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1일 월요일

신앙과 신학의 관계성

신앙과 신학의 관계성은 바빙크의 견해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싶습니다. 신학이 없어도 믿음의 삶과 교회의 목회에 지장을 주지는 않으며 오히려 믿음이 신학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신학의 존재에 거북한 심경을 토로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렇게 신실하던 청년이 신학교에 가서는 몹쓸 목회자로 변질되어 왔다는 이야기도 이따금씩 듣습니다. 그렇게 우려하는 분들의 경험세계 속에서 벌어진 불미스런 경험들을 부정하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의 공해는 극에 달하였고 ‘취득된 지식과 경험이 우리에게 회의를 주입하고 있다’는 바빙크의 지적이 작금의 신학교육 현실을 벌거벗긴 듯한 신학의 위기를 저도 맨살로 늘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용이 유용을 제거하지 못한다(abusus non tollit usum)는 말처럼 신학의 일그러진 이미지에 대한 증험들이 신학의 ‘신’자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두툼한 객관성을 확보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학의 오용과 과용에서 빗어진 슬픔일 뿐 신학 자체의 무용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신앙과 신학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대립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칸트의 도식을 빌어 말한다면, 신앙이 없는 신학은 공허하고 신학이 없는 신앙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신앙과 신학은 분리될 수 없으며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의 권위와 가치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논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기독교의 긴 역사 속에서 때마다 의문의 고개를 내밀었던 일입니다. 신학의 학문적인 추구에 반기를 든 분들은 터툴리안 문구를 인용하며,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떠한 호기심의 요청도 없고 복음 이외의 어떠한 연구 필요성도 발견하지 않으며 우리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열망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펼칩니다. 게다가 경건은 그 자체 안에 직접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있기에 학문적인 신학의 유용성과 필요성이 교회 안에서는 요청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고 순전한 영혼으로 법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지 난해한 영역의 지성적 정복에 두뇌의 불필요한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종교개혁 인물들의 단편적인 입장까지 신학의 무용성 주장에 들러리로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물론 멜랑톤은 스콜라 학자들의 몇몇 가르침을 거부했고 쯔빙글리 역시 기독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요설의 제작자가 아니라 주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에 있다고 했으며 칼빈도 같은 맥락으로 그런 실천성 강조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런 종교개혁 인물들의 단편적인 입장보다 과도하게 더 나아간 분들도 있는데, 칼슈타트 같은 경우에는 모든 학문적인 칭호들을 비난하며 농부들과 더불어 농부의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의 재세례파 및 메노파의 경우는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도 학문적인 교육에 담을 쌓고 일체의 교류를 금했으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교도권을 부여한 적도 있습니다. 바빙크의 표현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교리에서 생활로, 고백에서 성경으로, 신학에서 경건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삶과 성경과 경건을 지향하는 것은 참으로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이지만 교리와 고백과 신학이란 골격과 경계와 전통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리 괜찮은 측면이 있어도 전자에만 배타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분별마저 어려워져 더 해로워 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인간의 영혼이 가진 어떤 하나의 기능과만 결부된 사안이 아니라 전인격이 하나도 배제되지 않는 총괄적인 정신활동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 이해해도 신앙과 신학 사이에 만들어진 분리와 대립에 대한 왜곡된 인상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 같습니다.

마치 눈의 망막이 빛에 대응하고 귀의 고막은 소리에 대응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는 믿음이 인식의 내적인 원리로서 외적 원리인 성경의 계시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믿는다는 것은 증명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통찰에 기초한 모든 지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플라톤은 지각에 기초한 감각적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믿음(Πίστις)으로 규정하며 ‘되는 것과 존재와의 관계는 믿는 것과 진리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의 방식으로 얻는 지식과 우주적 이성(nous) 자체에서 추론된 제1 원리에 대한 지식을 구분하고 말하기를 어떤 것은 '일종의 믿음으로 원리들이 알려질 때에 이해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클레멘트 교부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얻어진 모든 지식과 확실성을 신앙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어거스틴 경우에는 사회와 학문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etis). 신앙은 모든 인간 공동체를 하나로 엮는 근간이며 띠입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quod non video credere non debeo)는 전제를 취한다면, 혈육과 우정과 사랑의 모든 유대는 단절되고 말 것입니다. 볼 수 없어서 믿지 않는다면 인간사회 자체는 화합의 붕괴를 신음하며 존립조차 불가능한 지경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이럴진대, 볼 수 없는 신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강한 신앙이 요구되는 것일까요?" 

이처럼 신앙이란 말은 제1 원리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으로, 우리의 자아와 지각과 사유에 대한 신뢰로, 외적 세계의 객관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모든 인간 공동체의 존립을 지탱하는 공통의 신뢰로, 직관으로 알려지고 행하여진 모든 것들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신앙은 대상과 근거와 근원에 있어서 전적인 종교적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신앙 그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어떤 종교적 관계를 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일반적인 개념은 히브리서 11장 1절에 명시된 것처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을 정서나 감성과만 결부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에 이해된 기독교 신앙의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notitia)와 그런 지식에 대한 전적인 찬동(assensus)과 알고 찬동한 것에 대한 전폭적 신뢰(fiducia)로서 지성적인 요소와 감성적인 요소와 의지적인 요소로 대별되는 전인격을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정의가 지식과 찬동과 신뢰 사이에 어떤 서열이 있다거나 그것들이 순차적인 단계를 따라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 배제된 신앙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칼빈은 신앙이 ‘이유들을 요구하지 않는 확신(persuasio)이며, 최고의 이성이 인증하고 어떠한 설명보다 안전하고 일정하게 마음이 안식하는 지식(notitia)이며, 하늘의 계시가 아니면 생성될 수 없는 정서(sensus)’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교의학 각 권 제목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지식(notitia)인 것 같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