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떤 방향을 향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그 방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조의 독특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당연히 하나님 자신일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만물 자체에 내재된 방향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과 감성과 생각과 언어와 행위 등 인간의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은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후적인 형벌이 아니라 창조될 때부터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것으로 여김이 옳아 보입니다. 문제는 지향성 자체보다 지향성이 발휘되는 궁극적인 대상과 실질적인 방향인 것입니다.
또한 지식의 명료함에 도달하여 만족을 취하기 전까지는 결코 무언가를 향하는 그 지향성이 중단하지 않는다는 판명성의 오류 및 한계도 죄와 결부된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 이전에 그런 제한성을 만드시고 의도하신 창조자의 뜻으로 소급하는 보다 진취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시광선 바깥의 파장은 볼 수 없으며 가청 주파수를 벗어난 범위는 듣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감지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은 비록 전자 현미경을 통해 10의 마이너스 9승(10-9) 세계까지 관찰할 수 있고 10의 마이너스 18승(10-18) 초, 즉 아토초(Attosecond)의 시간까지 감지할 수 있다지만 지각의 범위가 넓어진다 할지라도 만물의 근원까지 보는 판명성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제한적인 지각의 지평을 놀랍도록 넓혀 놓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과 진리를 앎에 있어서는 여전히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넓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정도의 진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할 때부터 설정해 놓으신 판명성의 한계를 따라 말씀하신 만큼 듣고 계시하신 만큼 보고 깨닫게 하신 만큼의 깨달음을 취하는 하나님 편에서의 창조적 의도에 입각한 판명성의 적정과 절도에 머무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창조적인 한계로서 지향성과 판명성을 창조자의 뜻에 맞도록 올바르게 조율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학은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지향성이 올바른 대성을 지향할 때에 인간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본질을 지혜인 동시에 지식이라 한다면, 그 출발점은 시인과 지혜자가 명시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시111:10, 잠1:7, 9:10)’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는 모든 지혜와 교훈과 지식을 포기하고 멸시하는 자라는 이면의 진리를 고려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가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신학교나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가 신학교의 교수직을 장악하고 교회의 강단을 점거할 때에 초래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방법과 제도를 리모델링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회의를 열고 운동을 벌인다고 수습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하고 근본적인 해법은 하나님께 돌이켜 그를 경외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 않아서 대충 안심하고 낙관적인 기대감을 가지시는 분도 계실 것이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죄악으로 창궐해 있습니다. 죄악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인류가 소모하는 에너지와 식량과 시간은 천문학적 규모로 절약될 것이며 그것을 복지로 돌린다면 세상은 천국을 방불하는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그 죄악을 근절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감시와 처벌의 수위를 높이며 전문화된 기관들을 만들어 감금하고 억업하고 처형하는 방식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 틈새에서 사적인 이윤을 챙기는 자들은 욕망의 지속적인 만족을 위해 수익과 관계된 죄악을 고의로 부추기게 되는 어두운 악순환이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은 또 다른 문제가 양성되는 음흉한 온상으로 변하는 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격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죄 문제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죄문제의 해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8:13)’고 말합니다. 호흡이 중단되는 일순간의 순교도 있지만, 어쩌면 순교자적 정신을 일평생 발휘해야 하는 대상은 죄악과의 싸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죄악은 그 자체로 온 인류에게 가장 무익하고 해로운 것이지만 동시에 주께서 인간의 죄악을 따라 그러한 것까지 이 땅에 허락하신 배후에는 그 만큼의 역설적인 순기능도 없지는 않습니다. 즉 죄악은 우리로 하여금 일평생 여호와 경외하는 것에 매달릴 수 있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일한 해법은 그것 뿐이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고 죄악이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의 죄악조차 수단으로 삼으셔서 선을 이루시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와 죄악을 미워하는 것이 동일시 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성도들로 하여금 죄악을 미워하고 이기도록 하는 그러한 신학 산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혜자의 진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잠14:27)’이요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19:23)’는 개념까지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신학은 성경적 지식의 근사한 진열과 과시를 통해 머리 뻣뻣한 희열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며 생명의 지속을 위해 계속해서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거룩한 진리의 수종적인 출구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잠14:26)’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시34:9)’고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신학이 애매하지 않고 견고한 확신에 찬 진리를 증거하되 인생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필요를 다 채워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규모와 깊이와 넓이와 체계를 가져야 하고 또한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신학에 뛰어들 수도 없으며, 신학을 시작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인간화된 신학을 산출할 것이며 그런 신학은 세상에 관영한 죄문제를 외면할 것이며 당연히 사망에 이르는 죄와 씨름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의 샘과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는 수종적인 기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호와 경외함과 무관하게 산출된 신학은 결코 견고한 확신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세상의 유력한 지식 조각들의 어정쩡한 짜집기로 오히려 혼돈과 모순만 일으켜 성도들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권위까지 의심하고 결국 현대의 편만한 상대주의 개인주의 및 다원주의 문화가 던지는 고상한 추파에 무장해제 당하는 위경까지 내몰고 갈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다윗이 ‘죽은 개’ 같은 시무이가 퍼부은 부당한 저주의 혼탁한 잡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을 헤아린 것처럼 상대주의 개인주의 및 다원주의 정신의 시대적 요청을 정죄하기 이전에 그런 시대상을 초래한 기독교의 낯뜨거운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이 우선적인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와 절대적인 주권과 가장 두려운 공의와 한없는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함에 있어서 그렇게 고귀한 것을 증거하는 일에 걸맞은 '역량'이 준비되지 못한 미성숙을 노출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쁘심을 따라 말씀의 권위와 교회의 독특한 지위를 행사하지 않고, 이권 취득의 시녀로 부려먹고 사리사욕 챙기는 수단으로 오용하고 원수들을 섬멸하는 신적인 명분으로 동원하는 등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앞장서서 훼손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권위라는 거들떠 보기도 싫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만 갑절로 촉발했던 사실을 통렬하게 회개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호등을 잘못 읽어서 무례한 원수들의 거북한 입술에 철퇴를 가하는 공격적인 변론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격분한 논쟁의 침만 튀기고 마땅히 보아야 할 교회의 현주소와 읽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인 부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문제의 실상을 주변에서 찾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주목하며 ‘여호와를 버림과 그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 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모든 무지와 오류를 수습하는 가장 긴급하고 근본적인 답입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지혜와 지식의 근본을 내던져서 혹은 최소한 망각해서 초래된 결과인데 그 못마땅한 결과 자체를 뜯어 고치는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고 한다면 문제의 근원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더 깊은 혼돈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또한 교회의 엄청난 인력과 재원과 시간은 허탄하고 주변적인 잡사에 매달려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본성적인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성을 상실하면 아무리 성실하고 정직해도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으로 신학의 시작과 핵심이며 사망의 전령이라 할 죄를 미워하고 극복하게 하여 결국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견고한 확신을 수혈하는 전제이며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우는 풍성한 보고이기 때문에 모든 영적 문제수습 일번지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또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판명성의 정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디까지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가리키는 다림줄과 같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자의적인 기준을 따라 편차가 생길 수도 있겠으나 최소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지식에 머물러 있는지를 물을 수 있겠고 그리하여 진리의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가 적정에 달하도록 조율할 가장 종합적인 준거는 분명하게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인간의 끝모를 지적 추구는 극미시 세계와 극거시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한지 오래 되었으며, 어떤 의미가 직접 산출되지 않는 극미시 차원의 세계를 조작하여 다소 먼 원인을 조정하고 결국 원하는 결과를 작위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능력까지 발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하고 고통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절대적인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영역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영역을 가능한 한 넓게 확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넓히고 장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물론 연약한 분들을 돌보고 도와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온 세상을 다 아시고 그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목적도 다 아시고 모든 일의 완급과 경중을 신적인 안목으로 조절하며 통치하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가 고려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에 펼쳐진 필요를 당장 해소하기 위해 밟지도 말아야 할 경계선을 양심의 고발까지 묵살하며 무모하게 출입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수습할 수도 없는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킬 여지가 있으며 우리 시대에는 그것을 풀지 못하고 결국 후대에 무거운 숙제로 물려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인간화된 자연을 자연 자체보다 더 확대해 나간다면 자연의 본래적인 질서와 기능에 심각한 변이가 발생할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다음 세대에게 끔찍한 재앙의 표정으로 고개를 들 수도 있습니다. 오존층의 파괴와 지구의 온난화는 자연의 전방위적 인간화가 초래할 거대한 재앙의 관대한 서곡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되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와 관련된 판명성의 요구에 적정과 절도의 경계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영역의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우리가 어떤 것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하는지를 분별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런 분별의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교통을 통해서 취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애매하고 개인마다 다른 기준이 설정될 것이 뻔한 이런 방식보다 모두가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서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인격적 교통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진위가 뚜렷하게 밝혀지는 언어의 명제적인 방식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원래 인격적인 것이며 언어적인 형태로 다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이 뚜렷한 수학적 혹은 언어적 명제로 진리가 가려질 수 있다면 이 땅에 하나도 동일하지 않으면서 저마다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가졌으되 그 무한한 다양성이 함께 어우러져 생산되는 조화로운 미는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판명성을 제공하는 기준이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과 교류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도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고 완전하게 분명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다 창조자 탓이라며 무조건 나쁘다고 성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성을 가지되 여전히 인간 편에서는 해석과 적용의 다양성이 있다는 사실에는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기초하여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인격적 교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은 그리스도 신학이나 천상적인 의인들의 신학과는 달리 거울을 비추어서 보듯이 희미한 가운데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학’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논하게 될 자기부인(self-denial) 개념과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제 요약하면, 인간 자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및 하나님의 명령 지키는 것과의 ‘본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인격적인 동시에 앎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향하는 경향성과 희미하고 애매한 것을 싫어하는 판명성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본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그 본성에 지향성과 판명성이 있다면 서로 분리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향성과 판명성은 하나님 경외하는 방향을 지향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경외라는 기준이 제시하는 경계선에 머물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따라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에 신학의 근본이며 죄문제의 해법이며 그래서 생명의 샘이며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견고한 확신을 주고 부족한 것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논지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에 해를 끼치는 신학을 산출할 것이고 이에 부수적인 폐해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뒤따를 것입니다. 모든 시대적 문제의 해결책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본래적인 인간성 자체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신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와 그의 명령 준행하는 것을 동등한 것으로 묶은 전도자의 결론(전12:13)을 본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 즉 하나님께 돌아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 경외하는 것은 광야의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워야 했던 가장 중요한 교훈(신8)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지향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타락의 결과로만 보는 것은 창조의 신비로운 본래적 의도를 고의로 거부하는 지적 나태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한다는 본성적인 전제로 인해 온전한 객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객관성의 원천적인 불가능이 그 자체로 죄나 타락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지향성에 근원적인 오류 혹은 한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넘어 인간이 그런 제한적 성향을 갖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까지 살피는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이 좋습니다. 타락 이후에 우리에게 발견되는 인간의 지향적 오류 및 한계는 그것이 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에 치중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잠시 접고 이 사안을 살핀다면 인간의 보다 본래적인 본성이 한층 명료해질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방향을 향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그 방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조의 독특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당연히 하나님 자신일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만물 자체에 내재된 방향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과 감성과 생각과 언어와 행위 등 인간의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은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후적인 형벌이 아니라 창조될 때부터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것으로 여김이 옳아 보입니다. 문제는 지향성 자체보다 지향성이 발휘되는 궁극적인 대상과 실질적인 방향인 것입니다.
또한 지식의 명료함에 도달하여 만족을 취하기 전까지는 결코 무언가를 향하는 그 지향성이 중단하지 않는다는 판명성의 오류 및 한계도 죄와 결부된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 이전에 그런 제한성을 만드시고 의도하신 창조자의 뜻으로 소급하는 보다 진취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시광선 바깥의 파장은 볼 수 없으며 가청 주파수를 벗어난 범위는 듣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감지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은 비록 전자 현미경을 통해 10의 마이너스 9승(10-9) 세계까지 관찰할 수 있고 10의 마이너스 18승(10-18) 초, 즉 아토초(Attosecond)의 시간까지 감지할 수 있다지만 지각의 범위가 넓어진다 할지라도 만물의 근원까지 보는 판명성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제한적인 지각의 지평을 놀랍도록 넓혀 놓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과 진리를 앎에 있어서는 여전히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넓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정도의 진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할 때부터 설정해 놓으신 판명성의 한계를 따라 말씀하신 만큼 듣고 계시하신 만큼 보고 깨닫게 하신 만큼의 깨달음을 취하는 하나님 편에서의 창조적 의도에 입각한 판명성의 적정과 절도에 머무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창조적인 한계로서 지향성과 판명성을 창조자의 뜻에 맞도록 올바르게 조율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학은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지향성이 올바른 대성을 지향할 때에 인간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본질을 지혜인 동시에 지식이라 한다면, 그 출발점은 시인과 지혜자가 명시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시111:10, 잠1:7, 9:10)’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는 모든 지혜와 교훈과 지식을 포기하고 멸시하는 자라는 이면의 진리를 고려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가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신학교나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가 신학교의 교수직을 장악하고 교회의 강단을 점거할 때에 초래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방법과 제도를 리모델링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회의를 열고 운동을 벌인다고 수습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하고 근본적인 해법은 하나님께 돌이켜 그를 경외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 않아서 대충 안심하고 낙관적인 기대감을 가지시는 분도 계실 것이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죄악으로 창궐해 있습니다. 죄악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인류가 소모하는 에너지와 식량과 시간은 천문학적 규모로 절약될 것이며 그것을 복지로 돌린다면 세상은 천국을 방불하는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그 죄악을 근절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감시와 처벌의 수위를 높이며 전문화된 기관들을 만들어 감금하고 억업하고 처형하는 방식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 틈새에서 사적인 이윤을 챙기는 자들은 욕망의 지속적인 만족을 위해 수익과 관계된 죄악을 고의로 부추기게 되는 어두운 악순환이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은 또 다른 문제가 양성되는 음흉한 온상으로 변하는 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격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죄 문제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죄문제의 해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8:13)’고 말합니다. 호흡이 중단되는 일순간의 순교도 있지만, 어쩌면 순교자적 정신을 일평생 발휘해야 하는 대상은 죄악과의 싸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죄악은 그 자체로 온 인류에게 가장 무익하고 해로운 것이지만 동시에 주께서 인간의 죄악을 따라 그러한 것까지 이 땅에 허락하신 배후에는 그 만큼의 역설적인 순기능도 없지는 않습니다. 즉 죄악은 우리로 하여금 일평생 여호와 경외하는 것에 매달릴 수 있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일한 해법은 그것 뿐이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고 죄악이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의 죄악조차 수단으로 삼으셔서 선을 이루시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와 죄악을 미워하는 것이 동일시 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성도들로 하여금 죄악을 미워하고 이기도록 하는 그러한 신학 산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혜자의 진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잠14:27)’이요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19:23)’는 개념까지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신학은 성경적 지식의 근사한 진열과 과시를 통해 머리 뻣뻣한 희열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며 생명의 지속을 위해 계속해서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거룩한 진리의 수종적인 출구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잠14:26)’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시34:9)’고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신학이 애매하지 않고 견고한 확신에 찬 진리를 증거하되 인생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필요를 다 채워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규모와 깊이와 넓이와 체계를 가져야 하고 또한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신학에 뛰어들 수도 없으며, 신학을 시작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인간화된 신학을 산출할 것이며 그런 신학은 세상에 관영한 죄문제를 외면할 것이며 당연히 사망에 이르는 죄와 씨름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의 샘과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는 수종적인 기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호와 경외함과 무관하게 산출된 신학은 결코 견고한 확신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세상의 유력한 지식 조각들의 어정쩡한 짜집기로 오히려 혼돈과 모순만 일으켜 성도들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권위까지 의심하고 결국 현대의 편만한 상대주의 개인주의 및 다원주의 문화가 던지는 고상한 추파에 무장해제 당하는 위경까지 내몰고 갈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다윗이 ‘죽은 개’ 같은 시무이가 퍼부은 부당한 저주의 혼탁한 잡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을 헤아린 것처럼 상대주의 개인주의 및 다원주의 정신의 시대적 요청을 정죄하기 이전에 그런 시대상을 초래한 기독교의 낯뜨거운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이 우선적인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와 절대적인 주권과 가장 두려운 공의와 한없는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함에 있어서 그렇게 고귀한 것을 증거하는 일에 걸맞은 '역량'이 준비되지 못한 미성숙을 노출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쁘심을 따라 말씀의 권위와 교회의 독특한 지위를 행사하지 않고, 이권 취득의 시녀로 부려먹고 사리사욕 챙기는 수단으로 오용하고 원수들을 섬멸하는 신적인 명분으로 동원하는 등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앞장서서 훼손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권위라는 거들떠 보기도 싫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만 갑절로 촉발했던 사실을 통렬하게 회개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호등을 잘못 읽어서 무례한 원수들의 거북한 입술에 철퇴를 가하는 공격적인 변론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격분한 논쟁의 침만 튀기고 마땅히 보아야 할 교회의 현주소와 읽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인 부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문제의 실상을 주변에서 찾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주목하며 ‘여호와를 버림과 그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 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모든 무지와 오류를 수습하는 가장 긴급하고 근본적인 답입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지혜와 지식의 근본을 내던져서 혹은 최소한 망각해서 초래된 결과인데 그 못마땅한 결과 자체를 뜯어 고치는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고 한다면 문제의 근원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더 깊은 혼돈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또한 교회의 엄청난 인력과 재원과 시간은 허탄하고 주변적인 잡사에 매달려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본성적인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성을 상실하면 아무리 성실하고 정직해도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으로 신학의 시작과 핵심이며 사망의 전령이라 할 죄를 미워하고 극복하게 하여 결국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견고한 확신을 수혈하는 전제이며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우는 풍성한 보고이기 때문에 모든 영적 문제수습 일번지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또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판명성의 정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디까지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가리키는 다림줄과 같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자의적인 기준을 따라 편차가 생길 수도 있겠으나 최소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지식에 머물러 있는지를 물을 수 있겠고 그리하여 진리의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가 적정에 달하도록 조율할 가장 종합적인 준거는 분명하게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인간의 끝모를 지적 추구는 극미시 세계와 극거시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한지 오래 되었으며, 어떤 의미가 직접 산출되지 않는 극미시 차원의 세계를 조작하여 다소 먼 원인을 조정하고 결국 원하는 결과를 작위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능력까지 발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하고 고통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절대적인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영역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영역을 가능한 한 넓게 확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넓히고 장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물론 연약한 분들을 돌보고 도와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온 세상을 다 아시고 그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목적도 다 아시고 모든 일의 완급과 경중을 신적인 안목으로 조절하며 통치하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가 고려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에 펼쳐진 필요를 당장 해소하기 위해 밟지도 말아야 할 경계선을 양심의 고발까지 묵살하며 무모하게 출입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수습할 수도 없는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킬 여지가 있으며 우리 시대에는 그것을 풀지 못하고 결국 후대에 무거운 숙제로 물려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인간화된 자연을 자연 자체보다 더 확대해 나간다면 자연의 본래적인 질서와 기능에 심각한 변이가 발생할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다음 세대에게 끔찍한 재앙의 표정으로 고개를 들 수도 있습니다. 오존층의 파괴와 지구의 온난화는 자연의 전방위적 인간화가 초래할 거대한 재앙의 관대한 서곡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되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와 관련된 판명성의 요구에 적정과 절도의 경계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영역의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우리가 어떤 것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하는지를 분별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런 분별의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교통을 통해서 취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애매하고 개인마다 다른 기준이 설정될 것이 뻔한 이런 방식보다 모두가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서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인격적 교통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진위가 뚜렷하게 밝혀지는 언어의 명제적인 방식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원래 인격적인 것이며 언어적인 형태로 다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이 뚜렷한 수학적 혹은 언어적 명제로 진리가 가려질 수 있다면 이 땅에 하나도 동일하지 않으면서 저마다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가졌으되 그 무한한 다양성이 함께 어우러져 생산되는 조화로운 미는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판명성을 제공하는 기준이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과 교류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도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고 완전하게 분명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다 창조자 탓이라며 무조건 나쁘다고 성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성을 가지되 여전히 인간 편에서는 해석과 적용의 다양성이 있다는 사실에는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기초하여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인격적 교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은 그리스도 신학이나 천상적인 의인들의 신학과는 달리 거울을 비추어서 보듯이 희미한 가운데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학’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논하게 될 자기부인(self-denial) 개념과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제 요약하면, 인간 자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및 하나님의 명령 지키는 것과의 ‘본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인격적인 동시에 앎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향하는 경향성과 희미하고 애매한 것을 싫어하는 판명성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본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그 본성에 지향성과 판명성이 있다면 서로 분리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향성과 판명성은 하나님 경외하는 방향을 지향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경외라는 기준이 제시하는 경계선에 머물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따라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에 신학의 근본이며 죄문제의 해법이며 그래서 생명의 샘이며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견고한 확신을 주고 부족한 것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논지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에 해를 끼치는 신학을 산출할 것이고 이에 부수적인 폐해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뒤따를 것입니다. 모든 시대적 문제의 해결책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본래적인 인간성 자체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신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와 그의 명령 준행하는 것을 동등한 것으로 묶은 전도자의 결론(전12:13)을 본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 즉 하나님께 돌아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 경외하는 것은 광야의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워야 했던 가장 중요한 교훈(신8)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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