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8일 금요일

고난도 유익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119:71)

시인은 고난 당하는 것 자체를 유익이라 하지 않았다. 고난을 유익이라 한 시인의 이유는 고난으로 인해 주님의 율법을 깨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말씀의 깨달음이 고난보다 낫다는 가치관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주의 입술에서 나오는 법은 천천의 금은보다 좋다고도 하였다. 오늘날 교회가 들으면 심히 거북하고 까무라칠 가치의 틀이겠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시인도 어리석게 살았으나 고난 이후에는 계명의 뜻과 힘을 깨달아 순종하게 되었단다. 물론 고난이 삶의 불편과 시간의 낭비와 마음의 내상만 남긴다면 그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당연히 맹목적 고행은 우리의 지향할 바가 아니겠다. 다만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는 게 고난조차 유익으로 만드는 상책이다.

고난은 내가 원하는 소원에 역행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내가 좋아하는 기호에 거슬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기호와 소원이 외면되는 현실을 달가워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언어와 행실에 방향을 부여하는 그 기호와 소원이 거절되면 비로소 보이는 의미와 방향이 있다. 그것을 제공하는 샘이 바로 하나님의 율례이다.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힘든 것은 대체로 기호와 소원의 거절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결코 거절되지 못할 기호와 소원을 붙들면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힘든 일도 없어질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시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든 일들을 성취하고 마시기에 거절될 일이 없는 하나님의 소원을 붙드는 건 최상의 지혜겠다.

시인의 경험을 보면 하나님의 기호와 소원은 주로 우리의 기호와 소원이 향방을 잃을 때에 포착되는 듯하다. 우리의 경험도 이를 지지한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끊으려고 온갖 출처모를 고난을 동원하나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깨달음의 계기로 바꾸시는 선을 이루신다. 고난 이전에는 주님의 선하심이 주어져도 깨닫지를 못하다가 고난으로 비로소 깨닫는다.

고난은 인기척도 없이 원인을 감추면서 슬그머니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갑절의 분노가 격발한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는 계기는 그 원인의 디테일이 가려져 있어도 중요성이 삭감되는 것은 아니다. 시련을 만나거든 거절의 격한 손사레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야고보의 권면으로 반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가장 놀라운 승리이다. 고난도 유익으로 이해하고 처신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릴 뾰족한 묘안은 어디에도 없다. 죽음도 유익이라 하는데 아무리 간교한 사탄인들 어찌 우리를 실족케 할 재간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법을 천천의 금은보다 더 사모하고 고난조차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 자의 향기가 교회에 진동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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