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4일 일요일

계시 의존적인 사색

스스로 알 수도 없고 (욥42:3)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다. 스스로 알 수 없다는 자력적인 인식의 한계는 지성사의 축을 뒤흔드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무수한 지성들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여 내뱉은 모든 언사의 질이 이 개념으로 가늠된다.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알려진 모든 지식들의 실상은 진정한 사실에 이르지도 않았고 올바른 진리를 담아낸 것도 아니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욥은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의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지 않았다. 즉 만물과 만사가 대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알 수 없는데도 지금까지 인류가 배설한 언어와 지식의 분량은 수천의 산더미를 이룬다. 이러한 분량이 사물의 이치를 가리우고 올바른 진리의 숨통을 틀어막는 무지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 심각성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겠다.

욥은 동방의 으뜸가는 의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그의 출중함을 능가하는 이가 없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모든 말과 지식이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들의 이치를 가리는 무지한 언사란다. 그리고 이치를 드러내고 전달하는 말과 지식의 출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분께 묻겠단다.

욥의 경건이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지나 이르른 지점은 바로 계시 의존적인 사색이다. 하나님 자신이 건내신 물음들 앞에서 욥은 천에 하나라도 답하지 못하였다. 주께서 던지신 물음의 난해함도 답변의 입술을 함부로 벌리지 못하게 하였지만 답변의 질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아시는 답변의 수준에 이르지를 못하기에 욥의 묵묵부답 반응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계시 의존적인 사색에서 진정한 하나님 신뢰가 가능하다.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인간의 하나님 의존성은 어떠한 종류이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스스로를 속이는 가식으로 변질되고 만다. 욥의 역동적인 삶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인생의 호흡도 하나님께 달렸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삶도 전적으로 구분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욥의 결론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지고 이치를 가리우는 인간의 자력적인 지식의 한계와 무례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나 자신이 이러한 무례의 원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나를 더더욱 오싹하게 만든다. 인류의, 아니 나 자신의 오만을 꾸짓고 교만의 목을 꺾는,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고 최상의 의미를 부여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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