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감사하신 하나님

어떤 문제가 인기척도 없이 의식과 삶에 잠입하는 경우가 있다. 급한 당황과 혼란이 촉발된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문제는 감사로 환대함이 합당하다. 태풍이 대양을 정화하듯 대비할 겨를도 없이 들이닥친 문제는 고도의 집중력을 포획한다. 동시에 신앙의 뚝을 허물려고 은밀하게 매복해 있던 잔 문제들이 한 방에 일소된다.

사람의 신경이 촉발되고 지성이 움직이고 의지가 결의하는 이 모든 유기적인 연결망의 건강이 회복된다. 감사와 불평이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에 맡겨지지 않도록 미처 계산하지 않은 비가시적 효과에 민감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도 정밀하다. 정당히 가리셔서 정밀함의 실재에는 이르지 못하여도 믿음의 방식으로 알도록은 해 놓으셨다.

인간의 악행이 정당화될 수 없음은 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는 인간의 악행도 영원을 향하는 어떤 몸부림의 일환이며, 그토록 흉물스런 죄까지도 구원받을 인간에게 '행복한 과오'(felix culpa)임을 경험한다. 확실히 알았다는 당찬 발설의 계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근원으로 계시기에 모든 게 신비롭다.

내가 도달한 감사과 찬양의 준위는 어떤 차원의 환란까지 버틸지가 궁금하다. 극명한 모함과 손실 속에서도 헤아릴 수 없는 얻음과 유익이 공존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용서를 구하고자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삭제되는 것조차도 마다하지 않았고 바울은 동일한 백성을 위해 주님과의 단절이란 저주마저 각오할 정도였다. 신앙의 지경이 광활하다.

하나님은 선을 악으로 너무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바꾸신다. 이러한 사실이 감사에 대한 혁신의 발판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속에서도 감사의 숨결은 끊어지지 않는다. 이전에 감사의 판단은 말초신경 몫이었다. 이제는 신경의 지표 밑으로 깊이 내려간다. 신경의 중추라고 할 영혼까지 이르면 감사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에 수긍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감사하신 주님, 정말 묵상하면 할수록 무한하신 분이시다. 단순한 평강과 풍요와 형통 속에서는 이러한 주님을 만나기가 어려워서 고난이 유익이며 죽음도 유익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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