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7일 수요일

지식과 영생의 동일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이것이다 (요17:3)

영생과 지식의 동일시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오직 주님만이 구사하실 수 있는 신비로운 어법이다. 이 구절은 지식의 차원이 어디까지 높아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어서 신비롭다. "안다"는 것의 궁극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도 같은 의미로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ῥήματα ζωῆς αἰωνίου)이 있다고 고백했다. 위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알면 영생을 얻는다는 조건문도 아니고 지식은 원인이고 영생은 결과라는 식의 인과율적 구문이 아니다.

하나님 지식이 영원한 생명 자체로 규정되고 있기에 일단 우리는 지식의 무한성과 실체성에 압도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은 전두엽에 저장된 정보도, 단백질에 박힌 기억도, 가슴을 뎁히는 감동도, 삶의 표피를 뚫고나온 실천의 열매도 아니다.

"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일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건 더더욱 신비롭다. 그분을 아는 것이 영생인 인식론은 어떤 것인지가 궁금하다. 신학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신앙의 연수가 쌓이면서 하나님을 안다는 신비의 늪으로 점차 빠져든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속으로 변혁시켜 나가는" 것이며 "믿음과 동일한 것"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접목되게 하고 거룩한 아들로 입양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의 주석에는 지식의 기능이 설명되고 있다는 인상도 받지만 하나님의 지식 자체의 속성이 진술되고 있다는 점도 동일하게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영혼과 인격과 생각과 언어와 행실 모두가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다.

칼빈이 자신의 교의학을 하나님에 대한 "인식"(cognitio)으로 규정한 것은 시대의 과제를 푸는 열쇠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이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이는 교부들을 비롯하여 모든 건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추구했던 신앙의 종점이다.

바울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알지 않기로 정하였고 자랑치도 않기로 작정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사도신경 전체를 차지한다. 중요한 공의회의 신조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경적 정밀성에 기여하기 위해 고백된 것들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한 개인의 영생을 넘어 이렇게 시간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으로 압축되고 있다는 느낌까지 엄습한다. 우리의 모든 배움은 "신"학이고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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