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9일 일요일

내향적 엄밀성과 외향적 포용성

다양한 교단에서 다양한 신학을 경험했다. 신학적 다문화 경험이 좋은 것만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니다. 다만 교파주의 우물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심히 안타까운 교훈은 짭짤하게 건졌다.

여러 신학교를 출입했다. 신학을 배우러 가는 교단의 교실마다 타교단 비판에 무슨 애국심 수준의 '교파심' 발휘가 콘테스트 현장을 방불했다. 하여 까칠한 비판을 토하는 분들의 면면을 나도 까치한 눈을 부릅뜨고 살폈었다. 그러나 그분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보존하고 선포하고 퍼뜨리는 일에 각고의 노력과 특심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자신의 신학적 존재감을 타교단 신학의 부실과 허술과 부조화와 유아성 확인과 지적에서 찾으려는 참으로 가난한 신학자와 목회자가 적지 아니하다. 나도 이런 부류에 몸을 담았었다. 지금도 개가 토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는 자세의 지향점은 그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다.

나는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에 가장 가깝고, 가장 좋은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 '전성경'(tota Scriptura)과 '오직성경'(sola Scriptura) 정신을 가장 잘 유지하고, 하나님 자신만을 높이고 하나님이 전부이며, 진리와 사랑의 조화 및 이론과 실천의 융합에 가장 충실하고, 신구약의 통일성에 가장 민감하고, 통합적인 신학을 가장 잘 구현하는 신학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 제고를 위해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의 정도를 더하고자 하루하루 성경을 묵상하고 글을 읽고 대화하고 실천하는 일에 개개인이 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최소한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고 좁고 엄밀한 신학 추구에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하겠으나 타인을 향해서는 그렇지가 않다.

타인에게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며 기준치의 미달을 지적하고 신학적 못난이로 매도하고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기며 개혁주의 신학에 싸늘한 반감만 불러 일으키고 결국 사람도 잃고 좋은 신학에도 어두운 이미지를 드리우는 비판 일변도를 질주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허물고 훼방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사랑하고 전파하길 원한다면,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은 신학의 가장 높고 깊은 엄밀성을 추구하되 타인을 행해서는 원수라도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랑하는 가장 길고 넓은 포용성을 추구함이 마땅하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면서도 가장 답답하고 해롭고 거칠고 무례한 것을 주는 것처럼 오해하고 거절하게 만드는 건 증인의 모습이 아니겠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길 원한다면 내향적 엄밀성과 외향적 포용성의 조화를 어느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하는 배타적 택일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문제는 이것이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성향이 담아질 수 있는 큰 인격과 신앙을 구비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사위는 각자에게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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