-128)는 유대교에 강한 적대감을 보이면서 모세가 받은 두 돌판을 주 예수의 언약(διαθήκην κυρίου Ἰησοῦ)으로 규정했고,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은 신약과 구약의 저자가 항상 동일하신 분(τὸν αὐτὸν ὄντα ἀεὶ)이시며 그 동일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고 궁극적인 법(αἰώνιός νόμος καὶ τελευταῖος)이며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탁월한 언약(διαθήκη κυριωτάτη πασῶν)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 그리스도 예수는 성자시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모세에게 사람과 천사와 영광으로 나타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스틴은 아브라함 부르신 동일하신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부르심을 따라(διὰ τῆς ὁμοίας κλήσεως) 우리를 불렀으며 아브라함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통하여(διὰ τὴν ὁμοίαν πίστιν)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폴리캅(Polycarp, 69-155)의 제자로 알려진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 입장도 구약과 신약은 하나요 동일한 본질을 가졌으며(unius et ejusdem substantiae) 하나요 동일한 하나님이 주신 것(ab uno et eodem Deo)이기 때문에 하나요 동일한 것(unum et eundem)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모두 한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완전한 믿음(πίστις ὁλόκληρος)을 가졌으며 하나님의 영 안에서의 확신(πεισμονὴ βεβαία)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실에서 이레니우스는 온 세상과 모든 시대에 하나의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출해 냈습니다. 나아가 고린도전서 12장 4-7절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이 수행하는 고유한 사역으로 이해하되, 성부는 모든 것들과 모든 시대 속에서 다양한 은사를 베푸시는 동일하신 성령과 다양한 직분을 수행하는 동일하신 성자를 통하여 계시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1-2세기 교부들의 생각은 주로 신구약 및 그 저자의 통일성과 상당히 결부되어 있으며 구원에 있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터툴리안(Tertullian, 155-220) 경우에는 한발짝 더 나아가 신구약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용어들과 개념들을 확립해 나갑니다. 말시온은 이러한 작업에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며 그는 복음과 율법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하나님과 율법의 하나님을 대립적인 존재로 설정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 모두에 대단히 치명적인 왜곡과 위협을 가하였던 자입니다. 말시온을 반박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터툴리안 이해는 신구약 모두에서 성자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이 비록 계시의 명료성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며 이는 결국 세 위격(tres persona)과 한 실체(una substantia)라는 도식으로 하나님을 표상하는 단계까지 간 것입니다. 나아가 복음적인 가르침(evangelica doctrina)은 아담과 더불어 시작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믿음이며 이는 오고오는 모든 이단들을 격파하는 한결같은 권능을 가진 규범(regulam)이라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터툴리안 개념화의 중요한 요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시간차를 두고 이름만 바뀌었을 뿐 하나요 같은 존재성을 가진 단일신 개념으로 이해하는 자들의 오류와 성자가 성육신 당시에 비로소 나타나신 것처럼 여겨 그의 신성과 구약 속에서의 현현을 부정하는 자들의 오류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을 일체성이 삼위성 안으로 분배되는(unitatem in trinitatem disponit) 경륜(dispensatio)으로 표현하되 실체(substantia)와 지위(status)와 권위(potestas)에 있어서는 ‘하나’라고 말하고 각각에 대응되는 형식(forma)과 신분(gradus)과 나타남(species)에 있어서는 ‘셋’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여기에서 셋이라는 것은 분할할 수 없는 수(numerum sine divisione)를 뜻합니다. 성부를 제 1위격, 성자를 제 2위격, 성령을 제 3위격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첫째(primus) 둘째(secundus) 셋째(tertius)라는 말은 서수적인 것이며 분리가 아니라 구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샛째,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ego et pater unum)라고 하셨을 때에 그 ‘하나(unum)’는 ‘실체의 통일성(substantiae unitatem)’을 가리키는 것이지 ‘수의 단수(numeri singularitatem)’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동방의 교부들 중에는 오리겐(Origen, 185-254)의 가장 탁월한 제자로 알려진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트루구스(Gregorius Thaumaturgus, 205-270)가 신앙 해설(Expositio fidei)에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졌으며(ὁμοούσιον) 삼위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μίαν τὴν οὐσίαν τῆν Τριάδος)’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성자는 성부가 참된 발생(γεννηθέντος)을 따라 낳으셨고 성령은 성부의 본질에서 성자로 말미암아 영원히 보내어진(ἐκπεμθέντος) 분으로 묘사하되 발출이란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인 점입니다. 나아가 그는 성부와 성자가 단지 우리의 인식(cogitatione nostra)에 따라 다를 뿐이고 본질을 따라서는 다르지 않다고 한 것과 성자를 하나의 피조물 및 만들어진 것(κτίσμα καὶ ποίημα)이라고 표상한 것 때문에 바질(Basil of Caesarea, 330-379)에 의해 아리우스 광란에 편승한 자라는 정죄를 받습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9)는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서 한 본질(μὶα οὐσία), 본성(ϕύσις), 형상(μόρϕη), 유형(γένος), 신성(θεότης)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세 위격들(τρία πρόσωπα)에 대해서는 본체들(ὑποστάσεις), 고유한 것들(ἴδια), 분들(ἄτομα), 형체들(χαρακτῆρας)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되 위격과 본질의 관계에 있어서는 삼위성 안에 한 하나님(ένα Θεό ἐν Τριάδι) 혹은 유일성 안에 삼위성(τῆν Τριάδα ἐν μονάδι) 등의 표현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터툴리안, 어거스틴, 칼빈과 다른 아타나시우스의 특이한 점은 원인자(αἴτιος)란 용어를 사용하여 성부만이 성자를 발생하고 성령을 발출하기 때문에 유일한 원인자가 되시며 성자나 성령은 원인자가 아니라 원인으로 말미암은 자(τὰ αἰτιατὰ)라고 하였으며, 삼위일체 안에는 첫째도 없고 둘째도 없고 셋째도 없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시적인 분(ἅμα Πατὴρ, ἅμα Υἱὸς, ἅμα Πνεῦμα ἅγιον)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논함에 있어서는 성경에 두 위격들을 가리키는 신적인 성격의 이름들과 행하신 일들을 근거로 논증하는 전례를 남긴 분입니다.

바질은 사용되는 전치사가 다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성도 다르며 위격의 본성이 서로 다르면 표현에 있어서도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의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 마치 하나의 표현이 어떤 특정한 위격에 고유하게 배당되는 것처럼 ‘으로부터(τὸ ἐξ οὗ)’ 고유성은 성부에게 돌리고 ‘를 통하여(τὸ δἰ οὗ)’ 고유성은 성자에게 돌리고 ‘안에서(τὸ ἐν ὧ)’ 고유성은 성령에게 돌리는 아에티우스(Aetius) 류의 주장을 거절하고 전치사의 구별은 본성의 차이를 수반하지 않으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전치사 사용에 자유로운 바질은 당시에 통용되던 영광송인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τῷ θεῷ καὶ Πατρὶ διὰ τοῦ Υἱοῦ ἐν τῷ ἁγίῳ Πνεύματι)’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성령과 더불어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τῷ θεῷ καὶ Πατρὶ μετὰ τοῦ Υἱοῦ σὺν τῷ ἁγίῳ Πνεύματι)’ 영광을 돌린다로 바꾸어 공예배 때 쓰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바질은 당시 성령 하나님을 본질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에 비해 열등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이단적인 사상이 팽배한 와중에 성령 하나님은 성부 및 성자와 동일한 본질을 가졌으며 영광과 위엄에 있어서도 동등하며 성부가 비출생, 성자가 출생이란 고유성이 부여되듯 성령은 성화의 원천(Ἁγιασμοῦ γένεσις) 혹은 성화하는 능력(ἁγιαστκὴ δύναμις)이란 고유성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덕성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한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제누스(Gregorius Nazianzenus, 329-390)는 삼위일체 방식의 신적 존재성을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본성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본성을 아는 것이 ‘어렵다’고 한 플라톤의 겸양보다 더 나아간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기에 감히 사변을 동원하지 말 것이며 물질적인 사유도 버려야 할 것이며 결국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신학의 방법으로 부정의 방식(via negationis)을 권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무한성과 불변성 등인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οὐσία)이 아니라 성부의 특성(ἰδιότης) 혹은 위격(ὑπόστασις)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바질과 더불어 세 위격과 한 실체라는 삼위일체 도식을 수용한 그레고리우스는 성부의 고유성이 비출생성(ἀγεννησία), 성자의 고유성이 출생성(γένησις), 성령의 고유성(ἐκπόρευσις)이 발출이라 했습니다. 그는 각 위격에 별칭도 주었는데 성부는 기뻐하는 분(τὸ εὐδοκεῖν), 성자는 협력하는 분(τὸ συνεργεῖν), 성령은 영감하는 분(τὸ ἐμπνεῖν)이라고 했으며 아리우스 주장을 의식한 탓인지 ‘그가 계시지 않은 때가 없었다(οὐκ ἦν ὅτε οὐκ ἦν)’는 진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사역(ἐνέργεια)이 아니라 위격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질의 단일성도 강조하며 그는 요한일서 1장 9구절에 착안하여 세상에 이르러 모든 인간들을 비추는 참된 빛이 ‘있었고 있었고 있었으나 하나로 있었으며 빛과 빛과 빛이 있지만 하나의 빛이듯이 한 하나님이 계시다(Ἧν καὶ ἧν καὶ ἧν ἀλλ̉ ἓν ἧν. Φῶς καὶ φῶς καὶ φῶς ἓν φῶς εἷς θεός)’고 말합니다. 그의 그리스도 이해가 특이한데, 신성과 인성의 두 속성은 서로 침투하기(περιχωρεῖν) 때문에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θεοτόκος), 그리스도 탄생을 하나님의 탄생(γεννησις θεοῦ), 수난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παθὼν θεός) 혹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θεὸς σταυρούμενος), 그리고 그리스도 보혈을 하나님의 보혈(αἷμα θεοῦ), 그리스도 죽음을 하나님이 죽으신 것(θεὸς τέθνηκε)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 신성에 방점을 찍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성경의 신비적 해석에 심취하여 신비신학 창시자로 불리우는 그레고리우스 뉘쎄누스(Gregorius Nyssenus, 335-395)는 당연히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이성적 이해보다 신앙적 수용의 중요성을 외쳤으며 신앙적인 면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너무도 많다고 말합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현저한 격차를 한 시도 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였으나 최소한 ‘초보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이성적인 논증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며 그 일환으로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이며 실체는 셋(μία οὐσία τρεῖς ὑποστάσεις)’이라는 삼위일체 공식의 신학적 논증에 각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비출생성, 출생성, 발출 개념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동방의 마지막 정통적인 교부라고 불리우는 요하네스 다마스케누스(Johannes Damascenus, 676-749) 역시 앞선 교부들의 입장을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나시지 않음과 나심과 발출이란 존재의 고유한 방식들 이외에는 전적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세 실체들의 관계성을 말하면서, 그는 세 실체들이 ‘서로 나누어질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도록 하나이며 혼합됨이 없이 서로 통전하며 혼합됨이 없이 하나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이며 분리될 수 없으면서 구별되어 있는 자들(ἀνεκφοιτήτους δὲ αὐτὰς καὶ ἀδιαστάτους ἀλλήλων καὶ ἡνωμένος καὶ ἐν ἀλλήλαις ἀσυγχύτως περιχωρούσας ἐπιστάμεθα καὶ ἡνωμένας μὲν ἀσυγχύτως τρεῖς γὰρ εἰσιν εἰ καὶ ἥνωται διαιρουμένας δὲ ἀδιαστάτως)’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는 한 실체, 신성, 능력, 권세, 의지, 역사, 근원, 주권, 왕국 등의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은 이렇게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세 실체들은 모두 동일한 경배와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실천적인 측면의 강조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어거스틴 입장을 다루고자 하는데, 동방에서 사용하는 본질-실체(οὐσία-ὑποστάσεις) 도식을 서방의 실체-위격(essentia-persona) 도식으로 이해하면 언어상의 혼동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거스틴 이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됨이 없이 존재하는 대로 분리됨이 없이 일하시는 분이며...그들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되신다(quamvis pater et filius et spiritus sanctus sicut inseparabiles sunt, ita inseparabiliter operentur...ideoque non sint tres dii sed unus deus)’는 것은 신구약 성경의 정통적인 해석자들(divinorum librorum veterum et novorum catholici tractatores)의 고백이며 범교회적 신앙(catholica fides)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조금 확대한 함의를 말한다면, 신구약 전체를 이해한 결론이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신구약 성경은 벗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통성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체계와 규모에 현저한 발전을 보인 어거스틴 신학은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의 관계성에 있어서 신학의 지평을 경이로운 수준까지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를 따라(primum secundum auctoritatem Scripturarum sanctarum) 탐구해야 한다는 것과 성경을 대함에 있어서 경건과 지식과 능력과 생각과 정결함과 지혜보다 훨씬 긴요한 것으로서 하나님 경외함(timorem Dei)를 강조하는 그의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천재성을 동원하고 만들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아무리 넓은 보편성을 확보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계시하지 않으면 알려질 수 없고 다가갈 수도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을 시공간적 존재로 격하시켜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하신 대상의 하나로 간주하고 결국 고의든 무의식적 본능이든 하나님과 비겨 이기려는 극도의 교만을 발산하는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신 성경의 권위 아래로 인간의 상식과 천재성과 보편성과 심지어 본능까지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은 지극히 간악하고 교활한 우상으로 전락하여 외부에서 가해지는 속임수나 위협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은밀하고 강력하게 진리를 빼앗고 이로써 교회의 근본을 뒤흔들고 파괴하는 복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인간적인 언어의 방식으로 적응된 것이지만 결코 문자나 정보가 아닙니다. 성경의 한 이오타를 읽을 때에라도 우리는 마치 모세가 호랩산에 올랐을 때 땅이 진동하여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히12:21)’고 하였고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하신대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지극히 작은 흠만 있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그런 각오로 들어간 것처럼 흠결이 많은 나는 죽고 완벽하게 거룩하신 그리스도 예수만이 살도록 우리의 전인격과 삶 전체를 벌거벗은 것처럼 하나님께 의탁하며 성경을 펼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어거스틴은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자체로는 분리될 수 없으나 가시적인 피조물의 모양으로 분리되게 보인다’고 말해야 했을 때에 심히 떨었다(timuit)고 말합니다. 그런 경외심을 가지고 그는 분리된 것처럼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다 명료하게 깨닫기 위해 언어 현상을 먼저 간략하게 논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기 위하여(utique)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서(consuetudine humana) 발견되지 않는 언어는 결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언어가 우리에게 가깝다 할지라도 언어의 물리적인 단위는 파장일 뿐이며 무언가를 운반하는 수레에 불과한 것이기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와 그 수레에 담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언어는 무수한 얼굴을 갖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이 성경에 자신의 뜻을 담으셨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성경의 모든 구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였으며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추구하는 자에게 성경은 하나의 얼굴(una facies)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비록 하나의 단어라도 그것이 쓰이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르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말이 많은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아니며 지극히 풍성하고 다양하나 그 안에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언어는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며 시간차를 두고 공간의 진동에 의존하여 비로소 소통의 기능을 발휘하는 시공간 의존적인 것입니다. 무한하고 영원하고 시간공적 제약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고 불변적인 뜻을 그런 언어로 담으려고 할 때에는 적응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적응의 상태 자체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뜻이 계시되는 최종적인 내용인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오시는 성육신의 방식으로 적응하신 성자 하나님을 비록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후에는 그렇게 알지 않게 되었다(고후5:16)’고 한 바울의 고백이 암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어적인 적응을 궁극적인 추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바울이 육신의 안목을 따라 범하였던 오류를 동일하게 답습하는 격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 뜻의 언어적 계시는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문자를 생략하고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의 언어는 한 이오타도 타협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문자에 머무는 것을 의도하는 것은 ‘죽이는 문자’와 ‘살리는 영’의 대립을 망각한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의 언어적 계시는 살리는 진리의 영으로서 동일하신 성령의 조명이 없다면 인간의 언어에 불과하고 역사의 산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잠시 접어두고 언어현상 자체를 살펴보면, 언어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언어로 계시될 때에 불가불 시간적 간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 사이에 음절과 음절이 채워지는 현상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입술에서 파장을 입고 밖으로 출고된 언어만이 아니라 마음의 언어(locutiones cordis)라는 생각도 눈과 귀의 지각만 생략된 형태일 뿐 시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현상이기 때문에 여전히 언어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밖으로 소리나는 말은 안에서 빛나는 말의 기호(verbum quod foris sonat signum est verbi quod intus lucet)’이기 때문에 말과 생각은 본질상 동일한 것이며 어거스틴은 오히려 내면의 언어를 말이라고 부름이 옳다는 입장까지 취합니다. 마음의 생각이든 입술의 언어적 출고이든 그런 분할적인 언어의 시공간적 한계를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시간적 간격(intervallis temporum)이 개입하며 그 사이로 각 이름의 음절들이 채웁니다(vocabuli syllabae occupant nominari).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언어로 분할되어 명명되는 것은 하나님의 다양성(diversitate)에 있어서가 아니라 분배(distributione)에 있어서며 분리(divisione)에 있어서가 아니라 구별(distinctione)에 있어서란 터툴리안 입장을 어거스틴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적인 한계를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을 부를 때에는 마치 단독적인 존재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되며 동시에 거명할 수 없지만(nec simul dici potuerunt)’ ‘실체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셋이 하나이며 시간적 운동이나 시공간의 간격 없이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며 진리와 사랑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요 동일하신 분입니다(simul unum atque idem).’ 게다가 언어의 한계는 인간적인 인식의 한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한계를 인식한 어거스틴은 무한한 생명의 주인이며 비가시적 본성을 가지신 불변적인 하나님을 더군다나 보이고 변하고 죽고 부족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 말한다는 것은 더더욱 가당치도 않은 일이며 하나님을 형언할 수 없는 분이라고 표현할 때조차도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형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경외심을 보입니다. 게다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는 지성이 그 지성 자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지적 겸손의 하한선도 긋습니다.

하나님은 ‘질이 없는 선, 양이 없는 최대성, 부족함이 없는 창조자, 위치가 없는 좌정자, 가진 것이 없이 만물을 포괄하는 자, 장소 없이 어디에나 전적으로 거하시는 분, 시간 없이 영원하신 분, 움직임 없이 움직이게 하는 분, 어떠한 수동성도 없으신 분’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하나님을 표상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속성을 따라 많고 적고 크고 작고 높고 낮고 넓고 좁고 뜨겁고 차갑고와 같은 술어들을 적용할 수 없으며, 인간의 조악한 상상력을 펼쳐 하나님이 땅의 물질적인 것들에 비해 더 낫다는 식의 비교급 표상도 부당하며, 하나님은 무엇이 아니다는 식의 부정신학 접근법도 하나님을 표상하는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삼위일체 논의는 전적으로 성경의 계시된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동시에 성경을 이탈하지 말되 성경의 한 단어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오직성경 및 전성경(sola scriptura et tota) 정신에 충실할 것을 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격(persona), 실체(substantia), 본질(essentia), 삼위일체(trinitas) 등의 용어들이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개념들을 도용하는 것이 마치 성경을 벗어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변증에 따르면, 비록 그러한 신학적 용어들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성경이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는 운을 띄우면서 이단자의 올무와 오류들을 정확히 논박하고 극복할 수 있다면 그러한 용어들의 사용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한 치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이단들의 신학적 광란은 그냥 침묵으로 지나갈 수 없는 불가피성 때문에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 때에라도 마음의 깊은 구석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세 위격들을 말하면 마치 본질의 동등성 내부에 어떤 다양성(ulla diversitas)이 있는 것처럼 여길까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까지 걱정한 탓입니다. 이러한 경외심을 가지고 오직 성경의 계시된 말씀에 기초하되 말씀 밖으로 이탈하지 않는 적정과 절도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저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의 관점에 따라 크게 세 가지의 종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즉 1) 하나님 자신에 따른 것 혹은 실체에 따른 것(ad se ipsa, secundum essentiam), 2) 위격적 관계에 따른 것(secundum relativum, ad invicem atque ad alterutrum), 3) 우연에 따른 것 혹은 피조물에 대한 것(secundum accidens, secundum ad creaturam)입니다. 첫째, 하나님 자신 혹은 실체를 따르는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및 본질을 가리키는 말로서 세 위격들의 일체성(unum)과 통일성(unitas)과 동시성(simul)과 동등성(aequalitas)에 관한 말씀이며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존귀하다’ ‘하나님은 거룩하다’ 등이 여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무한성과 불변성과 영원성을 비롯한 다른 모든 본질적인 신적 속성들이 하나님의 본질 혹은 실체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질을 따르는 표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할 수 없는 동등성 안에서 단일한 본질의 신적인 통일성(unius substantiae inseparabili aequalitate divinam unitatem)을 가지고 계시기에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어거스틴 이해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 그것은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자체가 한 하나님이 되신다(nec in uno Deo sit illa Trinitas, sed unus Deus)’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위격적 관계에 따른 말씀은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아니며, 성자는 성부와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말로서 어떤 한 위격에는 해당되나 다른 위격과는 공유할 수 없는 고유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무엇보다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고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전 신성의 근원(totius deitatis principium)이라 하면서도 성령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런 태도를 취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성부에게 발출하신(de patre procedit)’ 것 때문에 성부를 성령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과 만약 성부가 성령의 근원이라 한다면 왜 성령을 성부의 아들이라 부를 수 없느냐는 문제에 있습니다. 이에 어거스틴은 요한복음 15장 26절에 근거하여 답하기를 ‘성령이 나오시는 것은 났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지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아들이라 부르지는 않는다(Exit enim, non quomodo natus, sed quomodo datus et ideo non dicitur Filius)’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모두가 근원이되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이 되시기에 두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으로 여겨야 합당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아리우스(Arius, 250-336) 오류를 의식한 탓인지 그는 성자의 발생(generatio)과 성령의 발출(procedens)이 시간성 없이(sine tempore) 이루어진 일이며 그러기에 발생과 발출에는 시간의 선후(prius et posterius)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발생과 발출의 능동성 및 수동성 문제에 대해서도 논하는데, 성자의 발생에서 능동성은 인정되지 않고 오직 수동성만 인정되며 성령의 발출에 있어서는 능동성과 수동성 모두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런 위격적 관계에 따라 우리는 성경에서 언급되는 ‘낳으셨다’는 말을 성부에게 돌리며, ‘나셨다’는 말은 성자에게 돌리고, ‘나온다’는 말은 성령에게 돌립니다. 또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은 삼위일체 전체가 아니라 오직 성부에게 돌리며, 성육신과 수난은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에게 돌리지 않고 오직 성자에게 돌리며, 예수님의 세례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임하신 것과 오순절에 불의 혀 같이 각 사람에게 임한 것도 삼위일체 전체가 아니라 오직 성령에게 돌리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자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본체를 따른 것과 종의 형체에 따른 것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전반적인 흐름(universam seriem scripturarum)을 면밀히 검토하지 못한 자들이 범하는 오류로서 종의 형체를 따라 예수님에 대해 언급된 말씀들을 마치 성육신 이전에도 영원했고 지금도 영원하신 그의 신적인 본성에 적용하는 잘못을 지적하며, 어거스틴은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같은 말씀은 종의 형체를 따라 하신 표현이며 신적인 본질을 따라서는 결코 성자가 성부보다 못하거나 작거나 부족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종의 형체를 따라서는 성부의 동일한 독생자며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인간 그리스도 예수’시나 하나님의 형체를 따라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표현과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니라’는 말씀이 동시에 등장해도 진리에 아무런 충돌이나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셋째, 피조물 혹은 우연에 따른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할 수 없이 존재하신 대로 분리할 수 없이 역사하는 분’이라는 범교회적 신앙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장소나 상태나 시간과 관련된 모든 언급은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이나 위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꿈으로(translate) 혹은 유비를 통한(per similitudines) 말씀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역사는 세 위격들에 공통적인 것(opera ad extra sunt communia tribus personis s. trinitatis)입니다. 창세전 영원한 의논과 작정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며, 선택과 유기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며, 창조와 보존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인데, 이처럼 창조전의 신적인 의논을 비롯하여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삼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 단어의 음절을 채우면서 분리되어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시공간적 간격이 있지만 삼위일체 자체에 있어서는(in se ipsa)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 위격에(ad personas singulas) 고유한 것으로 돌리는 성부의 음성, 성자의 육신, 성령의 비둘기 같은 위격적 표상들에 대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성자를 육신의 몸으로 보내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은 발생이나 발출과 같은 무시간적 사건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서 피조물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보내심(missio)에 해당되는 외적 사역이기 때문에 위격적 성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통적인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어거스틴 이해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모든 문자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며 이단들의 모든 비성경적 사색과 오류를 막으면서 동시에 성경의 모든 부분들을 모순이나 충돌 없이 읽으려는 그의 경건과 성경 해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산출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에서(ex rationibus suis) 끌어내되 성경의 그럴듯한 증거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수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단들의 태도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거스틴 자신이나 그의 글에 빠지거나 매이지도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바르게 해석한 교부들의 범교회적 가르침 따를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하는 문맥에서 어거스틴은 진리를 탐구하고 성경을 연구할 때에 오류를 범하는 자들 중에서 대단히 용납하기 어려운 두 가지 문제를 말하는데 첫째는 진리가 알려지기 이전에 전제를 가지는 것이며 둘째는 진리가 알려진 이후에도 그 잘못된 전제를 여전히 옹호하는 것(Praesumptio priusquam veritas pateat, et cum iam patuerit praesumptae defensio falsitatis)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들을 해석할 때에 ‘이야기의 내용(continentia lectionis)이 어떤 가능한 증거들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세 위격들 중의 어느 한 위격이 족장이나 선지자들 중에 나타나신 것처럼 성급하게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자와 성령만이 아니라 성부도(sed etiam Patrem) 육체적인 종류나 유비를 통하여 인간의 제한적인 지각에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모두 육체적인 형태나 환상들에 의해 나타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어느 한 위격에만 고유하게 돌리지 말고 삼위일체 자체가 사려되는 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이해하되 다만 본문의 문맥을 따라 특정한 위격에게 돌려지는 의미가 있을 경우에는 그것도 지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는 계시의 속성을 따라 우리는 성경 전체를 삼위일체 중의 한 위격이신 성자만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하여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고 성경의 저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또한 동시에 성경 전체의 의미이며 목적이 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를 알아야 할 것이고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처럼 그것이 우리에겐 영생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성경은 전체가 구원에 관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은 이렇게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기며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알지 않기로 자랑치 않기로 작정한 바울의 의도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삼위일체 중의 한 위격이신 성자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알고 자랑키로 한 작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물과 역사와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그것을 깨닫도록 조명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며, 만물과 역사 전체가 다 동원되어 깨닫게 된 신학의 모든 내용도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며,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루시는 은혜를 따라 우리가 추구하고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상급과 목적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을 선포하는 증인의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신학이 그에게로 와서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라’는 문맥에서 그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성경에서 신학을 시작하고 성경과 더불어 신학을 전개하고 성경으로 말미암아 신학을 형성하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그러나 지극히 본질적인 문맥을 떠나서는 아무리 멀리 앞서간 발걸음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방향을 따라 전인격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거룩하고 흠없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리를 논하기 이전에 신학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성과 대상성과 목적성을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신학의 원리로서 견고히 붙드는 신학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늘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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