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9일 목요일

해석학적 순환

해석학적 순환은 18세기 말 아스트(Friedrich Ast)에 의해 처음으로 초석이 닦인 개념으로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리킨다. 신학적 체계화에 대한 모든 질문들과 교회의 지속적인 해석학적 활동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의 모든 부분들은 단어와 문구의 자구적, 문법적, 역사적 의미만 벗겨지면 해석되지 아니하고 부분이 비로소 의미를 얻도록 해석학적 에토스를 제공하는 "전체"에 의해서 벗겨진다. 이 "전체"는 문서의 전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전체의 범위는 인간 문맥에서 의식되고 수집된 내용만이 아니라 궁극적인 맥락인 하나님 자신까지 포함한다. 하나님을 생략해도 해석학적 갈증의 해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식의 논리적 기재만 적당히 달래어도 되니까. 허나 하나님 없이는 인문학적 해석학에 그친다.

씨슬턴이 지적한 해석의 두 '지평'도 놓치지 말아야 할 통찰이다.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 이 두 지평들이 조우할 때 해석이 발생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석자의 지평으로 해석의 지속적인 주체인 역사적 신앙 공동체의 해석학적 공헌에 대한 것이다.

신조와 신앙 고백서와 교리문답, 텍스트의 지평과 역사적 신앙 공동체의 지평이 조우하여 발생한 해석이다. 이는 역사의 짧은 토막을 살아가는 우리의 왜소하고 불안정한 지평을 보다 넓고 안전한 전체로 확대하며 인간의 실수와 오류까지 걸러내는 진리의 진일보도 약속한다.

종합하면, 하나님과 텍스트와 해석자와 역사는 서로 해석학적 순환에서 필히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4가지의 순환적 요소들 중의 균등한 하나로 간주하면 곤란하다. 텍스트의 생산과 해석자의 지혜와 역사의 흐름을 모두 주관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해석학적 순환에 신론적 접근법이 필히 고려된 해석학의 핵심에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성경 해석학의 중심으로 간주한 이유가 조금씩 감지된다. 물론 해석의 종착지는 삼위일체 하나님 되시겠다.

리차드 멀러, [신학공부 방법], 239-2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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