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신학의 원리 1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성의 중요한 인식론적 특징으로 의지에 방향이 있다는 지향성과 만족스런 명료함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 방향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판명성은 적정한 기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기준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즉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창조시 원래 의도된 인간성 전체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살아가되 하나님 경외를 지향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지극히 마땅한 것이며 인간의 인간다운 참모습을 회복하는 근원적인 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지향성과 판명성의 적정한 기준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를 통해 알려지는 것입니다. 알려진다 하더라도 알려진 대로 지향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없으며 알려진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혜도 인간에겐 없습니다.

폴라누스 구분법에 따르면, 우리에게 지향성과 판명성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상 유일하고 단순하나(substantia unicum et simplex) 하나님이 은혜의 언약을 세우시며 친히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사59:21)’이라고 구분하신 것처럼 계시에 있어서는 이중적인 형태(revelationis modo duplex), 즉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말씀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말씀하는 것이기에 성령의 내적 증거(testificatio spiritus sancti interna)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외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성령의 외적 증거(testificatio spiritus sancti externa)라고 부릅니다. 비록 내적인 말씀은 주된(principale) 것이며 외적인 말씀은 도구적인(instrumentale) 성격을 갖지만,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non separandum) 필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conjunctum necesse).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말하시는 하나님의 내적인 말씀과 동일한 성령께서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글에 담으시고 혹은 그들에게 예언으로 선포하신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은 실체와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단지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만 다를 뿐입니다(non differunt re & ratione, sed tantum modo). 게다가 성령의 증거가 없으면 외적인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없으며 외적인 말씀이 없다면 성령이 증거하는 말씀의 객관성은 확인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을 한 반짝도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해석의 주체가 되지 않고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내적인 말씀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전적인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이 내적인 말씀과 외적인 말씀이 만나는 지점이란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인식은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을 성령의 내적인 조명으로 깨닫되 마치 우리가 주체인 것처럼 우리의 전인격이 그 말씀과 교통하며 아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허물고 진리의 절대적 객관성을 훼손하는 모든 시대의 인식론을 극복하고 궁극적인 해답으로 주어진 기독교 인식론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히11:3)’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는 성경적 인식론을 우리에게 설명하되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객관적인 사실도 함께 진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우주의 신비를 가장 거시적인 안목으로 푸는 객관적인 사실과 그런 객관성에 대응되는 유일한 원리로서 성경적인 믿음의 인식론을 생각하고 사실과 믿음의 그러한 관계성을 설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보이는 어떠한 것의 근원과 원인을 나타난 것, 즉 눈의 관찰을 통해서는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만물의 근원을 찾고 우주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극거시 세계와 극미시 세계 관찰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최고의 최첨단 기술과 지성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기준으로 본다면, 그런 활동들은 보는 기능을 확대하고 여전히 보이는 대상에 머물러 있을 뿐 보이지 않는 근원을 찾는 것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무관하게 시도된 노력이라 할지라도 무작정 거부하고 버릴 수만은 없는 유의미한 교훈이 없지는 않습니다. 비록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실패가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은 보이는 현상이 보이지 않는 것에 원인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의 과학은 생명의 신비라고 할 수 있는 세포분열 원인을 연구하되 보이지도 않고 인과율 방식으로 추적할 수도 없는 외부의 어떤 정보로 말미암아 분열의 첫 조짐이 촉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극거시 세계 연구도 우주의 모든 질서와 움직임의 원인을 어떤 힘(impetus)으로 돌리고 있지만 이는 인과율이 통하지 않는 단절적인 사실과 대면했을 때에 ‘모른다’는 자존심 구겨지는 인간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변명의 궁색한 방편일 뿐입니다. 현대의 물리학은 개념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힘’이라는 대상을 설정하고 이 세상의 모든 힘들, 즉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을 통합하여 풀어내는 ‘대통합 이론(grand unified theory)’ 찾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테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신에게(Ảγνώστῳ Θεῷ)’라 칭하며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위하는 미신과 본질적인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과율이 사라지면 인간의 지적 활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인과율의 단절과 비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보이는 것의 근원과 원인이 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고자 지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인과율과 무관한 활동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과가 벌어질 수 있을까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최첨단 과학은 이제 특이하고 경이로운 현상보다 우리에게 너무도 가깝고 익숙한 일상을 관찰과 연구의 대상으로 주목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상조차 인간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다는 불쾌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왔습니다. 신비롭고 특별한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나타난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어떤 근원과 결부되어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직면한 인간의 문명 혹은 과학은 거짓 종교와의 은밀한 결탁의 악수를 청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 해법이 보이지 않는 경우에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인간의 충만한 종교성은 신이나 종교 자체를 거부하는 무신론 혹은 무종교의 옷으로 가장될 때가 많습니다. 그 무신론은 신이 차지하던 자리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신적인 절대성에 버금가는 객관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필요성을 따라 지금 인류가 도달한 객관성의 최종적인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눈으로 보는 것’이며 할 수만 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동일한 것을 보는 것’에 있습니다. 당연히 실험과 반복이 강조될 수밖에 없으며, 실험과 방법이 수리화된 것이 통계인데 그것은 객관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고 동원된 수단이요 심리적 안정제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에서 이론이 나오고 현장에서 진리가 산출되고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는 사고가 진리의 절대적 객관성을 허무는 무신론 주장의 방편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선호되고 있습니다. 실험적 결과와 현장의 관찰과 경험되는 실존에만 의존하는 보는 눈의 기능이 극도로 과장된 오늘날의 문화는 보이는 것을 나타난 것에서만 찾으려는 인간의 본질적인 지향성과 판명성의 한계가 극명하게 구체화된 결과인 것입니다.

지금 스크린이 문명과 문화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현상은 과학의 발달을 입증하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는 ‘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나무(창3:6)’에 대한 호기심이 삶의 전 영역에 구체화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에서 사단이 인간에게 속임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바로 ‘인간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창3:5, 7, 22)’ 결과를 본다면 사단의 말이 속임수가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속임수는 삼척동자 상식만 가지고도 쉽게 식별될 수 있도록 그렇게 허술하지 않고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거짓이 아니며 더군다나 보기 때문에 거짓이 더욱 은폐되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아져 선악을 알게 된다’는 사단의 말이 왜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까? 동기와 목적이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밝아지는 것은 하나님과 질적으로 같아지는 것도 아니며 선악을 분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수준 만큼의 분별력을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눈의 밝아짐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과 비기려는 사단의 본성대로 본질상 의존적인 인간이 자존하는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을 스스로 취함으로 하나님과 비기려는 대립항의 오만한 자리로 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자체가 본질상 하나님 의존하고 있는데도 독립성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재앙이요 저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의 밝아짐은 인간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눈으로 보되 스스로의 기준과 관점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눈이 밝아진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등장했던 모든 인간적 인식론의 근원적인 형태이며, 그것의 성격을 규명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시대의 인식론도 해명될 수 없고 극복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타락 이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인간의 눈이 밝아진' 타락의 첫 증상을 고려해 본다면, 타락 이전에는 인간의 눈이 밝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의 밝아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식하는 일이 있었다면 밝아진 눈에 의존하지 않는 인식의 독특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눈을 밝히시는 신적인 조명에 의존하여 사물을 보았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신의 조명 의존적인 인간의 인식론은 신 의존적인 인간의 본성에도 부합한 것입니다. 만물의 처음과 원인과 본질과 목적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안목을 따라 사물을 보았다면 아마 그것보다 더 탁월하고 축복된 상태의 인식론은 인간에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전적으로 주체가 된 인식론을 취하라는 가장 탐스럽고 지혜롭게 할 것 같고 보암직도 한 미끼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신적인 관점에 의존하고 있는 지복한 인식론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적인 관점을 상실하고 인간이 자신의 관점을 취하며 하나님과 비기려는 사단의 속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단은 마치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하던 패턴과 동일하게 천하만국 영광을 아끼지 않고 미끼로 사용하는 대담함을 보인 것입니다. 또한 영혼의 창문인 눈만 빼앗으면 인간의 삶 전영역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어 결국 천하만국 및 그 영광은 하나도 축나지 않는 교묘한 전략을 구사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자신의 어두운 권세 아래 결박해 두려고 했던 사단의 이 교활한 수법은 한 시대에 제한된 것이 아니며 특정한 집단에게 적용되는 전략만도 아닙니다. 사단은 비록 변신술에 능하지만 그 본성과 핵심적인 전략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탈취한 사단이 광야에서 동일한 수법으로 예수님을 유혹할 때에 예수님의 저항 방식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한 답변은 사단이 우리에게 노리는 궁극적인 대상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취하려고 하는지를 정확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다 주더라도 이것 만큼은 빼앗아야 하겠다고 한 바로 그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빼앗는 방식은 우리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 구체적인 전략은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좋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모두 댓가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돌로 떡이 되게 하실 능력도 있었으며, 시장하실 때였기에 돌덩이로 떡을 만드는 정당한 명분도 있었으며, 그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다 않더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를 따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창조자의 정당한 권위도 갖고 계셨지만, 사단은 그토록 정당하고 당연하고 마땅한 것을 속임수의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임수의 빌미로 사용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도 사단이 우리를 속이는 방편으로 동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독립된 기준과 안목을 가지고 독립된 생각을 하고 독립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독립된’ 인간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자 하는 것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가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사55:8-9)’는 말씀을 본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전혀 다른 것을 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고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했다’는 신명기 29장 29절 말씀을 근거해서 본다면, 나타나지 않은 오묘한 일 혹은 나타나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일은 인간의 기준을 따라 육안으로 관찰되고 분석된 결론을 통해서는 벗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이사야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보았다(신29:2)’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주시지 않았다(신29:4)’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도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밝아진 눈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께서 친히 우리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를 믿음의 방식으로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보이는 온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는 수단이라 했습니다. 또한 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소멸될 것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는 효력이 없어질 것입니다. 자연을 인식할 때에 믿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이는 자연을 있게 만든 비가시적 원인인 하나님의 말씀과 바라는 것들의 비가시적 실상인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도무지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인과 목적이 생략된 사물 자체의 물질적인 인식은 허무주의, 상대주의, 해체주의, 개인주의, 다원주의 관점들의 ‘제멋대로’ 잔치일 뿐입니다. 세상은 이런 찬치의 충만으로 도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보지 않는 자들의 해괴한 성경분석 및 해석과 결론도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말씀을 읽어도 보이지 않는 모든 요소들은 모조리 생략되고 마땅히 지향해야 할 보이지도 않는 소망의 실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박국과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3, 롬1:17)’고 했습니다.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믿음은 진리 인식의 외적인 원리(principium externa cognoscendi)로서 성경과 진리 인식의 내적인 원리(principium interna cognoscendi)로서 성령의 조명을 이어주는 진리 인식의 원리이며, 동시에 그런 인식론을 따라 삶의 전 영역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붙들면서 살아가는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과 사는 것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란 인간의 존재와 보존의 본성적인 원리이며,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식과 삶의 원리로서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나의 눈과 그런 눈으로 얻어진 모든 것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안목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과 안목을 취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어떤 물건의 소유권이 이전되듯 내게 속한 어떤 물건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인간됨이 가장 높은 가치까지 높여지는 역동성과 포괄성을 가진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의 본성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까지 규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되 오직 성실한 공부와 관찰과 분석과 추론만을 통하여 도달한 결론으로 안다면, 그것은 단순한 정보이며 보이는 것을 언어와 지각의 형태로 번역했을 뿐입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전히 나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료만 성경책을 사용했을 뿐이지 내용은 여전히 나의 기준과 관점에서 걸려지고 인간화된 신학에 불과하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시는 있는 그대로의 계시에 왜곡과 첨삭을 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어떤 미세한 간격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나의 판명성을 충족시킨 어떤 지식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을 아는 그런 간격조차 없습니다. 믿음은 대단히 신비로운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험과도 다르고 학문과도 다른 독특한 인식의 원리인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이 신학의 주체요 대상이요 목적이 되시도록 하는 유일한 신학의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계적인 도식이나 명제적인 언어나 빛으로 번역된 정보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인식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앎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요구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똑똑함과 지혜와 경험과 증거로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적인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믿음을 주시고 그것을 계속해서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강조는 결코 반지성 운동으로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지성인의 대열에서 만족하고 계신 분들에게 불편할 수도 있겠으나, 믿음은 지성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있어서 화려한 학벌과 방대한 박학은 결코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거라도 있으면 좋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직도 진리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계시가 무엇이며, 또한 그런 계시가 이 세상에서 저절로는 결코 발생할 수 없는 기적 중에 기적이란 사실을 모르고 단순히 정보를 취득하는 정도로 여기는 '눈의 보이는 인식론'에 머물러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각 기관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적인 진리인식 원리로서 제가 생각하는 믿음은 진리의 차원까지 이르는 지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빠지면 하나님을 포함해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생략하는 무서운 무지의 광란에 빠지고 말 것이며, 진리 인식와는 무관한 정보 취득의 유희에 중독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문맥에서 성경의 개별적인 가르침을 다루기 이전에 신학의 전제요 원리로서 하나님과 성경과 믿음을 신학서론(prolegomena)에서 다루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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