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1일 월요일

신앙과 신학의 관계 2

학문적인 신학에 대한 반감 속에도 진지함과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다양한 동기로 말미암아 성경의 단순하고 순수한 진리에 가해진 인간의 가증한 왜곡이 완전히 극복된 신학의 시대는 없었던 탓입니다. 당연히 진리에서 인간적인 불순물을 거부하고 제거하는 작업은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제자도의 기본에 기울이는 관심과 노력처럼 결코 중단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열심의 과잉은 언제나 또 다른 혐오를 낳는 법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에 덧입혀진 교리적 껍질을 벗기는 일에 과도한 사명감에 경도된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교부들의 저작들을 비롯한 각종 원문들을 파헤치며 신학이 근원적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 사이에 맺어진 결혼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에른스트 폰 분젠(Ernst von Bunsen)과 더불어 하르낙은 심지어 바울이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순수한 복음을 변조시킨 주범이고, 교리의 착상은 복음의 순전한 토양에 뿌려진 불순한 그리스 철학과의 혼합이며, 교리의 발전은 그런 불결한 혼합의 누적이며, 결국 기독교 교리사는 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오류이며 순수한 복음의 점증적인 부패일 뿐이라고 일갈한 바 있습니다. 그가 리츨과 함께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가려 했을 때에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아버지직 및 인간 영혼의 고결함’ 이 두 가지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교리와 신학을 거절하며 성경이란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방식은 ‘성경 전체(tota scriptura)’가 아니라 때로는 신약으로, 때로는 복음서로, 어떤 경우에는 몇몇 구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프란시스 아시시(Franciscus van Assisi)는 마태복음 10장 9-10절에서 발견하고, 톨스토이 경우에는 마태복음 5장 38-39절에서 발견하고, 드러몬드 경우에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서 최고의 선을 추구했던 사례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로 돌아가지 않고 특정한 주제나 특정한 책이나 특정한 본문이나 구절에 대한 기형적인 강조로 원시적 기독교의 회복을 꽤하려는 시도는 그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신학의 고유한 가치와 기능마저 파괴하는 부작용만 초래할 뿐입니다.

신앙과 신학, 성경과 신학, 윤리와 교리, 교회와 학교, 종교와 학문의 엄격한 분리는 성경적 계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언어 문화적 오류로서 이원론적 시대의 희생물 목록에 기독교를 등록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신학이 각 시대의 모든 인위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고 결합하는 영광스런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바빙크의 통찰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계시가 모든 인간을 향하고 있고 온 세계를 그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의 전인격과 관계된 것이라는 그의 계시론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가장 심오한 사유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며 인간 및 세상과 긴밀하게 결속된 하나님 지식을 학문적 신학의 토양에 심습니다.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 철학이나 여러 학문들이 설명과 체계화의 방편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기독교의 교리적 내용 자체가 산출되는 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기르는 뚜레박일 뿐입니다.

당연히 학문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것은 지성적 자유의 무한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조셉 스칼리거(Joseph Scaliger) 금언처럼 '최고의 스승이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은 해박한 무지(Nescire velle, quae Magister optimus docere non vult, erudita inscitia est)'라고 함이 옳습니다. 칼빈이 잘 진술한 것처럼 신학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이르러야 하고 성경이 그어 놓은 경계선은 함부로 범하지 말아야 하는 적정과 절도의 원리에 머무는 게 가장 좋습니다. 세 가지의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공허한 호기심에 이끌려 성경이 묻지도 않는 물음을 따라 하나님께 속한 가리워진 영역까지 출입을 시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경이 엄연히 계시하고 있는 것인데도 침묵으로 그냥 지나가며 결국 그것을 버리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대적들이 이단적인 주장으로 진리의 변질을 도모할 때 그들이 만든 논리의 얼개를 따라 묻고 답하는 중에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데도 변증적인 이유로 개념을 산출하고 무리한 결론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들을 경계하는 학문적인 신학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할 바입니다. 

바빙크는 신학이 교회에 처음 발생한 것은 어린아이 같은 천진성을 지나 사고하는 의식이 깨어났을 때라고 말합니다. 즉 계시에 대한 사색이 깊어지고 복음의 진리를 짓밟아 뭉개려는 모든 공격에 대해 모든 가용한 지식들을 동원하여 응전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을 때 말입니다. 교부들은 그러한 필요에 부응하며 당시의 철학들을 널리 활용하되 진리의 표상과 체계화에 유익한 것들만 선별하는 절충주의 태도를 보였으며, 바빙크는 이것을 마치 하갈이 사라를 섬기고 출애굽 당시에 수거한 보화들이 하나님의 장막에 사용되고 동방 박사들의 선물들이 그리스도 출생을 기념하는 것으로 활용된 경우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금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 수도 있지만 정통적인 교부들이 선별하여 사용한 철학적 개념들과 구분들은 진리의 규모를 세우는 일에 수종 드는 방편으로 동원된 것입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질서를 진리의 표상과 체계화에 동원하는 지성적인 활동은 신앙과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고 바빙크는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거스틴 경우에는 ‘신앙을 통하여 지성에 이른다(per fidem ad intellectum)’는 테제를 신학의 제1원리로 삼았으며 이 둘의 관계를 잉태와 출산 혹은 노동과 임금의 관계로 이해했고 ‘지성은 신앙의 열매(fidei fructus est intellectus)’이며 ‘믿음의 보상(merces fidei)’이라 했습니다. 견고한 믿음으로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들(quae fidei firmitate jam tenes)은 이성의 빛으로(rationis luce) 지각될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빙크는 신앙과 신학을 습성과 행동(habitus et actus)로, 생득적 신학과 후천적 신학(theologia infusa et acquisita)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신앙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동의이고 신학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과 그것의 이성적 체계화는 구분과 결합이 동시적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 따르면, 신학은 믿음으로 소유하고 이성의 빛으로 지각한 진리들의 표상이요 체계이기 때문에 신학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믿음과 이성을 모두 무용하게 만드는 교모한 사단의 술수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과 신학, 교회와 학교, 경건과 학문, 지식과 삶, 교리와 윤리, 습성과 행위가 비록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현하는 신학을 믿음으로 추구하는 것 자체가 악한 궤계에 맞서 물러서지 말아야 할 우리의 저항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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