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1일 일요일

형통의 비결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할 것이라 (수1:8)

평탄과 형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최고의 비법이 모두에게 목마르다. 이런 막대한 수요에 걸맞게 다양한 비법 공급자의 과잉이 일어난다. 개인의 형통이든 교회의 형통이든 만사형통 약속하는 기발하고 깜찍한 이벤트와 세미나가 곳곳에서 정신을 못차리게 할 정도다.

형통에도 격이라는 게 있다. 여호수아 서두에 등장하는 형통의 비법은 개인의 잘먹고 잘사는 삶, 교회의 금전적 수적 부흥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각자의 기호에 따라 설정된 형통의 개념은 지우시라. 성경의 형통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형통을 뜻한다.

이러한 형통과 어울리는 비법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방식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입술로 늘 읊조리며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의 기록된 그대로를 다 지켜 행하는 것이 비법이기 때문이다. 창조 이래로 한번도 변하지 않았던 비법이다.

언뜻 보기에는 형통하는 주체가 여호수아 자신으로 지목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도자는 언제든지 섬기는 무리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형통을 특정한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지도자의 신분과 본분에 무지한 자들의 얄팍한 묵상이고 그러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자의 어법이다.

가장은 가족 구성원 전체를, 목회자는 교회 전체를, 국가의 지도자는 국민 전체를 자아의 연장으로 생각해야 한다. 공동체의 형통이 나의 형통이고, 공동체의 아픔은 또한 나의 아픔이며, 공동체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이며, 공동체의 잘못은 나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억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이러한 공동체적 책임이 어깨에 맡겨진 것은 그 자체로도 영광이다. 여기서 천국의 열쇠권을 적용하면 하늘에 대한 공동체의 닫힘은 나의 책임이고 공동체의 열림은 나의 사명이란 수종자의 책임있는 의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어깨에 걸린 책임의 막중한 무게는 무게의 크기만큼 큰 영광이다. 그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준수함에 있어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호기심을 자극하고 의식을 결박하는 이슈들이 유혹의 촉수를 내밀어도 말이다.

형통의 성경적인 개념 정립도 필요하고 그 개념에 걸맞은 비법의 인지와 수호도 동일하게 중요하고 공동체적 형통과 책임을 의식하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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