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7일 금요일

투기의 기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잠27:4)

분노는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부모가 자녀를 분노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바울의 권면도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책망하고 훈계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스스로 추스리지 못할 단계까지 자녀들을 내몰지는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류 최초의 살인도 원인은 분노였다. 아벨을 찍은 돌은 가인의 분노가 움직인 것이었다. 물론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는 가인을 원하였고 가인은 동생의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망이 세상에 출입하는 도상에 분노가 삐끼처럼 실질적인 충동의 원흉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오늘 지혜자는 그런 분노를 투기의 잔인성과 통제불능 속성의 들러리 정도로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투기의 실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어졌다. 이사야 14장 13절의 기록이 힌트를 제공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겨누려는 무례하고 교만한 맞장이 문제의 본질이다. 사단은 그런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태초의 사람에게 하나님과 맞장의 어깨를 겨누라고 유혹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명령에 굴종의 고개를 수그리는 것부터 단호히 걷어찰 것을 촉구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을 정도로 하나님을 시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속성은 물론이고 그분의 존재마저 지우고자 한다. 생명도 임의로 주관하고 미래도 단순한 예측을 넘어 조작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하나님껜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이러한 투기의 촉수는 하나님만 겨냥하지 않고 타인들을 향해 사방으로 내뻗는다. 상대방은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현실을 견디지를 못한다. 공부도 더 잘해야 하고 돈도 논문도 책도 명예도 활동도 외모도 직위도 언어와 생각도 남들보다 더 좋고 높고 많아야 직성이 풀어진다.

투기는 결코 지치지 않고 막아설 사람도 없다. 주변이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시기와 질투가 토하는 기염은 사그라들 수가 없다. 투기가 강한 사람의 주변에 그보다 더 유능하고 수려하고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포착되면 곧장 표적으로 낙점된다. 뭐든지 그와 비교한다.

주변에 괜찮은 모든 사람들을 꺾고 자신의 우월성이 만천하에 입증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투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는" 것이 인간이다. 정곡을 찌르는 전도자의 통찰이다.

주님이 나의 만족이고 주님이 나의 기쁨이고 주님의 나의 소망이고 주님이 나의 전부이지 않으면 투기에 놀아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때때로 투기의 기운이 감지되고 그 투기에 휩쓸린다. 그때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최고의 상급이란 사실이 안팎으로 확인된다.

분노보다 잔인하고 억수 같은 독성을 지닌 투기에도 해독제가 있어서 안심이다. 이는 여호와 경외를 지혜로 규정한 지혜자의 투기 진술에 창세기 15장 1절이 투영되고 있어서다. 이렇게 심플한 진리가 만능열쇠 같다는 생각이 오늘은 강하게 밀려온다. 가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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