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일요일

신학의 원리 5: 성경의 속성들 1


성경이 단순한 문자 덩어리나 텍스트가 아니라 신적인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가장 확실하고 판명한 계시이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것들보다 더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되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은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성경의 구체적인 신적 속성들을 알고 숙지하고 성경해석 및 신학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마치 말씀의 수호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경건한 환각제’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의 속성들 중에는 자율성과 적응성과 완전성과 충분성과 종결성과 영감성과 무오성과 판명성 등이 있지만 계시의 주체로서 하나님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 성경의 속성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성경의 각 구절들은 바르게 해석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스스로 계시하신 것입니다(Deus se nobis patefacit). 여기서 우리는 계시의 자발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즉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의 지으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롬1:20)’는 바울의 증언은 우리에게 창조가 하나님의 첫번째 계시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심심해서 혹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대화 파트너가 필요해서 혹은 본성의 필연적인 원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창조는 외적인 이유나 압력이나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전적으로 자유롭게 행하여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충만이 주체할 수 없어 흘러나온 유출(emanation)이나 확산(diffusion)도 아닙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로서 스스로 행하시되 명하시는 명령의 방식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창조라는 계시의 방식과 그 안에 담긴 계시의 내용은 아담과 하와가 원하였던 방식이 아니고 그들이 알기를 원하였던 내용도 아니며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그들에게 알리기 원하셨던 방식이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결코 알려지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계시를 의도하신 한에서만 알려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알리시기 원하지 않는 내용들은 결코 알려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계시의 내용을 계시의 대상에게 전달하되 어떠한 상의나 요청이나 조건을 따르지 않고 계시자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와 뜻을 따라서 전달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물과 역사를 대할 때에 우리의 호기심과 물음을 따라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불과 물과 흙과 공기와 수와 모나드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자신을 위해 그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파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인간적인 것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초래된 불가피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기를 원하시고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찾고 구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그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창조의 계시와 동일하나 하나님이 친히 말씀을 하신다(Deus dixit)는 독특한 방식과 내용의 상세함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과 창조의 연관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성경의 계시가 창조의 계시에 기초하고 있으며 동시에 창조의 계시를 완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의 질서라는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전개되며 또한 창조의 계시는 말씀을 통해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선순환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1장이 잘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는 계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출생과 삶과 죽음이란 지극히 일상적인 창조의 질서를 따라 계시의 종결자가 되셨기 때문에 성경과 창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계시는 비록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방식이며 하나님이 계시하기 원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호기심을 풀어주고 사변적인 물음에 답변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리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교회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교회의 권위로 말미암아 성경이 계시로 인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창조의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삼으시되 하나님이 친히 계시와 영감으로 만드신 것이며 성경의 권위는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도 인간적인 목적과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과 명시하신 방법을 따라 진리의 영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방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영이시며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는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외에 다른 어떤 이에게도 결코 알려질 수 없으며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에 압도되지 않도록 우리의 제한적인 지각에 스스로를 적응시켜(Deus se ad modulum nostrum accommodavit, ne mentes nostras immensitate suae gloriae absorbeat)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자연과 성경의 방식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적응계시 개념은 비록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Johannes Kepler)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의 적응적인 성격을 강조할 때 도입한 것이지만 그것은 종교 개혁자들 및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크리소스톰 같은 교부들도 주장했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는 성경이 인간의 오류에도 적응되어 무오할 수 있다며 성경의 무오성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적응계시 이론을 동원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이 이론에 짙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천지와 그 사이의 만물을 창조하신 것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자신을 알리시는 적응적 계시이며, 우리의 언어와 표현을 사용하여 기록하신 성경도 우리에게 적응하신 계시라는 사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창조물도 우리는 그것의 있는 그대로를 보거나 알 수 없습니다. 빛이나 입자 방식의 중계나 번역이 없이는 지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물이 지각되는 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적응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우리의 본성적 지각을 벗어난 하나님은 더더욱 우리의 우둔한 머리에 적응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그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적응계시 중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은 죄 이외에는 우리와 한결 같이 동일하실 정도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최대의 적응이며 그런 적응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 지식의 최고점인 동시에 한계선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종국에 우리가 하늘에 속한 형체를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마지막 적응의 형태가 될 것입니다.

적응계시 이론과 관련하여, 인간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성경이 적응된 것이라면 성경도 인간이 가진 모든 제한성과 부패성과 죄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과 의심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경이 인간의 불완전에 적응된 계시지만 성경의 계시 자체는 결코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인간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사랑하고 계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 당신이 의도하신 내용을 의도하신 방법대로 의도하신 분량만큼 계시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성경은 어떠한 모자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무엇보다 하나님 편에서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도달하기 원하는 결론이나 디테일에 성경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성경을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이 보기에는 인간이 원하는 내용과 원하는 방식과 원하는 차원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불완전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편에서의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서는 평가될 수 없는 책입니다. 다른 만물들도 그렇듯이 성경도 하나님의 자발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식과 방향과 목적을 따라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는 책입니다. 인간 중심성을 포기하는 자기부인 없이는 성경을 펼쳐도 종이와 잉크의 혼합물일 뿐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스스로 증거하고 있기에 성경은 자체의 주석(scriptur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이 된다는 성경의 자체 가신성은 성경 자체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원리이며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되 마치 논의나 논증을 통하여 도달하는 결론이 아닌 일방적인 계시를 대하듯이 진리의 영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이런 자세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숙지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확신은 구원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고 성령의 조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믿음 이외의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어 보입니다.

성경의 오류 불가능성(infallibility) 및 무오성(inerrancy)도 이와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 교리는 성경의 권위가 전통이나 교회와 같은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보다 높다는 것을 설명하고 변증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으로 16세기 칼빈의 경우에는 성경의 무오성이 성경의 무오한 원본과 이후의 다른 여러 사본들 사이의 차이에 기초하여 논의되지 않습니다. 칼빈은 비록 사본 텍스트의 실수와 변경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이 선지자들 및 사도들을 수단으로 삼아 교회에 실패할 수 없는 믿음의 규범을 주셨다고 확고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순이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성경이 인간의 연약한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가르치고 있는데 하나님은 참되시며 그의 말씀도 진실하기 때문에 성경도 참되며 인간을 기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진정한 믿음은 성경에 증거된 모든 것들을 믿는 것이며 성경에서 도출되지 않은 어떠한 것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는 어떠한 것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7세기의 에드워드 레이(Edward Leigh)는 성경의 무오성을 논하되 인간적인 기준이 작용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성경의 진리가 1) 인간의 어떠한 지각적 진리보다 탁월하고 2) 모든 자연적 이성보다 뛰어나며 3) 자증적인 진리이며 4) 모든 진리의 규범이 되기 때문에 이것에 동의되지 않는 어떤한 교리나 경배도 진리일 수 없다는 입장을 펼칩니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의장 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e)의 견해에 따르면, 참된 진리가 논증될 수 있다(true knowledge is demonstrable)는 주장이 자연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타당하나 하나님의 말씀에만 기초하는 기독교적 진리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어떤 것을 증명하는 것은 ‘논증(demonstration)’으로 불리울 수 없다고 트위스는 말합니다.

제네바 신학자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현존하는 사본 텍스트에 기계적인 결함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은 하면서도 그것을 교리적 논의의 대상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사본들은 스펠링과 구두점에 있어서 불규칙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문 독법들(variant readings)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필사자의 부주의 때문에 때때로 발생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기호로서 가리키고 있는 의미의 실체에는 결코 오류나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성경 텍스트는 원본의 고유한 의미를 결코 상실하지 않았으며 비록 난해한 구절들은 있지만 우주적 결함(menda universalia)은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무오성 논의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무오성의 의미가 틀리다/맞다에 관한 것인지, 바르다/그르다에 관한 것인지, 무엇에 대하여 틀리다/맞다인지, 무엇에 대하여 바르다/그르다에 대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틀리다 혹은 그르다는 언어는 그 양상이 형용사든 동사든 양심과 관계하는 고도의 인간 문화적인 말이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논하는 기준 개념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기록된 성경은 폐하여질 수 없다’는 말이든지 마태복음 5장 18절의 ‘결단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전해지는 어감처럼 무오성은 인간의 지적인 판단이나 과학적인 기준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신뢰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시누스 학자들과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각을 세웠던 호른벡(Johannes Hoornbecke)은 성경의 무오성을 옹호하며 성경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세부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성령 하나님은 그의 필사자(amanuenses)를 오류에서 벗어나게 하셨으며 항상 모든 것에 있어서(semper et in omnibus) 가장 확실하고 변함이 없고 항구적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시편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며 여호와의 말씀은 흠이 없이 순수하며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며 여호와의 증거는 진실하며 여호와의 명령은 순결하고 바르다는 시편 기자의 말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오류나 거짓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무오성은 말씀에 대한 이러한 신뢰에 대한 것이지 사실과의 일치나 차이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보기에 사실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진술이라 할지라도 칸트의 선험적 가상의 오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한 것도 무오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도 ‘무오’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은 인간의 구원과 성령의 역사와 확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확신시켜 주기 전에는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어떠한 확신도 있을 수 없다(verbum ipsum non valde certum nobis esse nisi Spiritus testimonio confirmetur)는 칼빈의 견해에 비추어 본다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는 것은 무한한 신비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