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신학의 원리 6: 성경의 속성들 2


성경의 무오성은 성경 내에 스스로 충돌되는 ‘모순’이 없다거나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대립되는 ‘불합리’가 성경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인간적인 상식과 합리가 두손두발 다 들어야 하는 ‘거룩한 모순’과 ‘초월적인 불합리’가 대단히 많습니다. 이를테면 무에서 존재가 나오는 것과, 물이 흐르기를 중단하는 것과, 시간이 정지하는 것과,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과, 당나귀가 말하는 것과, 완전한 신이면서 완전한 인간이신 분이 계시다는 것과,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등은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과 자연의 보편적인 질서 편에서 본다면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신비들을 거절하며 성경을 단숨에 싸잡아서 비판하되 도무지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는 공상과학 소설에 버금가는 허구라고 정죄하는 일반인의 냉소에 아무리 정교한 지성적 반박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성경의 무오성 교리는 결코 논증과 설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날짜나 인물이나 사건의 정확성과 일치성을 따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문제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시대에 모든 만물에게 모든 사안에 대하여 적용되는 진리이되 그 모든 것들의 본질을 드러내고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가 진정한 자유를 얻도록 안내하는 길로서의 진리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면에 있어서 어떠한 오류도 실패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그러한 무오성은 현상적인 관찰에 의존하는 우리의 지각과 판단을 따라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단절적인 믿음의 확신과 관계하며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인간의 마음이 그런 심각성을 스스로는 헤아리지 못하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에라도 우리에게 안식과 평강과 자유를 주는 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시며 그가 말씀하신 언약도 늘 동일하여 세상 끝날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며 모든 역사는 그 말씀의 빛을 따라왔고 앞으로도 말씀이 헛되이 하늘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사야의 증언처럼 그 말씀의 뜻하신 바가 성취되는 역사가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차원에서 성경은 무오한 것입니다.

바빙크와 같이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영감을 구별하고 계시를 위한 영감과 기록을 위한 영감 사이를 구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도 계시, 영감, 조명을 구분하고 있으며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받았다고 말합니다. 잔키우스 경우에는 계시와 영감은 창조의 때부터 거룩한 소통의 기본적인 방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직접 드러나는 계시는 없기 때문에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이나 상황의 방식으로 계시가 일어나는 계시의 영감은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에 주어지는 기록의 영감과는 당연히 구별될 수 있겠으나 그 둘 사이의 분리나 차이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당시에 계시를 의도하신 하나님이 그 계시가 기록됨에 있어서도 그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특별한 섭리로 주장하신 탓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와 기록의 영감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일컬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르트와 같이 시간이 영원과 접족하는 사건의 찰라적인 시점(Momentum)에서 성경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가 되었다가 계시라고 여기는 순간 다시 '역사'적인 문자로 돌아오는 위태로운 계시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계시가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성경 이면에, 성경 위에, 성경을 초월하여(hinter, uber, jenseits der Bibel)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표현도 성경의 어떤 일부는 계시와 무관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길 여지 때문에 사용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영감(inspiratio)과 조명(illuminatio) 사이에도 구별은 있지만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로서 성경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동일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질 수 있으며 이를 성령의 조명이라 하는데 영감과 조명이 결코 다르지 않은 이유는 영감과 조명의 주체로서 성령이 동일한 탓입니다. 특별히 영감과 조명의 구별이 무시될 경우에 인간은 무절제한 교만에 빠지게 되고 성경의 규범적 종결성과 완전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문자적인 면에서든 문자의 해석적인 면에서든 해석의 실천적인 면에서든 추가와 첨삭을 허용하지 않는 규범적 종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감과 조명을 혼돈하게 되면 성경을 보다가 혹은 묵상을 하다가 떠오른 생각과 환상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계시로 간주하며 권위에 있어서 성경과 동일한 혹은 거기에 준하는 규범적 계시성을 부여하게 되고 결국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을 성경의 자리까지 높이는 방식으로 성경을 가감하게 되기 쉽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은 궁극적인 저자로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차원과 분량은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는 포섭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도록 무한하기 때문에 의미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에 겨우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의 분량을 따라 지혜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비록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계시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군다나 우리에게 깨달음이 주어졌을 경우에는 우리가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분량은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거기에 담아 놓으신 본래의 의미까지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권위에 있어서나 객관성에 있어서나 진리의 분량에 있어서 어떠한 깨달음도 성경과 동일시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마치 성경에 버금가는 규범적 계시인 양 과장할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일부를 조금 알게 되었다는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품는 것이 보다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억의 결함이나, 무지나, 대중적인 편견이나, 상충되는 표현들과 같은 오류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지적이나 비판 때문에 성도님들 및 신학자들 중에도 성경의 무오성에 우려를 표하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해설서(A Body of Divinity)를 저술한 토마스 리즐리(Thomas Ridgley)의 견해만 보더라도 그런 우려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입니다.

1) 성경에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은 때때로 성경 필사자의 부주의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자 자신은 비록 유한하고 오류가 있지만 그의 기록은 성령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오류가 없습니다. 이레니우스 표현을 빌리자면, 거기에는 무관심할 만한 것이나 피상적인 것은 도무지 없으며 모든 것들이 신적인 지혜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리겐 경우에는 점이나 획까지도 무익한 것이 없으며 신적인 권위의 충만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quod non a plenitudine divinae maiestatis descendat)고 했습니다. 제롬은 하나의 말이나 철자나 점까지도(singuli sermones, syllabae, puncta) 천상적인 신비로 가득하기 때문에 연대기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들도 흠이나 오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필사자는 유한하고 유오한 인간이고 성경 기록자가 받은 성령의 영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본에 있어서는 성경의 원본과는 달리 때때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시의 부주의로 발생한 오류들은 지극히 미미해서 성경의 무오성을 파괴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필사조차 주관하고 계신 탓이라고 리즐리는 말합니다.

2) 성경에는 동일한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돌려지는 경우도 있고 동일한 일이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동일한 장소나 인물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경우가 많은 탓입니다. 모세의 아버지만 하더라도 ‘이드로’나 ‘호밥’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산도 ‘호렙’과 ‘시내’라는 이름들이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3) 연대기적 차이는 주로 계산법 혹은 계산하는 시점이나 범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를 테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렀던 기간이 때로는 430년 때로는 400년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전자는 아브라함 자신이 본토를 떠날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고 후자는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은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역대기나 열왕기에 언급된 유다 혹은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기간을 살펴보면 분명한 차이가 보이지만 모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통치의 시점과 종료를 다르게 취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서, 솔로몬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의 죽음 이전에 통치를 시작한 것으로 계산하는 것과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목된 시점을 통치의 시작으로 보는 것과 백성들이 왕으로 외치며 인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 것 등에 따라 통치의 기간은 달리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 어떤 성경들이 동일한 주제를 다루지만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각 성경의 의도에 있어서 다른 강조점과 개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모순이라 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과 야고보의 입장이 충돌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즉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른다고 말하지만,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의는 죄인의 의로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자유와 관계된 의로움을 뜻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의는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야고보의 '의' 개념은 우리의 믿음이 단순한 역사적 신앙이나 어떤 개념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로서 거룩한 행위들로 말미암아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듯하지만 의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표현과 개념과 강조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6) 동일한 것을 어떤 곳에서는 절대적인 것처럼 묘사하고 다른 곳에서는 비교급 형태로 묘사될 때에 성경의 두 텍스트가 서로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모든 자들에게 실천해야 하는 요청을 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내게 나아오는 자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자는 절대적인 명령이고 후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 사이의 말할 수 없는 격차를 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7) 서로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은 모순이 아니라 대체로 말씀의 대상이 다른 사람들 혹은 다른 성격의 사람들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자비할 것'을 명하시고 '아무도 판단하지 않으면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전자의 대상은 모든 개별적인 인간이고 후자의 대상은 공적인 정의를 집행하는 관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 명령이 주어지는 대상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8)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성경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에 모두 진실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말씀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말씀은 모순이 아닙니다. 전자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현존에 대한 언급이고 후자는 그의 영적인 현존 혹은 권세의 지속적인 영향을 뜻하는 것입니다.

9) 성경을 이해할 때에 시점이나 시대의 차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이나 규례들 중에는 반포되던 당시에는 믿음과 의무의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이후에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할례와 정화법과 제사법이 대표적인 것으로서, 비록 구약 시대에는 순종해야 할 법이지만 신약에는 세례로 바뀌기도 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단번의 제사가 이루어져 의식법적 유효성을 종결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승화되는 법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파괴하는 정신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계몽주의 시대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가우젠(L. Gaussen)이 잘 지적한 것처럼 유대주의 학자들은 영감을 따라 기록된 구약의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 무오성을 유대 랍비에게 적용하고, 로마 카톨릭 학자들은 그런 무오성을 교황에게 적용한 전례들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 저자들이 가진 영감의 무오성은 인간적인 무오성 개념으로 추락을 했습니다. 게다가 로마 카톨릭은 거룩한 전승(sacra traditio)의 교리를 등장시켜 성경의 충분성 및 완전성 교리마저 파괴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 2장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거룩한 전통과 성경은 교회에 위탁된 하나님 말씀의 단일하고 거룩한 좌소이다(Sacra Traditio et Sacra Scriptura unum verbi Dei sacrum depositum consituunt Ecclesiae commissum).’ 이처럼 로마 카톨릭은 전통과 성경에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되 순서에 있어서는 성경보다 전통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게다가 ‘거룩한 전통과 성경과 교회의 교도권은 하나님의 지극히 지혜로운 의논을 따라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성립될 수 없으며 이 모두가 동시에 각각의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행하심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유효하게 기여하도록 서로 연관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음이 분명하다(Patet igitur Sacram Traditionem, Sacram Scripturam et Ecclesiae Magisterium, iuxta sapientissimum Dei consilium, ita inter se connecti et consociari, ut unum sine aliis non consistat, omniaque simul, singula suo modo sub actione unius Spiritus Sancti, ad animarum salutem efficaciter conferant)’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성경에 일종의 무오성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전통이 가진 무오성에 미치지는 못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고 권위와 속성에 있어서 전통과 성경과 교회의 해석 사이에는 구분조차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계시를 역사로(Offenbarung Als Geschhichte) 이해한 초기의 판넨베르그는 비록 그가 신학의 지평을 묵시적인 보편역사 전체로 펼쳐서 새로운 신학을 시도한 혜성처럼 등장한 분이지만 그의 방법론도 계시성 면에서는 성경과 역사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성경에 일어난 사건에 시간의 역사 전체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응축된 계시가 역사의 현장에 풀어지고 역사가 종결되기 전까지는 계시가 다 벗겨질 수 없다는 계시의 개념을 전제하면 해석에 있어서 성경과 역사의 우선순위 문제가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성경이 먼저이고 역사가 뒤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역사가 펼쳐지면 그것에 의존해서 성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 말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판넨베르그 입장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헤겔의 결정론적 역사와는 달리 그의 입장은 ‘열린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면 할수록 성경의 진리가 더 잘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고, 성경이 저술되던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도 성경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간주되고 이로써 성경 해석학은 고고학 의존적인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자증적인 속성과 성경의 명료성과 성경의 완전성 교리는 묵시적 역사의 보조가 없으면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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