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시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산물이요 비록 성경을 기록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인간이며 당연히 인간적인 약점과 오류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일면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적 역사적 문헌(ein menschlich geschichtliches Dokument)으로 여기고 인간이 가진 제한적인 언어와 제한적인 문화와 제한적인 상황과 제한적인 경향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경 기록자의 인간적인 상대성, 조건성, 유한성을 벗겨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바르트 식의 결론과 타협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닙니다. 이런 귀결은 성경의 신적인 속성과 무오성이 근거하는 성령의 영감을 부인한 필연적 결과일 뿐입니다. 또한 이와는 달리 성경을 하나님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과도한 ‘성경숭배’ 행위도 건강한 대안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도록 계시하신 특별한 방식이며 또한 그 자체로서 무오한 계시의 책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성경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사중적 인과론(유효적, 형식적, 질료적, 목적적 원인)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고마루스 진술에 따르면, 성경의 유효적 원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경의 저자(auctor)요 다른 하나는 그 저자의 종(ministri illius)입니다. 당연히 저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며 종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진리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문자로 기록하고 교회의 보편적인 선을 위해 가르칠 수 있도록 인도함을 받은 자들이라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보나벤처 표현을 빌리자면, 성경은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거룩한 계시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나머지 세 가지의 원인에 대해서는 트렐카티우스의 진술이 좋습니다. 그에 의하면, 성경의 질료적 원인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시되고 우리의 능력을 따라 전달되고 기록된 신적인 실체를 뜻합니다.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 성경의 고유한 주제이며 질료가 되신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신적인 실체보다 주로 신적인 속성들과 관련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진술들과 선언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성경의 형식적 원인이 둘인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답니다. 내적인 것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 및 그 진리의 각 부분과 정확히 조율되어 있다는 것이고, 외적인 것이란 성경의 절묘한 언어를 일컫는 말인데 그런 언어로 인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말씀하신 분의 위엄에 부합하고, 선포된 말씀의 본성에 부합하고, 그 말씀이 선포된 대상의 상태에 부합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목적적 원인도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둘째는 택자들의 구원이라 말합니다.
사중적인 인과율을 성경의 무오성 문제를 푸는 분석의 틀로 취한다면 ‘무오성’ 개념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중적 인과율로 본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시고 인간은 그의 수종적인 기록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되 인간이 알 수 있도록 계시되어 있으며, 성경은 진리로 조율되어 있고 최적의 언어와 문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어떠한 오류와 모순도 없습니다. 성경은 비록 문자와 문헌의 형식을 옷입고 있지만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적이고 영원한 진리이며 온 인류와 역사와 만물의 시작과 본질과 관계와 목적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내고 있으며 세월의 풍상과 인간의 사악함도 없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보존되어 온 책입니다.
제롬은 성경에 대한 무지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무지와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실로 성경은 마치 예수님의 성육신과 같습니다. 완전한 하나님 자신이며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나시고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따라 먹으시고 걸으시고 입으시고 주무시고 피곤해 하셨지만 한 순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 적이 없으시고 어떠한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곳이 없으시며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늘 그대로 계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앙상한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볼품도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흠모한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분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아 싫어버린 바 되셨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의 길을 걸으셔야 했던 분입니다. 나아가 이사야는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뾰족한 지적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성경도 플라톤의 장엄한 체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살인적인 정교함와 과학의 엄밀한 검증성와 삶의 찰진 현실성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저자도 불분명한 문자 조각들을 긁어 모으되 언뜻 보기에는 개념 없이 조립한 상상의 괴물 텍스트일 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고 별 희한한 잡동사니 글들이 조잡하게 짜집기 된 누더기 문서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적인 냄새가 풀풀 나고 설혹 지성인이 지문도 묻히기를 꺼려하는 하류층의 잡서로 오해하고 고의로 왜곡한다 할지라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길 중단한 적이 한번도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구석이 한군데도 없도록 영원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은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특정한 계층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원래가 믿음이 없이는 읽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도록 기록되어 있는 ‘거룩한 혼돈’의 책입니다. 성령의 은혜로운 조명이 없이는 눈에 차지도 않는 ‘초라한 몰골’을 가진 책입니다. 그래서 질고를 겪습니다. 무시와 멸시를 당합니다. 성경의 이러한 대우는 마치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과도 같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만이 이런 무례한 대우의 주체가 아닙니다. 이사야가 자성의 목소리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도 세상의 풍조에 편승하여 성경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비록 생존과 채면을 위해 주변 이목들에 부응하고 양심의 가책을 적당히 달랠 목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가르치는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막상 타인의 시선이 미칠 수 없는 깊고 은밀한 중심에선 야비한 조소로 성경을 조롱하는 자들이 우리들 중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 개념을 어떤 틀로 이해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명제의 수용 문제가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성경의 신적인 절대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본이나 이문이나 시공간적 불일치 문제나 명칭의 문제로 성경의 무오성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상대적인 차원으로 밀어내는 논법에 말려들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성경의 무오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면 어떻게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정직하고 면밀하게 성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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