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3일 일요일

높은 기준치 제시는 교회의 책임이다

의식과 관심의 문화화가 선악의 문제는 아니지만 적절한 주의는 필요하다. 문화의 변화에 따라 사람의 의식과 관심도 변해서다. 안다는 것과 아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의 인식론에 있어서도 문화는 변화의 주도적인 인자다. 인식도 문화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면 인식론의 결도 과학만큼 예리하고 정교해야 우리의 의식과 관심도 만족하고 안식에 도달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제도 정밀도가 달라졌다. 물론 오늘날 존재를 가늠하는 수단과 존재의 유무를 판단하는 잣대의 발달은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보는 눈과 듣는 귀의 확장일 뿐 지각으로 인지하는 본질과 방식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의 최첨단 과학으론 사이즈가 10의 마이너스 18승미터 아래로만 내려가도 존재의 상태는 파악되지 않고 존재의 유무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이것이 지금의 유행이다. 

시대마다 문화의 변동을 따라 성경의 객관성과 진정성에 멸시와 조롱의 안다리를 걸고 넘어진 무리들이 늘상 있었다. 문제는 객관성과 진정성을 판단하는 세상적 기준의 미숙과 가변성에 있다. 물론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많은 오류들이 벗겨진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와 권위와 객관을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과학의 판단 기준치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변동될 수 있는 기준치의 가변적인 속성도 문제다. 그러니 판단은 늘 무지의 도착적인 향연일 뿐이라는 이후 세대의 판단에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겠다. 

지나가는 유행성 기준치의 새로운 등장에 열광하고 과장하고 경도되는 것이 섭리의 부분일 수는 있겠으나 불변의 진리를 알고 고수하는 자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아니겠다. 정교한 최첨단 학문의 속성은 극미시와 극거시 세계의 과학적 탐구가 보여준 한계로도 충분하다. 

다양한 분야의 최첨단 무대에서 주름 꽤나 잡는 분들의 성경 부정적인 언사가 때때로 귀에 거슬린다. 성경에 대한 의도적인 거절일 수도 있겠고 스스로가 그들이 가진 저급한 유행성 기준치의 희생물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어떤 경우이든 비판의 마침표는 그분들이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교회가 늘 세상과 역사 전체를 의식하며 제시하고 살아내고 풍겨내야 할 높은 진리의 기준치를 제시하지 못해서다. 사람들이 설득되는 일반적인 기준치 이상의 높은 기준치 제시의 책임은 교회에 있다. 교회가 보여주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기준이 있다.

항상 영원을 의식하고 살아내며 증거해야 할 성경에 입각한 기준치 제시의 과제에 교회가 부응하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우리의 의식과 관심이 깊고 높고 넓고 길지 않으면 안되겠다. 세상의 무딘 기준과 판단의 잣대로도 위협을 느낀다면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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