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2일 화요일

징계와의 화친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잠12:1)

여기서 징계는 강한 책망과 거절의 언사를 의미하고 때때로 수정을 위해 처벌도 수반하는 개념이다. 징계를 싫어하는 마음의 배후에는 대체로 교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나는 고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완전주의 교만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짐승의 징표란다.

짐승은 자신의 본성을 수정하지 않는다. 불변의 본성을 따라 생각하고 움직이며 일평생 살아간다. 당연히 짐승에게 징계는 소귀에 경읽기다. 어떠한 변화나 수정도 기대할 수 없다. 짐승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갖는다는 게 어리석은 자세겠다.

그런데 징계의 거부는 금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라는 건 상식이다. 우리 안에서도 뾰족한 지적의 목소리가 고막을 살짝만 건드려도 곧장 격렬한 불쾌와 보복의 이빨을 드러낸다.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짐승의 본성이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변하지 않는 사람과 종종 마주친다. 좋은 것들은 한결 같을수록 좋다. 그러나 죄인의 관념과 습성에 가공할 천착을 보이는 불변의 사람들은 혹시 어리석은 짐승에 가깝지는 않은지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성찰의 눈으로 나 자신을 수시로 돌아보게 된다.

한 사람이 바뀌는 건 기적이다. 한 가정의 변화도 기적이다. 교회의 변화, 사회의 변화, 국가의 변화, 세계의 변화도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다. 대부분의 사람이 징계를 싫어하고 수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칭찬과 고수가 본성적인 기호이다.

이와는 달리 수정과 변화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사랑하는 자라고 지혜자는 규정한다. 나는 불완전한 자이고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자이고 배운 바가 내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복이라고 믿고 주를 향하여 나날이 자라가는 자가 지혜자다.

변화는 익숙하던 것들과의 이별과 생소하던 것들에의 적응을 요구한다. 당연히 거북하고 불편하다. 그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접으시라. 오늘은 나 자신에게 징계와의 화친을 권하였다. 짐승은 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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