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7일 수요일

자랑하지 마라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잠27:1)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 내일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일 일어날 일들에 대해 완벽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자랑 금지령의 대상은 모든 사람이다. 그럼 오늘 하루치의 지식은 완전한가? 그렇지도 않다. 하루의 잔여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내일에 대한 무지 수준을 방불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순간에 대한 지식은 어떠한가? 지금 내가 호흡하는 현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유무도 판별하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의 무지는 내일 혹은 미래라는 특정한 시간과만 배타적인 밀착성을 갖지 않고 인생 전체와 결부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염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비록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는 표현이 있어서 당일에 대해서는 염려가 허락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나 사실은 전혀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앞뒤의 인과를 나타내는 "그러므로" 접속사를 주의해서 본다면, 주님께서 하늘을 나는 가냘픈 새도 지키시고 곧장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의 풍전등화 인생도 솔로몬이 입은 영광보다 더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채워 주신다는 사실의 결론으로 염려 금지령이 발부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한다.

하나님을 아는 명철과 회개에 이르는 근심 이외의 자랑이나 염려는 어떠한 경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내일로 대표되는 어떠한 순간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적 손아귀에 있다. 내일을 자랑하지 않고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알고 인정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삶의 합당한 자세이다. 게으르고 불성실한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은사가 닳아서 없어질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되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다.

자랑과 염려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이 궁극적인 원흉으로 있다. 역도 성립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자랑에 중독되고 염려가 인생을 장악하게 된다. 삶의 생리이다.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은 졸부의 행보이다. 그렇다고 자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랑에도 방식이 있다. 지혜자는 자랑을 타인의 몫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의 입술에서 출고된 자랑은 자랑이 아니라 경박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에는 늘 경박이 경외를 대신한다.

부득불한 경우에는 자신의 연약함과 관계된 것들을 자랑하면 된다. 그러한 바울처럼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도 논적들이 꼬투리를 잡아 맹공을 퍼부을 빌미의 재료들을 자신의 고백록에 빼곡하게 담았다. 약점과 실수로 얼룩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과하지 않고 저술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를 공개했다. 대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의 대상을 삼을 정도로 큰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이 어디에도 없는 듯하여도 족히 칠천의 규모는 되리라고 믿는다. 그들의 존재로 대한민국 교회는 지탱되고 있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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