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אֶחְסָר לֹא רֹעִי יְהוָה)

주석적인 부분

1. 문장의 시제: 히브리어 문법에는 영어나 한국어에 준하는 시제의 구분이 없다. 히브리어 동사는 주로 행위가 끝나지 않았음을 표현하는 미완료형 및 행위의 종결을 나타내는 완료형이 있다. 완료형은 주로 과거나 현재에 이루어진 일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미완료형 경우에는 미래를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고 현재의 지속적인 혹은 습관적인 행위를 위해서도 사용된다. 시편 23편은 완료형이 사용된 5절의 “부으셨다”(שַׁבְתִּי) 및 “살리로다”(דִּשַּׁנְתָּ) 외에는 모든 동사들이 미완료 형태를 가지고 있다. 1절 앞부분의 경우는 “여호와, 나의 목자”로 번역된다. 여기에 시제를 삽입해서 의역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일 것이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모든 시제로의 번역이 가능하다. 어떤 시제가 적합할까? 물론 시제를 강요하지 않아도 해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의미의 명료성을 위해서는 시제가 필요하다. 시제의 결정은 해당되는 본문의 전반적인 문맥을 고려함이 가장 안전하다. 이런 맥락에서 “The Lord is my shepherd”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같이 히브리어 원문에 현재형을 부여한 번역 혹은 해석은 결코 어거지가 아니다. 시편 23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화려한 과거의 안타까운 회고도 아니고 순전한 미래의 막연한 기다림 및 갈망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며 오히려 지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행하시고 계신지를 묘사하고 있어서다. 시인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을 과거의 지나간 사태나 상태로 묘사하지 않고 당연히 과거를 추억하는 회귀적 신앙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낮으며,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것을 먼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이나 소망으로 보지도 않는다. 시인은 과거형과 순수한 미래형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 하여 시인이 선택한 시제는 현재이며 바로 지금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는 후반부 구절과 연관지어 본다면, 현재형이 어떤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모든 ‘현재’에 유효하기 때문에 여호와는 모든 순간마다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조화 혹은 지속적인 현재라고 볼 수 있으며 영원히 변경되지 않을 사실임을 나타낸다.

2. 문장의 유형: 두 가지의 독특성이 돋보인다. 먼저 본문의 유형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면 좋겠다’는 ‘희망’이나, ‘호여와는 나의 목자일 것이라’는 ‘추측’이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아니라, ‘여호와, 나의 목자’라는 너무도 확고한 ‘단언’이다. 이는 시인이 목자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하고 견고함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구절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한 지식의 관념적 확신이 아니라 삶에서 체득된 경험적인 신앙임을 확인한다. 두번째는 문장에 조건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은 무조건적 실재요 은혜이며, 어떤 조건과 그것의 충족으로 인해 주어지는 기계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내가 성취한 공로의 인과적인 결과가 아니기에 나의 무지와 실수와 범법과 연약으로 인해 변경되는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3. 시편의 위치: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것이 비록 우리에게 어떤 근거나 기원을 전혀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색, 무취, 무감, 무정, 맹의, 맹목의 사실(fact)인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에게 뿌리를 둔 사연이 있어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편 23편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시편 23편은 시편 22편 다음에 위치한다. 시편 22편은 소위 십자가의 시편이다. 시편 22편을 지나가지 않으면 푸른 초장도 쉴만한 물가도 나의 목자도 허울이고 만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십자가를 지나야 비로소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이 가능하다. 십자가의 시편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도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명명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들판에서 양을 먹이고 지키고 돌보는 인간목자 개념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이는 시편 23편 3절과 4절에서 잘 확인된다. 3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다윗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셨으며 그를 의의 길로 이끄셨다. 태초에 인류의 조상에게 생기를 주입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도 소생하게 하시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셨으며 의로운 길로의 이끄심도 십자가의 의로운 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신 것이다. 4절에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할지라도 마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양의 피로 인하여 죽음의 기운도 지나갔던 유월절의 역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함께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시편 22시편이 23편에 놓였다는 것은 시편 23편 전체의 재해석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한 줄도 읽어가질 못하는 시편이다.

4. 소유격의 의미(רֹעִי):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른다. 양은 근시안을 가졌기 때문에 양과 목자의 실질적인 관계성을 연결하는 끈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의 청력은 주파수에 예민하여 특정한 음파가 저장되면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러한 독특성 때문에 팔레스틴 목자들은 실제로 양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따라오게 훈련한다. 목자가 앞서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인지하고 뒤따른다. 양에게는 “나의 목자”가 필요하다. 여러 목자를 따르지는 못해서다. 개별적인 양의 목자가 모든 양의 목자일 수 있다. 그러나 양우리의 목자가 나의 목자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양에게는 “나의 목자”가 필요하다. 교회에는 다양한 복수의 목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양은 모두 하나님의 양이고 양들의 목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는 사환이다. 양무리가 있으면 “나의 목자”가 없어도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양들이 앞서가는 양을 뒤따라 움직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하다. 양이 양의 말을 들고 양을 뒤따르면 모두가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함께 몰살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5. 양의 속성: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양의 정체성을 가졌다. 누구의 양이냐가 중요하다. 여호와의 양인가 아니면 소유자가 다른 양인가? 양은 누구인가?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양은 쉽게 두려움에 빠진다, 어리석도, 원수들에 의해 쉽게 죽는다,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무기가 없으며, 최선의 방어는 도망가는 것인데 대단히 느리다, 질투심이 강하다, 언제나 맑은 물과 푸른 초장이 필요하다, 좋은 음식과 깨끗한 물을 잘 선택하지 못한다, 자기 방식대로 행하고자 한다, 언제나 쉴만한 안식처를 찾고자 한다, 깨끗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돌봄이 가장 필요한 가축이다, 모든 필요에 전적으로 목자에게 의존하는 동물이다, 막대기와 지팡이의 지도와 인도가 필요하다,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목자는 각 양에게 이를 부여하고 양들은 자기 이름에 금방 익숙하게 되고 그 이름에 반응한다, 목자나 인도자가 없으면 사방으로 흩어진다, 자기에게 친숙한 사람에 의해 쉽게 이끌린다, 인도자가 앞서가면 양무리는 따라간다, 양무리의 한 마리가 급하게 출발하면 양무리 전체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양의 속성들을 보면서 목자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확인한다.

참고문헌

1. 칼빈의 시편주석
2. 스펄젼의 시편 23편 강해
3. 교부들의 시편주석
4. 존 길의 시편주석

설교원고

1. 사람들은 주리거나 불만이 가득할 경우에 사소한 일에도 분노와 신경질을 폭발하고 대수롭지 않은 잘못이나 실수에도 까칠한 판단을 가하고 무심한 비판을 쏟습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거나 만족하게 되면 감각과 신경이 둔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노하기도 더디하고 왠만큼 불편해도 가쁜하게 견디고 상대방의 잘못에도 너그러운 마음과 넓은 포용력을 갖습니다. 이처럼 부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는 좋은 점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존재마저 망각의 무덤에 매장하는 우도 쉽게 범한다는 것입니다.

2. 시편 23편은 다윗의 어떤 상태에서 작성된 것일까요?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시인 다윗이 당시에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당시 절대적인 권력의 보좌에 올랐으며, 부와 존귀의 빼곡한 광휘에 휩싸였고, 현실적인 부의 가장 막대한 분량을 소유했고, 왕족의 즐거움이 극에 달한 시점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왕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상황에서 작성된 시라는 얘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택들을 기억의 수면에 떠올리고 있으며 그것을 사다리로 삼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감탄사를 격발하고 있습니다.

3. 다윗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때인데도 부를 즐기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본질을 붙들 줄 알았던 왕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을 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규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라는 일말의 뻣뻣한 신분의식 혹은 오만함 없이 자신을 오직 양으로만 생각하는 다윗의 신앙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물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이는 외적인 가치, 즉 재력과 권력과 명성 추구에 혈안이 된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바르게 아는 우선적인 지식이 없이는 어떠한 인생도 허무할 수밖에 없고 영혼만 혼탁하게 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던진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알지 않고서는 이룩한 모든 성취와 쌓은 모든 업적이 모래성과 같을 것입니다. 자기 민족의 이러한 우매함을 깨우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화두를 던졌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길 원하였고 외면적인 가치가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를 추가하는 인생이길 원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인생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너 자신을 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서 안타깝게 인생을 접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런 정체성에 맞도록 살아가는 것은 큰 복입니다.

5.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그러한 복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어떤 사람인지 생각나는 대로 서술해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왕이었고, 부요했고, 강력했고, 백성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았던 자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여러 유력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왕이라는 신분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부요한 재물로도 규정하지 않았으며, 원수를 무찌르는 강력한 힘으로도 규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좋은 평판이나 대우로도 규정하지 않았으며, 어쩌면 자신에게 있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이 규정되는 것을 거절했던 것 같습니다.

6. 대신에 다윗은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어떠함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을 여호와의 양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 ‘너 자신을 알라’는 만인들의 물음에 대해 하나님 의존적인 답변으로 응수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무수한 석학이나 성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성찰하여 스스로 득도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졌다면 아직 진정한 자아를 만나거나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 형상의 본체이신 창조자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리 화려하고 정교하고 고상한 정체성을 오랜 세월동안 터득했다 할지라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한 마디의 올바른 대답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7. 다윗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냐에 의존하여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은 단순히 자신의 정체성만 하나님의 속성에 의존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 의존적인 사유를 했습니다. 시편 23편만 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왕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와 주권을 가지고 푸른 초장을 출입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곳으로 인도하고 안식하게 하신 분이 따로 계시다고 말합니다. 2) 영혼의 소생도 마음과 몸의 컨디션을 잘 조절해서 획득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다윗은 영혼을 일으키는 분이 따로 계시다고 말합니다. 3) 의로운 행보도 자신이 공의의 왕이라고 규정한 명분으로 딱이지만 의로운 행보의 주체가 계시다고 말합니다.

8. 다윗은 자신이 (사례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관통하는 중에라도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골짜기에 무슨 가로등이 어두움을 밝히고 있어서도 아니고 CCTV 카메라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어서도 아니고 자신이 최고의 전사이기 때문도 체질상 두려움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함께하심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환경에 의존하여 반응하는 사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악취가 풍기고 두려움이 엄습하는 캄캄함 속에서도 그런 상황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목자이신 여호와가 영원토록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뇌에서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 사색이 절망적인 현실의 희망찬 재해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모범적인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9. (사례2) 다른 사례를 들자면, 광야에서 식탁을 마련하는 것도 인간 편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대적들은 조롱하며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사실 광야는 식탁에 채워질 음료수와 양식이 땅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식탁을 베풀어 주셨지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상황의 위태함과 장소의 척박함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함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사례3) 또 다른 사례로서 아골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곳은 죽음의 뼉다귀가 나뒹굴고 절망의 악취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모두가 외면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곳이지요. 그런 곳인데도 하나님은 죽음의 골짜기를 역설적인 소망의 출구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여기 저기에서 나 자신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와 처신을 하도록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0. 다윗의 신본주의 사색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경건한 안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명패로 걸린 실질적인 주거지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물리적인 환경의 어떠함에 기초한 고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그 고백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가 자신의 삶을 영원토록 따를 것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더라도, 더위와 추위가 밤낮으로 교차하는 광야를 해맨다고 할지라도, 시체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아골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만 있다면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것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가 자신의 삶을 영원히 뒤따를 것이기에 하나님의 집에 거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11. 다윗은 단순히 과거에 경험된 하나님을 반추하는 회귀적 신앙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문법의 특성상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문구에 확정적인 시제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편 23편 전체에서 주된 동사들이 미완료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 하나님의 정체성과 행위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과 행위가 지금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시편 23편의 전반적인 맥락에 빚대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표현에 시제를 넣는다면 지속적인 현재형 혹은 현재형과 미래형의 조화로운 시제가 최격적일 듯합니다.

12.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지적 관념의 대상으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본문의 유형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면 좋겠다’는 ‘희망’이나 ‘호여와는 나의 목자일 것이라’는 ‘추측’이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아니라 ‘여호와, 나의 목자’라는 너무도 확고한 ‘단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인이 목자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하고 견고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어지는 구절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한 지식의 관념적 확신이 아니라 삶에서 체득된 경험적인 신앙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3. 그리고 문장에 수식어나 조건문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은 무조건적 실재요 어떤 외부에 근거하지 않은 절대적인 은혜이며, 어떤 조건과 그것의 충족으로 인해 보상처럼 주어지는 기계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내가 성취한 공로의 인과적인 결과가 아니기에 나의 무지와 실수와 범법과 연약으로 인해 패하여질 수 있는 가변적인 관계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다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은 목자와 양의 관계성은 나의 실수나 죄로는 결코 패하여질 수 없는 탓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는 죄악에 노출되고 가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함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것인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14. 도대체 목자와 양의 관계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이길래 변경될 수도 없고 끊어질 수도 없는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나의”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을까요?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비록 우리에게 어떤 근거나 기원을 전혀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처도 모르는 맹목적인 사실(fact)인 것만은 아닙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성은 그 뿌리와 기원을 하나님 자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편 23편의 위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시편 22편 다음에 나옵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시편 22편은 소위 십자가의 시편이라 불립니다. 십자가의 시편이 시편 23편 직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시편 22편을 지나가지 않는다면 푸른 초장도 쉴만한 물가도 나의 목자도 그림의 떡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십자가를 관통하지 않으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결단코 나의 고백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시편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명명하지 못합니다.

15.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들판에서 양을 먹이고 지키고 돌보는 인간목자 개념과는 질적으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시편 23편 3절과 4절에서 잘 확인되는 것처럼, 3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다윗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셨으며 그를 의의 길로 걷게 하신 분입니다. 태초에 인류의 조상에게 생기를 주입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도 소생하게 하시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셨으며 의로운 길로의 이끄심도 십자가의 의로운 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16. 4절에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할지라도 마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의 기운도 피해갔던 유월절의 역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함께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시편 22시편이 23편에 놓였다는 것은 시편 23편 전체의 재해석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는 시편이란 뜻입니다. 십자가를 생략하면 누구도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모든 구절들도 십자가가 투영되지 않는다면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인위적인 해석들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7. 정리하면, 고난의 때에도 슬픔의 때에도 고독의 때에도 배신의 때에도 반역의 때에도 모함의 때에도 절망의 때에도 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짓던 그 다윗은 평화와 풍요와 안정과 만족과 영광과 안식의 때에도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알았으며 하나님의 이런 속성에 근거하여 자신을 양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성취와 사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로운 역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과 상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속성과 함께하심 때문에 영원토록 하나님의 집에 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성은 썩어지지 않는 씨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영원히 패하여질 수 없습니다.

18.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정체성과 실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사유는 다윗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자신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근거해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과 상태와 사태는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분과의 관계성과 그분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재산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집이나 자동차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취득한 지식이나 직업이나 직분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타인의 평가나 대우에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와 국적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이룩한 성취와 업적이란 인간적인 공로에 의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19. 우리를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요 우리를 살리신 구원자요 우리를 이끄시는 인도자요 우리를 지키시는 보호자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신랑이요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요 우리를 소유하신 주님이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신 우리의 전부가 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려되지 않은 어떠한 '나'도 진정한 나일 수 없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잠시 입은 신분의 옷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것들, 결국은 썩어 없어질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복장일 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분과 복장을 혼돈하지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20. 감투를 쓰고 업적을 축적하고 유명세가 오르면 사람들은 대체로 본연의 자리를 이탈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마땅히 머물러야 할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도 가볍고 우숩게 여깁니다. 그리고 난관에 부딪치고 절망에 빠지고 빈곤에 허덕이고 관계가 끊어지고 계획이 무산되고 진로만이 아니라 퇴로까지 막히면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보는 눈과 듣는 귀로 들어오는 환경적인 정보와 현상에 극단적인 의존성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과 자신이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사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반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풍요로운 초원이나 쉴만한 물가를 거닐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떨어지고 강한 원수들의 위협적인 우겨쌈을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사실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21. 하나님의 양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길을 이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당연히 선하심과 인자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히 우리를 뒤따를 것입니다. 상태와 상황에 얽메이지 않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목자는 바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양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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