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5일 화요일

믿음의 선배 다윗의 하나님 생각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시23:1)

배가 부르거나 만족하게 되면 감각과 신경이 둔해진다. 분노나 신경질도 더뎌지고 불평과 원망도 머리둘 곳이 없어진다. 좋은 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로이 안락을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망각의 무덤에 매장하는 우도 더불어 범한다는 거다.

칼빈은 시인 다윗이 당시에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절대적인 권력의 보좌에 올랐으며, 부와 존귀의 빼곡한 광휘에 휩싸였고, 현실적인 부의 가장 막대한 분량을 소유했고,  왕족의 즐거움이 극에 달한 시점에 있었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택들을 기억의 수면에 떠올리고 있으며 그것을 사다리로 삼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 칼빈은 감탄사를 격발하고 있다. 부족함이 없는 때인데도 본질을 붙들었다.

다윗은 자신을 양이라고 한다.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규정이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라는 일말의 뻣뻣한 신분의식도 없이 자신을 양으로만 생각한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안식하게 하신 분, 다윗에겐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영혼을 회복하신 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 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관통하는 중에라도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게 만드시는 분, 나를 지팡이와 막대기로 위로하는 분, 원수의 목전에서 나신에게 상을 베푸시는 분, 머리에 기름을 부어 축배의 잔이 넘치게 하시는 분...

다윗의 마음과 기억에는 하나님 뿐이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는 일평생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이란다. 다윗은 지금 뭔가 아쉬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주먹'이나 '동정'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분을 경배하고 있다.

고난의 때에도 슬픔의 때에도 고독의 때에도 배신의 때에도 반역의 때에도 모함의 때에도 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짓던 그 다윗은 평화와 풍요와 안정과 만족과 영광과 안식의 때에도 하나님이 목자라며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기초하여 규정한다.

나는 누구인가? 다윗의 어법에 따르면 양이다. 하나님이 목자시기 때문이다. 이런 규정의 정당성은 인간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 관계성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하나님이 고려되지 않은 어떠한 '나'도 진정한 나일 수 없다. 다윗은 왕이지만 잠시 입은 옷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신분과 복장을 혼돈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망각하지 않아서 가능했다. 감투를 쓰고 업적을 축적하고 유명세가 오르면 사람들은 대체로 본연의 자리를 이탈한다.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기 정체성에 머무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도 망각한다.

다윗의 '양' 정체성은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그의 인도와 돌봄과 보호가 없다면 벼랑으로 떨어지고 이리의 이빨에 뜯기고 광야를 헤매게 된다. 풍요로운 초원과 안전하고 밝은 길과 화목한 밥상과 넘치는 잔은 모두 목자의 일이었다.

다윗은 그것을 지각했고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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