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지혜의 시작이요 이해의 출발

"부르시고 지르시는 음성으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의 캄캄함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때 나는 맡고서는 님을 그리며, 님을 한번 경험한 뒤로는 기갈이 더욱 커겨가고 있나이다."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탓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다.

쪼개고 분리하는 분할주의 혹은 환원주의 정신이 서구 문명을 강타했다. 그 이면에는 붙이고 결합하는 통합주의 혹은 전체주의 관점에 대한 갈증은 더욱 깊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명사적 섭리는 아닌지를 생각하게 된다. 최첨단 문명의 끝자락에 이를수록 인간화는 고조되고 신비는 매마를 것 같은데 종교성이 문명의 심장부를 버젓이 활보하고 있어서다.

우리는 살면서 진리의 조각들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의 단편들을 그 자체로만 사려하는 경우나 단편적인 진리의 절대화로 돌입하는 경우는 올바르지 않으며 그런 단편적인 진리마저 상실하는 태도라고 하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철학적 태도를 "호기심"(curiositas)으로 규정하고 배격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진리의 조각들은 그 자체로도 유익이 크지만 보다 큰 진리요, 보다 근원적인 진리요, 진리의 원천이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소급할 것을 요청하는 독촉장 혹은 이정표 기능이 훨씬 강하다고 생각된다. 비와 빛처럼 온 세상에 뿌려진 진리의 조각들은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도록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목적이 있는 선물이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정표에 불과한 진리의 조각들에 뿌려지는 조명과 거기에서 챙기려는 만족이 심히 과하다는 것이다. 단편적인 진리들의 저자에게 소급하고 거기에서 안식해야 하고 안식할 수 있는데 오히려 그것을 배척하는 역주행 현상이 편만하다.

칼빈은 호기심의 거절을 오직성경 정신의 이면으로 보았다. 성경이 이끄는 만큼 나아가고 성경이 보여준 만큼 이해하고 성경이 말하는 만큼 말하는 태도는 진리의 각 조각들에 상응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와 직결되어 있다. 진리 전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진리의 부분이 가진 의미의 분량은 가늠되지 않는다.

성경을 유기적인 전체로 이해하고, 자연을 하나의 통합적인 창조물로 이해하고, 시간적인 분할을 넘어 역사를 시간이 생략된 통일체로 이해하는 안목은 성경의 저자시고, 만물의 창조주며, 역사의 통치자인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만 풀어진다. 다른 단편적인 결론이 의미의 과도한 분량을 챙겨서는 아니된다.

전체의 장엄함과 개체의 고유성은 대립의 문제도 아니고 택일의 문제도 아니며 상호보완 관계이다. 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과연 지혜의 근본이요 이해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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