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0일 화요일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는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 (잠10:12)

허물 한 조각만 가리는 것도 어렵다. 가린다는 것은 치솟는 분노와 복수심을 잘 다스리고 짓눌러서 현실로의 돌출을 간신히 모면하는 살얼음판 평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셨듯이,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타인의 죄과를 멀리 옮기는 것이고 타인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내던져 영원히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흘린 피로 우리의 허물을 가리시고 찢기신 살로 덮으시는 사랑의 선행적 경험과 충만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겠다. 참으로 신기하다. 주님의 그 사랑에 압도되면 타인의 허물이 덮어진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한다. 관점이 달라지고 기준이 달라지고 시점이 달라지고 입장이 달라지고 반응도 달라진다.

허물은 노력으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허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허물을 대하는 나 자신의 문제이다. 내가 바뀌어야 가능하다. 나의 기준을 따라 나의 수단으로 바뀌어진 나 자신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나 자신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십자가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허물의 정복자가 되지 못한다.

나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렇게 편만한 허물의 목적은 우리에게 분노의 게이지를 높이고자 함이 아니다. 십자가의 필요성을 무시로 설파하는 섭리적 장치이다. 허물이 의식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가져오는 허물에 반응하는 나 자신을 면밀히 돌아본다. 거기에서 영적인 상태가 모두 진단된다.

분노로 반응할 때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는 말씀이 사랑의 부재를 고발한다. "사랑"이 "모든" 허물을 가린다. 사실이다. 진리이다. 메시지가 강력하다. 분노와 보복의 되물림을 단절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은 노력이 아니다. 꾸며지고 연출되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동원되는 수단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주님의 영원하고 불변하고 신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동시에 바로 그 사랑으로 죽기까지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하다. 나도 용서되고 타인도 용서된다. 이런 신비로운 비약의 갭은 논리적인 설명으로 매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기적을 생산한다. 사람의 민첩한 조작이 개입할 수 없도록 인식에 있어서도 가시적 인과율이 가리워져 있다.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것은 주님만을 떠올라게 하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응시함이 없이는 이해를 불허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나보다. 뭐 조금 과장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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