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명료한가? 네, 맞습니다. 성경은 결코 애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을 언급하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훈련되지 않고 불안정한 사람들이 다른 성경처럼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을 초래한(벧후3:16)’ 사실을 지적하며 성경의 명료성에 어떤 차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동일하게 명료한 것도 아니며, 그것들이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으로 명확한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위하여 필히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까지 불명료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의 지식에 대해서는 식자와 무식자를 막론하고 통상적인 방법만 적절히 사용하면 이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교부들과 모든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인물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성경에서 보다 난해하고 애매한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동일한 주제나 동일한 내용이 보다 명료하게 나타난 구절의 조명을 받아 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이러한 확신은 성경 해석학에 적용되어 그들로 하여금 ‘성경은 자체의 고유한 주석(Scriptura sui ipsius commentarium)’이란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비교(collatio locorum) 방식을 선호하게 했습니다. 이는 성경을 성경 자체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디까지 해석하며 어떤 차원까지 이르러야 성경의 명료성에 도달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성경이 스스로를 해석하고 안내하는 지점까지 가는 것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성경이 입술을 여는 곳까지 가고 입술을 닫는 침묵의 경계선은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성경의 명료성이 우리로 머물기를 원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성경의 명료성과 직결된 문제로서 반드시 건드려야 하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성경의 명료성이 인간의 이성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과 관계된 것(ad fidem)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따라 판명한 것입니다. 당연히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성경은 결코 명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워져 있다면 그것은 멸망할 자들에게 가리워진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명료성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μέτρον πίστεως)에 따라 성경의 의미 즉 하나님의 뜻을 지혜롭게 분별해야 한다는 성경 자체의 원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똑똑한 자에게나 우둔한 자에게나 믿음을 따라서는 모두에게 지극히 단순하고 판명한 것이 이성을 따라서는 모두에게 애매하고 캄캄한 어두움인 것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연과 은총의 엄밀한 이원론을 극복한 바빙크가 잘 지적한 것처럼,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결코 ‘자연’적일 수 없으며 그 근원에 입각하여 볼 때 자연은 ‘초월’적인 것입니다. 당연히 자연의 외모는 자연의 빛(lumen naturalis)을 따라서도 보이지만 자연의 초월적인 본질은 오직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눈을 들어 광활한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다(시19:1)’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비록 모든 사람에게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즉 그의 영원하신 신성과 능력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다’는 명료성을 말하고 있지만 적장 하나님을 깨닫고 추구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의인부재 현실을 지적하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원리에 무게를 싣습니다. 자연이 인간의 삶에 안락한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는 기능도 필연적인 것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과 능력과 행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이 자연의 궁극적인 본질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으로만 명료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의 명료성도 실상은 믿음과 관계된 것이며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에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수준으로 명료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의 명료성에 있어서도 예를 들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아니면 결코 그 이해가 명료하지 않으며 믿음의 분량을 따라 이 구절이 가리키는 의미의 명료성 정도에는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명료성은 다른 것들의 접근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섬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그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맞물려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식음하고 대화하고 숨쉬고 거동하고 잠자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만나고 이별하고 아파하고 죽는 경험이 없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산과 들과 초원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와 곤충과 벌레를 알지 못한다면 성경은 단 한 마디도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곧장 일반계시 영역과 특별계시 영역 사이를 분리하고 해석학적 권위의 우열을 따지는 논의로 접어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자연을 만드시고 보존하고 통치하고 역사를 이끄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명료성 개념도 하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시는 일들을 아는 지식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듯이, 모든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 즉 그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속성과 행하신 일들을 명료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치적인' 교도권을 근거로 해석학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허세를 부리는 것은 참으로 유치하고 쪼잔한 일입니다. 물론 훈련되고 일평생 성경의 의미를 탐구한 분들의 탁월성과 그것으로 교회를 섬기는 마땅한 본분에 심술의 짱돌을 던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학자들의 배움과 도움을 받지만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영적인 삶의 자율성을 어떤 형태로도 훼손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교도권을 빙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최종적인 권위를 해석적인 차원에서 넘보는 음흉한 시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드리는 말입니다.
두번째로 건드려야 하는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성경의 명료성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분량 만큼의 명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계시된 분량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계시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이 덮으시면 벗길 자가 없고 그분이 여시면 닫을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만물과 섭리도 그렇듯이, 성경에 있어서도 오묘한 부분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분명히 드러난 부분은 우리에게 속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오묘한 부분과 명료한 부분을 구분하는 예리한 기준도 없고 두 부분으로 분리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명료하게 드러난 계시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호기심을 따라 파고들면 돌이킬 수 없도록 오묘한 미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즉 성경을 읽고 탐구하고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분명히 안다고 생각한 것들이 우리에게 완전히 소유된 것이 아니고 마치 희미한 거울을 보듯이 어떤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이 살짝 밖으로 드러난 정도의 지식일 뿐이라는 ‘불편한’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명시된 객관적인 진리의 내용이 찰라적인 사건을 통해 계시가 되었다가 순식간에 다시 인간적인 언어 본연으로 돌아오는 바르트적 계시관과 달리 말씀의 객관성은 그대로 있으면서 그것이 생명력 없는 어떤 물체가 아니라 성령의 유기적인 출입으로 인해 말씀이 생명으로 살아 있는 그런 차원의 명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명료성은 내 이성과 학식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믿음이란 형식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내게 소유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영감과 조명이 없으면 성경의 명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료성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며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방식으로 명료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면 성경은 아무리 예리한 해석의 메스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이해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그 명료성에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에 접근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온전한 연합의 길인 것입니다. 이런 명료성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며 멀리 있는 것도 아니며’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이를 행할 수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에스겔의 예언처럼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명료하게 되는 근거를 성령의 내주와 조명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랑의 하나됨이 없이는 성경은 결코 명료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뜻합니다. 사랑이 식으면 그 거리는 벌어질 수밖에 없고 사랑이 더할수록 거리는 좁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지고의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과 하나됨을 통하여 거리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 때문에 억울한 고통과 까닭 없는 환란을 넘어 부당한 죽음에 이른다 할지라도 불명료한 애매함에 빠지지 않고 '주의 인자함이 생명보다 낫다'는 고도의 명료함에 도달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경지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과 삶에 어둡고 애매했던 것들이 그 사랑 때문에 밝아지고 분명해진 탓입니다. 사랑하면 아무것도 애매하지 않습니다. 되어야 할 됨됨이를 알고 가야 할 방향을 깨닫고 행해야 할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들이 캄캄한 혼돈으로 빠질 것입니다. 아무리 밝은 식견을 가졌어도 모든 것들을 성취할 능력을 가졌어도 천하를 설득한 입술을 가졌어도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경의 어떠한 구절도 명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가시밭 여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만물은 그저 욕망의 넓은 공백을 채우기 위한 착취와 유린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애매하고 불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습니다. 삶의 명료성을 믿습니다. 만물의 명료성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큰 계명의 사람이 될 때에만 비로소 실현되는 명료성인 것을 또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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