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8일 월요일

주님의 어법이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요한복음 10:26)

예수님의 언사가 냉혹하다. 다만 유대인 몇 사람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시는가 그리스도 맞다면 밝히 말하라'고 했을 뿐인데 곧장 '내 양이 아니라'는 신분 차별적인 격문을 토하시며 소통 단절적인 국면으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며 '따르지 않는다'는 가시적 결과에서 소급하여 '내 양이 아니라'는 근원을 진맥하는 듯한 소위 '실천적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 적용도 불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지를 시공간적 인과 의존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되겠다.

본문은 분명히 '믿지 아니한 것을 보니 내 양이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같은 주장과는 판이한 입장을 표명한다. 즉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거다. 원인과 결과는 동일하나 인식의 순서가 뒤집혔다. 인간의 지각은 가시적 결과를 보고 비가시적 원인을 추정하는 소급법을 선호하고 그런 인식론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주님은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아시되 원인이 결과에 앞선다는 논리적 순서도 존중한다. 칼빈의 표현처럼 '선택은 믿음에 선행하나 그 선택은 믿음에 의해 식별된다' 식의 인지적 한계를 그에게 돌려서는 아니된다.

허나 우리는 결과를 보고 근원을 지각한다. 믿음을 보고 주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특정한 시점에서 믿음을 관찰하고 선택을 추정하는 것이어서 오류 가능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또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살폈다고 할지라도 추정의 부정확성 때문에 백성의 여부를 단정하고 염소와 양으로 편가르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겠다. 우리의 눈으로는 원수로 분류된 사람들도 사랑과 축복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이미 인간적인 판단의 불완전한 상대성을 지적한 셈이다.

하여 예정을 근거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건 무례하다. 주님의 심판석에 불법적인 착석을 단행하는 도발이기 때문이다. 예정이 구원의 견고한 토대요, 인간의 어떠한 공로도 자랑의 고개를 내밀지 못할 겸손의 빙거요, 변덕스런 상황 속에서의 근원적인 위로요, 복음의 불모지를 기경함에 있어 끝까지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을 마지막 소망의 이유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예정론이 구원의 유무를 사람이 가타부타 규정하는 식별용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심해야 하겠다. 엄밀한 의미에서 주께서만 그의 백성을 아신다.

하여 '내 양이 아니므로 너희가 믿지 않는다'는 냉담은 당신의 백성을 아시는 주님만의 고유한 어법이라 하겠다. 우리 편에서는, 내가 믿고 있다면 당신의 양으로 창세전에 택하신 주님의 뜻과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돌리는 게 도리겠다.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에서 비롯되지 아니했다. 믿음도 그러하고 구원도 그러하다. 본문은 염소에겐 멸망의 빙거요 양에게는 구원의 빙거다. 인간의 명의로는 발설하지 말아야 할 주님만의 고유한 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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