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6일 금요일

본보기 리더십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5:3)

사람을 움직이는 리더십의 스타일이 다양하다. 대체로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발산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떤 사람은 리더십의 수단으로 분노를 사용한다. 어떤 행실에 노를 격발하면 상대방은 이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된다는 판단에 급속하게 도달한다.

노를 두어번만 반복하면 상대방의 처신에 각인된다. 눈치가 9단인 사람의 경우에는 노의 단일한 격발로도 학습효과 만점이다. 문제는 이 짭짤한 효과에 중독되어 분노는 서서히 인격으로 스며들고 영혼을 결박하여 분노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는 거다.

눈물과 슬픈 목소리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인 리더십도 있다. 주체할 수 없도록 쏟아지는 눈물과 슬픔을 말하는 게 아니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출된 방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문제는 연출이 신속하고 매끄러워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거다.

주로 약자들이 구사하고 아쉬울 게 없는 강자들은 매료되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약자나 강자라는 말은 고정된 상태나 신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 아쉬워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절박한 상황에 처한 모든 이들이 약자의 자리에 있고 나머지는 강자인 거다.

강하고 부한 자들의 리더십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에게 가용한 권력이나 금력 의존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사람의 마음이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인 속성을 가졌는데 인간적인 수단으로 정직하고 진실한 움직임이 유발될지 의문이다.

상대방의 정서적 신경을 움직이기 위해 상처 받기에 급속하고 눈물과 슬픔을 조장하는 것은 비록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어도 본인에게 돌아오는 피해는 막심하다. 물론 타인에게 상처나 슬픈 눈물을 유발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의 행동을 자제하게 만든다.

몇 번은 제대로 먹힌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눈물이나 슬픔이란 영혼의 섬세한 작용과 아름다운 향기까지 얼마든지 언제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인상을 해프게 남발한다. 결국 타인으로 하여금 나의 가장 깊은 은밀한 영역까지 불신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감수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의 버릇을 고치고 뜻을 관철시킬 때에 주로 심리적인 위협을 동원한다. 아이들은 무서워 겉으로는 부모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속으로는 상처를 받고 부모의 어그러진 방식을 모방하고 타인에게 신속히 적용한다. 못난 성격과 습관이 대를 이어간다.

가장 좋은 리더십은 가장 좋은 방법을 요청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되기를 원하는 됨됨이와 삶을 스스로 본보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기도의 횟수가 밥그릇의 수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이 되도록 내가 먼저 그런 경건한 사람이 되고 삶을 살아내는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절감한다. 내가 안되니까 아이들의 됨됨이와 삶을 움직이는 다른 인위적인 수단에 호소하게 된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본보이는 리더십의 부재가 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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