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4일 월요일

신학 공부법

영어권에 오랫동안 살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어떤 신학생이 영어 글쓰기, 영어일반, 및 신학 공부법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래의 진술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1. 영어작문

제가 오히려 비법을 들어야 할 부분인 듯합니다. 그냥 개인적인 입장을 전하자면, 영어의 효과적인 작문을 위해 반복적인 연습을 별도로 해오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 했기 때문에 매일 영문으로 1-2페이지 정도의 글은 써 온 셈입니다. 작문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1) 틈틈이 영문 신학서를 한글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영어 글쓰기가 탁월한 미국인 학자의 책을 선정하고 번역하다 보면 학문적 영작의 묘미도 발견하고 섬세하고 세련된 표현도 조금씩 익숙해져 저의 영작에 서서히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또 다른 도움은 신학서적 중에 언어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문학에 가깝도록 저술된 책들을 읽은 것입니다. 그런 책들은 그냥 읽고 싶어지기 때문에 특별한 작심이나 각오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학적 내용도 취하면서 언어의 수사적 유희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냥 손에 잡힙니다. 그런 류의 책들을 읽으니까, 신학적 글쓰기를 하면서 문학적 표현의 부재가 가져오는 건조함과 글맛의 민밋함을 많이 의식하게 되더군요. 좋은 내용을 좋은 것처럼이 아니라 싱겁고 사사로운 내용인 것처럼 잘못 전달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명료하되 가급적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하면, 정보의 취득만이 아니라 독자에게 독서의 즐거움도 제공하게 되어 설득과 공감의 효과도 배가되지 않나 싶습니다. 

2. 영어공부

저는 영어의 어휘력, 문장력, 독해력의 향상을 위해 별도의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그냥 신학적인 이유로 좋은 책을 찾아 독서하고 번역하는 것 뿐입니다. 제가 간과하고 있는 대목인데 오히려 찔러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3. 신학공부

저만의 고유한 비법이나 전략은 아닌 듯합니다. 그냥 기본적인 방식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1) 성경을 매일 읽어서 나의 상식과 합리와 논리와 확신과 기호를 부단히 꺾는 지속적인 판단중지 훈련을 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일용할 양식처럼 매일 섭취하여 내 모든 생각과 말과 행실의 원천으로 삼지 않으면 우리의 죄성에 가장 익숙한 원리가 그 틈새를 매꾸고 급기야 삶의 발목을 잡습니다. 아는 줄로 생각하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이며, 선 줄로 생각하는 순간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때라는 인간적인 앎의 역설적인 실상을 늘 되새기는 게 좋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힘든 자기부인 항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유순하고 둥근 성품으로 대충 참고 지나갈 수 있는데, 옳고그름 문제만 터지면 나만이 진리의 수호자인 양 일인치도 물러서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선악과 범법의 항구적인 후유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분들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걸 보면 말입니다.

3-2) 바른 신학을 가르치는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다른 많은 분들이 거명될 수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신학에 영향을 주신 분들은) 김영규, 박윤선, 김홍전, 김성수, 최낙재 목사님 같은 스승들과, 외국에는 어거스틴, 칼빈, 루터, 바빙크, 바질,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스, 크리소스톰, 그레고리 대제, 제롬, 안셀름, 버나드, 아퀴나스, 스코투스, 폴라누스, 베자, 잔키우스, 우르시누스, 트위스, 러더포드, 프래버스, 길레스피, 카트라이트, 부카누스, 푸치우스, 파레우스, 토사누스, 히페리우스,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케커만, 투레틴, 하이데거, 퍼킨스, 오웬, 에드워즈, 워필드, 카이퍼, 멀러 같은 스승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런 분들의 문헌을 최대한 입수해서 일평생 읽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이러한 분들의 문헌들을 늘상 수집하고 읽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복사판 재생이 아니라 진리의 고백적인 범위 내에서 창조적인 발전과 개선을 도모하는 게 우리의 시대를 섬기는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3-3) 1년에 언어를 하나씩 배우는 게 좋습니다. 방법은 하루에 매일 2-3시간씩 2개월만 투자하면 기본적인 문법을 독파할 수 있고 10개월간 좋은 문헌(사실 성경이 최고)을 정하셔서 계속해서 원서를 읽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1년이 지나면 다른 언어로 넘어가되 학술적(신학적)인 언어로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 불어, 화란어를, 실용적인 언어로는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정도를 배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학을 시작하는 분들은 신학을 최소한 10년정도 공부한다 생각하고 언어습득 전략을 세우는 게 좋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신학의 지경을 넓히는 최고의 유일한 길입니다. 시공간에 흩어진 다양한 스승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언어에 대한 시간의 의식적인 투자 없이는 교회의 장구한 전통이 물려준 풍부하고 아름다운 유산은 망각의 먼지만 두터워질 것이고 겨우 극미한 일부만 상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나름 날고 뛰었는데 이미 과거의 한 시점에 어떤 지역에서 풍미했던 이단적 사상의 재탕으로 확인되는 분들이 간혹 보입니다. 진리의 지식에 가난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유산을 최대한 많이 상속하는 비결은 언어를 익히고 성실하게 독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3-4) 신학은 하나님만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결단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모르는 신학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본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이 고려되지 않은 신학은 수도원 신학의 현대판일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문명을 최대한 읽어내되 세상이 제공하는 물음과 답의 분주한 챗바퀴 공감 및 개선에 안주하지 않고 늘 빛과 소금의 책임의식 속에서 주님께서 세상에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것을 주는 자처럼 해법을 찾고 제공하는 복의 근원이 되도록 마음의 태도를 가다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른 어떠한 것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는 신학자가 세상을 제대로 배웁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의 긴급하고 근원적인 필요를 발견할 수도 없고 해소시킬 수도 없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도다'고 한 시인의 고백처럼 정말정말 사람을 사랑하는 신학자가 되어야 신학을 올바르게 배우는 게 가능한 것 같습니다. 공부 한답시고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분리되는 사람은 잠언이 제대로 꼬집은 것처럼 온갖 참지혜를 배척하는 자입니다. 물론 신학자는 평생 책과 더불어 지내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텍스트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처럼 놀이터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텍스트가 분명 중요한데 그 중요성의 지나친 과장으로 배움의 입체적인 소스 확보와 습득의 필수성을 훼손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문자중독 해독의 비결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는 듯합니다.

3-5) 신학자는 삶을 언어로, 언어를 삶으로 번역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신학자가 진리와 삶을 언어로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을 부단히 연습해야 하고 언어의 텍스트를 인격과 삶으로 전환하는 일에도 동일한 분량의 노력으로 연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해석(성경을 삶으로 해석)과 전달(삶으로 진리를 전달)로 구성된 어거스틴 해석학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언어에서 언어로만 이동하는 진리의 해석과 전달에는 능력과 생명이 없습니다. 삶에서 삶으로만 이동하는 진리의 이해와 전달은 일상으로 담아질 수 없는 진리의 초월적 부요함을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진리는 변하고 유한하고 일시적인 언어와 삶의 조화로운 협조 속에서도 다 담아질 수 없도록 영원하고 무한하고 불변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최선일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3-6) 저도 아직은 아니 어쩌면 일평생 신학 공부법의 구도자일 뿐입니다. 신학의 짬밥이 차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 공부하고 가르치고 목회하는 일에 아름다운 균형의 모델과 같은 믿음의 현존하는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묻습니다. 그토록 귀한 모범을 보이시는 분들도 대부분은 최고의 범례를 지금도 찾아가는 과정에 있노라는 답변을 하십니다. 이런 물음과 답변을 수차례 경험하며 얻은 저의 잠정적인 결론은 모든 사람들이 획일적인 신학 공부법과 구성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제자도의 원리를 벗어날 수는 없겠으나 각 개인에게 그 원리가 구현되는 방식의 다양성은 오히려 아름답고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교가 동일한 제품의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조심스런 부분인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하는 최소한 내려가지 말아야 할 신학적 하한선은 분명히 있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개개인의 다양성도 존중될 여지는 늘 마련해 두어야 할 듯합니다.

두서가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따라 떠오르는 생각의 순서대로 몇 자 적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나이와 신학의 짬밥을 막론하고 서로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님에게 맡기신 아름다운 교훈도 저와 페친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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