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일 화요일

기쁨의 대상이 중요하다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잠1:22)

기쁨이란 코드의 일치에서 유발된다. 어떤 사람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대상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 코드가 확인된다. 일례로, 뱃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별식과 같이 쫄깃한 험담을 즐기는 사람은 대체로 친한 벗까지도 이간한다. 그런데도 즐거우니 중단하지 아니한다.

기쁨은 행위의 방향이다. 거만한 자들은 생각과 말과 행실이 거만을 지향한다. 이유는 거기에 즐거움이 있어서다. 그들의 거만은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항구적인 성향이다. 언어 몇 토막과 행위 몇 조각을 고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일그러진 기쁨을 제거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기쁨의 대상을 지향하고 향유하려 한다. 소요리 문답이 또 떠오른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항구적인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거. 시인은 이따금씩 '여호와는 내 기쁨'이란 고백을 내뱉는다. 바울은 확대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나의 기쁨'이라 칭하였다.

기쁨의 대상이 어떤 것이냐가 실력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우매함을 좋아하고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고 미련한 자들은 무지가 무슨 영광의 면류관인 줄 안다. 지혜가 부르지만 싫어하고 기회의 손을 뻗어도 돌아보지 않는단다. 지혜의 영을 부었어도 거절한다.

이런 자들에게 지혜자는 재앙이 폭풍처럼, 두려움이 광풍처럼, 근심과 슬픔이 홍수처럼 임할 것이란다. 여호와 경외를 싫어하고 그의 교훈과 책망을 경시한 결과란다. 그런데도 자신이 기뻐한 대상은 돌아보지 않고 밖의 원인에 대한 푸념과 불평 쏟아내는 데만 골몰한다.

하나님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귀한 상급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한 믿음의 조상과 모세의 판단이 지금도 요청된다. 의인들은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그의 거룩을 기념하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그런 믿음의 선수들이 곳곳에 있다. 부럽고 향기롭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해답이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이 해답이다. 다른 게 즐거우면 거기에 중독된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신 하나님께 시인처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 기쁨의 체질을 바꾸어 주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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