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8일 금요일

유쾌한 멘붕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지는 방식 or 인식론은 믿음이다. 믿음 자체가 지식의 샘이라는 것은 아니며 주어진 소스가 지식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불가피한 수단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믿음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얻지 못할 것이며, 얻어진 바른 지식은 필히 믿음의 수단을 통했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본성적인 기재를 의미하지 않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서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 것, 즉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일컫는다. 물론 나는 모든 지식의 생산에 각자의 주관적인 믿음이 깊이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은 또한 세계의 기원을 푸는 열쇠로서 믿음의 기능을 꾸욱 누질러 강조한다. 세계의 창조가 이미 '나타난' 계시의 성격이 있음을 지적하되 그 창조적 계시의 신비를 벗기는 '보이지 않는 인식론'도 믿음이란 함의까지 담았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해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그것의 근원이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급하지 않으면 아무리 넓은 보편성과 희귀한 천재성을 확보한다 할지라도 고작 학습된 무지의 허탄한 향연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까지 함축한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눈에 세상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신성과 무한한 능력이 계시되는 출구로 보인다는 바울의 지적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기원과 본질과 실존과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는 알려질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어떤 식으로도 분리될 수 없기에 결국 하나님의 속성까지 소급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지식도, 그 지식에 기초한 어떠한 행위도 건강하지 못할 것이다. 이로 보건대 신학이 관심의 손을 뻗어야 할 영역은 거의 무제한에 가깝다. 그런 만큼 올바른 신학의 중요성은 하늘과 땅의 무게보다 육중하다. 온 우주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해명해야 할 과제가 신학자의 어깨에 얹혀진 셈이다. 게으름과 안일함의 음흉한 추파에 단호한 저항의 등짝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겠다. 

신학적 행동반경 안에서 발견되는 필요에 부응하는 정도로는 신학자 본연의 부르심에 충실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극히 협소하고 구체적인 사안을 건드릴 때에라도 늘 우주를 의식하고 세계와 인류를 어깨에 짊어지는 각오와 자세에는 한 주름의 구겨짐도 없어야 하겠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감당이 안되는 선언이다. 미치겠다! 사람이 받아낼 만한 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한 오라기의 의식도 이 진리를 벗어난 방향으로 촉수를 뻗지 못하겠다. 완전한 무장해제, 전적인 자기부인, 절대적 백기투항!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자리로의 부르심은 영광이고 흥분이고 감격이고 그 자체가 이미 상급이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공자의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는)' 구도자적 열정에도 미치지 못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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