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동성애 강연을 듣다

동성애자 연사의 거침없는 강연을 들었다.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에서 거론되는 담론들의 구체적인 논지들과 키워드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강연의 핵심은 동성애적 성향 혹은 끌림을 가진 사람들을 '사람'(person)으로 대우해 달라는 것이었다.

신학적 입장의 일치와 불일치 여부에 앞서서 사랑과 은혜가 선행되면 좋겠다는 호소였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는 '허울좋은 구호'보다 자신의 죄는 미워하되 다른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는 태도가 예수님의 의도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단다.

강연은 구구절절 청중들의 공감과 동의를 촉구하는 엄선된 멘트들로 가득했다. 일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까지 밝혔다. 강연자는 연구도 많이하고 고민도 많이하고 기도도 많이하고 대화도 많이하고 집필도 많이하고 강연도 많이한 분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은 동성애의 외적 행위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동성애적 끌림(homosexual attraction)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절규해도 효험이 없었고 지금까지 그 끌림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적 성향이 자신을 좌우하진 못한단다.

울림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의 호소가 있다. 정말 동성애로 고민하고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정죄와 격리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진정으로 돕고자 한다면 사랑이란 가장 강력하고 효력적인 방법 외에는 어떠한 접근법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었다.

나의 깨달음은 1) 무엇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사실과, 2) 대화가 진리를 생산하는 수단은 아니라는 것과, 3) 사랑과 이해와 포용이 있더라도 동성애 자체는 성향이든 끌림이든 묵상이든 행위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죄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 등이다.

권징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올바르게 세우려는 성경적 수단이 권징이기 때문이다. 미소와 포옹과 악수와 칭찬은 문제를 푸는 궁극적인 열쇠가 아니라 사안의 위중함을 가리기도 한다.

성경에서 분명히 죄라고 선언한 것들에 대해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며 괜찮다고 덮어 버리는 것은 사형에 해당할 정도의 심각한 죄라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하는 입장에 가까워 보인다.

언사의 과격성을 이유로 주님보다 더 친절하기 위해 인위적인 마사지를 가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그렇게 과격한 언사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낸 바울의 심경과 그렇게 영감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내며 거기에 기초하여 이해하는 접근법이 보다 타당하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 사랑과 포용과 관용과 친절과 배려와 이해라는 이름으로 동의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부질없는 시도이다. 이는 악인이 서로 손을 잡더라도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지혜자의 통찰에 가벼운 곁눈질만 해 보아도 확인된다.

그래서 연사의 열변이 이해는 되면서도 안타깝고 찹찹한 마음으로 들어야만 했다. 미국에는 동성결혼 합법화의 물살이 거칠다. 최근에는 뉴저지가 그 물살에 휩쓸렸다. 자유와 평등의 구현이란 자부심과 호평을 얻는 댓가로 진리의 빛에서는 한발짝 멀어졌다.

세상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사랑과 포용이다. 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복이라고 생각되는 우리의 절박한 필요를 채우셨다.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그러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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