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4일 월요일

기다림의 은혜

학위가 손아귀에 들어온지 벌써 반년이 흘렀다. 짧았지만 주님의 손에 맡겨져서 그분이 사용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확신에 이르렀다. 주께서 원하시고 예비하신 곳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코너를 도는 타이밍에 이르러야 비로소 보인다는 친구의 말도 떠오른다.

오늘 오랜 시간동안 공부하고 오래동안 섬김의 자리를 찾고 기다렸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수십년의 세월동안 참으로 고단한 인생의 밑바닥 시간을 지나온 이후에 이민자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는데 그동안의 모든 고달픔이 이를 위한 훈련이요 준비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친구'의 삶 이야기도 귀에 솔깃했다.

두 친구의 진솔한 이야기가 나로 깊고 많은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내일일을 모르는 경우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보다 조바심이 앞질러 마음을 충동한다. 의식은 환경의 변화를 중심으로 이리휘청 저리휘청 흔들린다. 이러한 과정을 부끄러워 하거나 숨기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유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의 성숙에 본성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고난과 역경보다 더 효과적인 계기는 없어서다. 실제로 그런 과정을 지나가야 사람이 성숙한다. 시야도 넓어지고 마음도 여유롭고 반응도 느긋하게 된다. 그리고 환경이 조정하지 못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사사롭고 소모적인 것들이 고난으로 걸러진다.

본질이 시야에 들어오고 분별력도 맑아진다. 그러니 힘들고 괴로워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사실은 결코 부인하지 못하겠다. 죽음은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지각하게 만든다. 필터링이 보다 정밀하다. 그러니 죽음도 유익이다. 아니 죽음이 최고의 유익이다. 날마다 죽고자 하였던 자기부인 대가 바울의 신앙이 생각을 붙잡는다.

죽음을 방불하는 환난과 역경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벗들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서 주어진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갈꼬. 끔찍하고 오싹하다. 주님과의 불가피한 밀착을 일으키는 '절망'과 '낭패'는 적당한 때에 삶의 갈피를 비집는다. 이때에는 무너지는 가슴보다 설레이는 기대감이 어울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인의 가치관 뒤집기는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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