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를 산출하고 그것의 정통성을 검증하는 궁극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신학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리(principium)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작 혹은 원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프린키피움(principium)’이 헬라어 ‘아르케(ἀρχή)’와 대응된 것은 이전 시대 교부들의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한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 340-410)가 오리겐의 『원리에 관하여(Περὶ ἀρχῶν)』를 De principiis로 번역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of Cilicia)와 히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 견해에 따르면, ‘아르케’에 사물의 본질(φυσίς), 비결정 혹은 무한(ἄπειρον)이란 개념을 부여한 최초의 인물은 아낙시만더(Anaximander, BC 610-546)입니다. 그는 문헌상 아르케(ἀρχή)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탈레스(Tales, BC 624-546)의 제자이며 물이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라고 주장한 스승과는 달리 ‘아페이론(ἄπειρον)’ 개념을 도입하여 만물의 시초는 물과 같은 어떤 요소가 아니며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산출되는 어떤 결정되지 않고 제한되지 않은 최초의 ‘무엇’이라 했습니다. 아낙시만더의 아르케(ἀρχή) 정의에 ‘원인’이란 개념을 추가하고 모든 원인들을 원리들(πάντα τὰ αἴτια ἀρχαί)로 규정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며, 그는 만물의 원리(ἀρχὴ πάνπων)란 어떤 사물이 거기에서 산출되는 근원(τὸ ἐξ οὗ γίγνεται)이라 규정하고, 모든 원리들의 공통적인 것은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 혹은 산출되는, 혹은 알려지는(ὅθεν ἢ ἒστιν ἢ γίγνεται ἢ γιγνώσκεται)’ 최초의 지점이라 했습니다.
2세기의 교부들 중에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는 만물의 첫번째 원리로서 어떤 요소보다 탁월하고 고상한 것을 추구하되 무한한 것(ἀπειρία)들을 열거하는 철학자로 아낙시만더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와 아르켈라우스(Archelaus)를 거명하며 그들은 마음(τὸν νοῦν)을 그 무한한 것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한편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3-165)는 아낙시만더의 ‘아페이론’ 개념을 수용하며 ‘무한성은 모든 만물의 첫번째 원리이며 거기에서 모든 만물이 산출되고 소멸되어 다시 돌아가는 곳(τὸ ἄπειρον ἀρχὴν ἁπάντων ἔφησεν εἶναι· ἐκ τούτου γὰρ δὴ τὰ πάντα γίνεσθαι καὶ εἰς τοῦτο τὰ πάντα φθείεσθαι)’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적 개념을 존중하긴 했으나 저스틴은 만물의 원리 혹은 시작을 물이나 공기나 흙이나 불로 이해한 철학적 관점이나, 만물의 두 가지 근원으로 신과 물질(θεὸν καὶ ὕλην)을 만물의 두 가지 주요한 근원으로 주장한 아리스토테레스 관점이나, 신과 물질과 형상(θεὸν καὶ ὕλην καὶ εἶδος)을 만물의 근원으로 본 플라톤의 견해를 거절하고 성경의 진술에 의존하여 ‘최고의 유일한 원리는 하나님 뿐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클레멘트는 시작이 없으시며 산출되지 않으신 하나님(τὸν ἄναρχον θεόν...ἀγένητος)을 일컬어 위대한 원리(ἄρχοντα)요 모든 만물의 조성자(τὸν πάντων τοιητὴν)며 모든 원리들의 창조자(τῶν ἀρχῶν αὐτῶν δημιουργὸν)며 자연적인 논제와 추론 및 판단의 원리(ἀρχὴ τοῦ φυσικοῦ τόπου...τοῦ λογικοῦ καὶ κριτικοῦ)라고 했습니다.
‘원리’라는 개념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해서 사용된 경우는 어거스틴 안에서 처음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을 ‘전 신성의 원리(totius deitatis principium)’라고 했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만물의 ‘단일한 원리(unum principium)’라고 말합니다. 이와 동일하게 존 후스(John Hus, 1369-1415)는 롬바르드 『문장집(Sententiae)』을 주석하는 곳에서 창조되지 않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increata Trinitas ipsa)이 모든 만들어진 것들의 원리(principium omnium rerum productarum)라고 했습니다. 뉘앙스가 약간 다르지만 칼빈도 말하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과 삼위성은 경외해야 할 진리로서 참된 신학의 원리이며 머리(theologiae verae principium & caput)라고 하였고, 나아가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규범(fide & religionis nostrae regula)으로 다른 모든 교리들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premierement, principio) 사려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가 철학자에 의해 먼저 언급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특별히 루베르투스(Sibrandus Lubbertus)는 원리(principium)를 모든 기독교 가르침의 원인(causa)으로 규정하고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 교리가 존재하게 되고(sunt) 알려지게 된다(cognoscuntur)고 말합니다. 당연히 하나의 교리가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는 바로 이 원리에 의해서 규명되는 것입니다. 케커만(Bartholomaeus Keckermann)은 신학의 체계(systema)를 원리와 부분들로 구분하고 원리는 다시 사물(res)과 앎(notitia)으로 나눈 이후에 하나님 자신만이 지고한 첫번째 원리(principium primum & summum)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원인(causa)과 원리(principium)의 긴밀한 관계성에 대하여 네델란드 개혁주의 신학자 바빙크(Herman Bavinck)는 '모든 원인은 하나의 원리가 되지만 모든 원리가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alle causa is principium, maar niet alle principium is causa)'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원형적인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계시를 통하여 그것을 나누시는 것도 하나님 자신이며 그것을 인간에게 전하시는 것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신학의 인식론적 원리는 신학의 존재론적 원리가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신학의 도구적인 유효적 원인(causa efficiens instrumentalis der theologie)이라 했습니다.
이상에서 보건대, 신학의 원리는 존재와 인식의 원리로 구분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성경이 그러한 구분에 각각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보더라도 모든 피조물을 존재로 부르신 이후에도 창조자 하나님이 권능의 말씀으로 그 피조물을 계속 보존하고 계시듯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도 쓰신 이후에 인간 독자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말씀의 주어가 되셔서 성령의 조명으로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수단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성경 사이의 엄밀한 원리적 분리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만을 신학의 궁극적인 원리로 이해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시는 최상의 방식으로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기독교 진리의 모든 교리들은 성경의 우선성과 절대성과 규범성을 전제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러기에 신학의 원리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수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폴라누스, 샬피우스, 마코비우스, 트렐카티우스, 코케이우스, 픽테트, 튜레틴, 마스트리히트 등)과 그 시대에 확립된 신앙 고백서들(헬베틱, 갈리칸, 벨직, 웨스트민스터 등) 대부분이 하나님 자신을 논하기 이전에 성경을 신학의 원리로 규정하고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와 관련된 인식론적 관점에서 선호되는 순서이고,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당연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먼저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트렐카티우스가 하나님을 성경론 다음으로 다루면서 ‘거룩한 신학의 이차적인 원리(secundum sacrae theologiae principium)’라고 주장한 것은 진리의 인식론적 원리를 강조한 것이지 하나님 자신만이 존재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의해서 산출되는 분이 아닙니다. 계시보다 계시하신 분이 더 크시기 때문에 성경에 가두어질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산출하는 존재론적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시기 원하셔서 택하신 계시의 방식이며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 존재성에 비추어 본다면 성경은 우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성경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지극히 사소하고 미미하게 보이는 진리의 단 한 조각도 깨달을 수 없다는 차원에서 성경은 절대적인 인식론적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원리와 인식론적 원리를 구분하지 않고 성경만을 원리로 강조하면 하나님이 성경이란 우연적 계시에 종속되는 듯한 오해가 빚어질 수 있으며, 성경이 생략되고 하나님만 원리로 강조되면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알고 있는 모든 우상들의 거짓과 오류를 제어할 장치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만물과 신학의 존재론적 원리시고, 성경은 만물과 신학의 인식론적 원리라는 선명한 구분선이 그어질 수 있다는 발상도 최선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신학의 존재와 인식 모두에 관여하고 계시기 때문에 존재와 인식의 원리를 구분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나 그 이후의 정통주의 시대는 로마 카톨릭이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전통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실제로는 교황에게 무오성과 그에 따르는 성경의 절대적인 해석권을 부여하여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아래로 끌어 내리던 시대였기 때문에 성경이 신학의 절대적인 원리로서 거의 유일한 것처럼 강조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인문주의,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 자체는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고 그 텍스트를 푸는 주체로서 인간에게 해석의 열쇠가 넘어간 것처럼 간주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라는 물리적인 대상에 국한되지 않고 피조물 전체를 고려한 인식의 보다 정교한 원리를 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정교함을 기하면서 논하자면, 하나님의 진리를 인식하는 원리는 외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주도적인 조명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그 둘이 합류하는 성도의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 위하여 성경 텍스트에 접근한다 할지라도 진리의 영이시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성령께서 하늘의 거룩한 빛으로 밝히시고 인도하지 않으시면 그런 접근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정도의 일반적인 은총에만 머물고 말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고, 재능과 모략의 신이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신이신 성령의 은혜로운 조명이 없이도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읽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추론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다고 하는 순간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수정된 하나의 세포가 자라서 성인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한 사람의 일대기는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도 불가능한 신비로 충만하여 그렇게 긴 시간동안 참으로 탁월한 지성들이 인생의 비밀을 벗기려고 희귀한 천재성의 최대치를 발휘해 왔지만 여전히 인생은 신비의 베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경험하고 일평생 고민하고 숙고한 인생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두텁고 심오한 신비로 둘러싸여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1) 진리를 사랑하는 지혜와, 2) 밝히 이해하는 명철과, 3) 그 이해에 이르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관찰, 숙고, 분석, 비교, 대조, 유추, 논의, 통합이란 재능들과, 4)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과, 5) 지식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연합의 경험으로 아는 것과, 6)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소유하는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산출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의 주체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신비로운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 해석학에 깊이 관여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이러한 성령의 비가시적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무시하고 마치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조명 없이도 성경이 풀어지고 이해되는 독자 의존적인 해석학을 주장하는 것은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방위적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의 공로를 가까운 가시적 원인으로 인간에게 돌리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몰지각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신학의 존재론적 원리라고 할 때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theologia nostra)은 하나님의 자기지식 '신학'과는 달리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자체가 원리나 목적이 되는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 근원와 원인과 목적을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신학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라는 기준을 따라 사려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부로 구분되나 피조물에 대하여는 언제나 특정한 위격만이 사려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들과 존재방식 모두가 포괄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의 원리로 간주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신학적 교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원리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실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모든 교리적 진리를 존재하게 만드신 저자시며 그 모든 교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신학이 주석과 교리와 변증과 실천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 원리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적인 고려와 위격적인 고려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성경으로 계시하신 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며 의논, 작정, 예정, 창조, 섭리, 구원 등등의 일들도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도 성경의 의미를 성육신한 성자라는 한 위격에만 국한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파괴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나 그리스도 예수는 비록 능동적인 의지를 따라서도 오셨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의논을 따라 작정되신 대로 오셨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요7:16)’으로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씀하신 것이며,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들도 아버지가 명하시고 보여주신 대로 행하신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을 본 자들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친히 말씀하고 계시다는 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만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de kern van het christelijk geloof)이며 모든 교리들의 뿌리(de wortel aller dogmata)이기 때문에 기독교 전체, 즉 특별계시 전체(het gansche Christendom, de geheele bijzondere openbaring)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존립(staat en valt)이 좌우되고 있다는 바빙크의 생각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연적인 것이며 도구적인 것이라는 말 때문에 ‘오직성경(sola scriptura)’ 개념에 도전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빚어질 수 있어 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기 원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 특별히 폴라누스 경우에 성경을 인식의 원리로 여겼던 이유는 그 성경이 우리 신학의 가깝고 즉각적인 유효적 원인이요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이 증거되고 있으며, 모든 신학적 교리들이 녹아 수렴되는 첫째가는 하나의 필연적인 전체적 원리로서 ‘하나님이 가라사대(Deus Dixit)’ 원리가 모든 선지자들 및 사도들이 우리로 하여금 돌아가길 원하는 궁극적인 지점임을 모든 성경을 통하여 증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Deus dixit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마코비우스(Johannes Maccovius)와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는 우리 신학의 외적인 인식론적 원리로 여겨지는 성경을 내적인 원리(principium internum)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하는 하나님(Deus dixit)이 인간의 능력과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계시하지 않으시면 그분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계시한 성경은 우리의 본성과 머리에 적응하여 주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학의 원리지만 우연적인 것이며 Deus dixit에 이르게 하는 도구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Deus dixit 개념의 폴라누스 선행자로 버미글리 및 부써는 신학이 Deus dixit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원리라고 했습니다.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도 Deus dixit을 신학에 있어서 최상의 논증(summa demonstratio)이라 했습니다. 바빙크도 Deus dixit은 모든 신학적 교리들을 산출하는 원리이며 모든 신학적 논쟁의 종결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Deus dixit)’는 것보다 더 높고 확실한 권세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신학의 원리이며 이로써 종교 개혁자들 및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인간의 이성이나 다른 어떤 학문적 성과가 아무리 탁월하고 높은 보편성과 천재성을 담보하고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권위를 그것에 양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교회의 제도적인 대표성을 가진 인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두렵고 떨어야 하며 그 말씀의 권위를 수종드는 자로서의 신분을 떠나거나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할 로마의 관원들과 당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여겨지는 대제사장, 서기관들 및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이는 Deus dixit의 의미와 중요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며, 땅의 어떠한 권위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고 궁극적인 권위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삶의 모든 원리과 규범은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온 말씀 안에서만 찾아져야 된다는 것과 인간의 모든 지식과 판단과 합의와 결론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의해서 검증되고 수정되고 판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기독교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사람의 증거를 취하지 않으시고(요5:34) 두 세 증인을 요구하는 모세의 법을 존중하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한다(요8:18).’ 신학의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졌으며 다른 어떤 외적인 상위 권위도 없다는 것을 뜻이며,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선포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이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예수님 자신을 포함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 신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발성과 명령을 따라 자기를 이 땅으로 보내신 그 ‘아버지’를 증인으로 세운 것은 단순히 복음의 진리가 인간 예수 개인에 의해 스스로를 위하여 증거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선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 자신이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증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신학의 원리는 존재의 원리(principium essendi theologiae)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식의 내적인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interna theologiae)로서 성령의 내적인 조명과 인식의 외적인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externa theologiae)로서 성경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스스로를 계시하신 그 성경 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믿음(principium cognoscendi instrumentalis theologiae)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구분된 신학의 원리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원리를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Deus Dixit! 이것은 하나님과 성경과 믿음과 성령의 조명이 다 포괄되어 있는 것으로서 신학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과 삶 전체에 대해서도 온 세상에서 최고의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원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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