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하나님을 동류로 여기는가?

네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여도 내가 침묵을 지켰더니 내가 너와 동일한 줄 아는구나 (시50:21)

우리는 상대방이 취하는 반응에서 그를 해석한다. 이를 뒤집으면,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가 나를 상대에게 대단히 많이 노출하는 셈이 된다는 거다. 우리는 반응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상대방의 반응에 근거하여 다음 반응을 결정한다. 이러한 반응의 반복으로 관계의 날줄과 씨줄이 형성되고 앞으로의 상대방에 대한 반응의 결이 굳어진다.

하나님을 대할 때에도 유사한 패턴이 적용된다. 하나님의 존전을 한 순간도 벗어날 자가 없기에 시간의 모든 찰나가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다. 이렇게 보면 삶이란 단절되지 않는 반응의 연속이다. 무수히 이어지는 관계의 연습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결이 형성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는 반응하고 있고 그것을 무수히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인생 일반과는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일례로, 모든 사람들은 인내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대상의 수와 시간의 길이에 있어서 무궁하다.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에 기초하여 다음 반응을 결정하면 곤란에 봉착한다. 곤란의 이유는 하나님이 참아주신 것인데 승인으로 읽기 쉬워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면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게 되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현저히 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먹이 두려워서 만들어진 반응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 그래서 주먹으로 공포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시고 길이 참으시는 방편을 택하셨다. 강요된 반응보다 자발적 반응을 기다리고 계신다.

만약 하나님의 무궁한 인내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투영시켜 하나님의 침묵을 승인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를 기준으로 해석된 하나님을 참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간주하게 된다. 하나님을 나와 동류로 여긴다. 무례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용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이처럼 자신과 하나님을 비기려고 한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나를 해석해야 하는데 순위가 뒤바꼈다. 나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해석하고 하나님께 반응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삶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며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님을 동류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된다. 자발적 두려움과 경외을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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