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일 일요일

징계를 인내하라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7)

징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지적한 말씀이다. 징계는 하나님이 아들로 우리를 대우하는 것이기에 참으란다. 참을 때에 징계의 고난은 연단이 되기에 참으란다. 아들을 고난으로 연단하는 이는 아버지다. 그런 연단과 훈련이 없다면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징계하는 분은 공포의 아버지가 아니다. 징계의 채찍을 든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 법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고통의 농도는 짙어진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 고통의 농도도 측량을 불허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성자의 반열에 곧장 등극하는 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들은 서서히 성장한다. 그런 성화의 필수품은 징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를 가리키기 위해 헬라어 "παιδεία"를 사용한다. 교육이나 훈련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징계는 파괴를 겨냥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가 밝혔듯이 거룩에의 참여를 돕기 위해서다. 즉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다. 물론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가 않다. 그러나 징계로 연단된 사람은 의의 평온한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각자가 풍기는 고유한 향기를 경험한다. 그들 중에는 시기심이 생길 정도의 안정된 의가 느껴지는 도전적인 분들도 있다. 처음에는 부요한 가정에서 좋은 부모 밑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삶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면 연단의 결과라는 사실이 금새 확인된다. 인간은 원래 미련하다. 이것을 지혜자는 아이들의 마음에 미련함이 있다는 말로 묘사한다. 훈련이 없으면 죽는다고 말하고 우매의 충만 속에서 길을 잃는다고 단언한다.

징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인내이다. 우리를 아들로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의 증거이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즐겁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을 뒤덮은 미련함이 벗겨지고 삶에 박힌 우매함이 제거되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된다. 성화는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아들의 신분 재확인과 거룩에의 참여와 의의 평강한 열매라는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스런 징계와 연단은 과연 경한 것이겠다. 그리고 고통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다. 지나간다.

본문에서 이런 의미도 생각해야 한다. 징계는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이 없이는 파괴의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징계는 분명히 부모의 몫이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이 없는 분노의 출구로 동원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사도 학생을 징계해야 하겠으나 부모의 사랑으로 그리해야 한다. 학생의 파괴가 아니라 변화와 성장을 원한다면 아비의 심정으로 눈물이 묻은 사랑의 채찍을 사용해야 한다. 목회자도 동일하다. 성도를 권징해야 한다. 그러나 재판관의 차가운 판결이 아니라 아비의 마음으로 파괴가 아니라 성화의 방편으로 그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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