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4일 목요일

사람의 계명에서 하나님 자신에게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29:13)

본문에서 책망의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들의 하나님 존경은 자타가 공인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저울추로 가늠된 그들의 존경은 고작 입술 두 짝의 무게였다. 그들의 여호와 경외가 사람의 계명을 따라 학습된 것이라는 동일한 의미의 다른 설명이 사태의 밑바닥 실상을 뿌리부터 까발리는 듯하다. 뿌리의 문제였다. '사람의 계명'이 여호와 경외의 뿌리가 된다는 건 경외의 최종적인 근원을 인간에게 둔다는 말이겠다. 그런 종류의 경외는 아무리 뜨거운 열정과 정교한 지성과 불굴의 의지가 화려한 들러리로 서더라도 여전히 입술의 꾸며진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생계의 물동이도 내던지며 복음을 증거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다소 냉담한 반응의 이유도 신앙의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였다. 존경과 경외가 입술에 머문 자들에게 주님은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명철이 가리워질 것이라'는 '가장 기이한' 조치를 취하실 것이란다. 사실 본문을 묵상하기 이전에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는 선행구의 요염한 뉘앙스에 눈길이 끌리었다. 보이는 게 없어진다. 여기에서 초래된 '취함'과 '비틀거림' 현상의 이유는 포도주나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주께서 그들에게 부으신 '깊이 잠들게 하는 신' 때문이다. 가까운 원인은 독주나 포도주일 수 있겠으나 궁긍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진노였다.

결국 모든 묵시는 그들에게 유식자든 무식자든 '마치 봉한 책의 말'이었다. 묵시는 선포되나 깨달음이 없는 무지의 시대였다. 백성의 눈과 머리로 비유되는 선지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선견자의 명철이 가려진 시대는 진정한 의미의 암흑기다. 동시에 주님만이 땅의 그 어떠한 것도 스스로 벗길 수 없는 두터운 캄캄함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이 가장 선명하게 증거되는 때이기도 하다. 사람의 교훈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경외는 그 경외의 뿌리가 인간에게 있다는 의미와 인간의 오류가 발동하면 언제든지 경외의 내용조차 왜곡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전자의 극복은 후자의 위험성을 해소하는 열쇠다. 진리의 토대가 견고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라 할지라도 인간 개개인을 진리와 신앙의 출처로 여겨 이사야나 바울이나 요한을 높이는 식으로 이사야파, 바울파, 요한파를 추구하는 신학은 금물이다. 물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한다는 구절의 정당한 제어를 받아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리는 경건의 기본기가 흔들리면 '교주'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설교자로 하여금 교'주'의 맛에 취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 일조하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영광을 적당한 비율로 목적과 수단에 고루 분배하는 개념이 아니다. 온전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게 돌아오는 보상의 국물 한방울도 없다면 복음화도 접겠다는 내색할 수 없는 반응이 성깔을 부릴 일이겠다. 그러나 사실이다. 보상적인 영광의 국물이 한방울도 없다. 그래서 이 길이 좁고 협착하다. 주님만이 전부여야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신앙의 궁극적인 뿌리로 소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뜨끔한 경종의 소리가 울린다. 궁극적인 하나님께 이르지 아니하고 사환에 불과한 어떤 지도자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제도의 복장만 갖추면 로마 카톨릭이 된다. 개신교 내에서는 아직 제도화의 움직임이 감지되진 않는다. 그러나 제도의 유무와는 별개로 은밀한 추앙의 짜릿한 맛에 중독되어 취함과 비틀거림 현상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출되는 경우가 교회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여전히 허술한 인간의 법 앞에서의 평등보다 더 철저한 엄밀함이 요구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을 교회에서 허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세상의 입술로 지적되는 지경까지 가서는 아니될 일이겠다. 이를 위해서는 징계가 교회를 정화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 트럭 분량의 천인공노 범법을 저지른 악의 군상들도 진정으로 돌이키면 언제든지 사랑으로 품어주는 용서를 요구하는 장치이다.

인간을 의지하면 그 대상이 선지자나 사도라도 주님은 그들의 지혜와 총명을 가리신다. 주변에 지혜와 총명이 번뜩이는 분들이 보인다. 아직은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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