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 (롬9:18)
바울은 가슴이 아프다. 골육의 친척이 주님을 떠나서다. 이스라엘 출신이 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리고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언급한다. 바울의 성경 해석이 깊고 특이하다.
바울은 약속을 따라 난 창세기 인물들의 계보를 언급하되 특별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 하나님의 '구별'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대체로 상식의 꼭지가 돌아가고 곧장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라는 반응이 쏟아진다. 이런 반응으로 바울을 비방하던 사람들은 바울이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는 낭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며 바울을 코너로 내몰았다.
허나 신학적 궁지에서 진리는 더욱 번뜩이는 법 아니던가. 본문을 비롯하여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고 설명이고 바울이 설파하는 교리적 이해의 절정이다. 특별히 11장 끝절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을 강조하는 대목에 이르면 하나님과 영광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됨됨이나 행실은 물론이고 천사들 및 시공간 속에서의 어떠한 피조물과 사태에도 원인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만이 원인으로 있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버리심이 생략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은 사람이 좋아하고 사람에 의해 다듬어진 개념을 담는 화려한 언어적 장신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의 최종적인 목적으로 설정해도 가식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다. 의로운 분의 의지만이 원인으로 있는 행하심은 가장 순전하게 의로우신 행위이다. 거기에 인간의 합의되고 구성된 의의 기준을 섞으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계시된 그대로의 말씀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우리의 기호와 감각과 상식과 판단을 거기에 맡기고 순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만 의존하고 있는 예정,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지,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는 극히 신비로운 하나님의 진리이다. 칼빈의 고백처럼,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없다."
바울은 가슴이 아프다. 골육의 친척이 주님을 떠나서다. 이스라엘 출신이 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리고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언급한다. 바울의 성경 해석이 깊고 특이하다.
바울은 약속을 따라 난 창세기 인물들의 계보를 언급하되 특별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 하나님의 '구별'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대체로 상식의 꼭지가 돌아가고 곧장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라는 반응이 쏟아진다. 이런 반응으로 바울을 비방하던 사람들은 바울이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는 낭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며 바울을 코너로 내몰았다.
허나 신학적 궁지에서 진리는 더욱 번뜩이는 법 아니던가. 본문을 비롯하여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고 설명이고 바울이 설파하는 교리적 이해의 절정이다. 특별히 11장 끝절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을 강조하는 대목에 이르면 하나님과 영광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됨됨이나 행실은 물론이고 천사들 및 시공간 속에서의 어떠한 피조물과 사태에도 원인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만이 원인으로 있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버리심이 생략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은 사람이 좋아하고 사람에 의해 다듬어진 개념을 담는 화려한 언어적 장신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의 최종적인 목적으로 설정해도 가식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다. 의로운 분의 의지만이 원인으로 있는 행하심은 가장 순전하게 의로우신 행위이다. 거기에 인간의 합의되고 구성된 의의 기준을 섞으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계시된 그대로의 말씀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우리의 기호와 감각과 상식과 판단을 거기에 맡기고 순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만 의존하고 있는 예정,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지,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는 극히 신비로운 하나님의 진리이다. 칼빈의 고백처럼,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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