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일 토요일

복음의 역동성

칼빈이 말하는 복음의 역동성이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Institutio 1559, III.vi.4)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과 휘장만 걸쳤을 뿐이면서 '그리스도 사람'이라 불려지길 원하는 자들에겐 엄중한 문책이 마땅하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그들은 얼마나 뻔뻔하게 자랑하고 있는가? 복음의 말씀에서 그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체득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 예수와는 진실로 어떤 친밀한 교분(commercium)도 나누지를 못한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입으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 모든 이들은 그를 올바르게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는 그들이 현혹적인 욕망으로 부패해 버린 옛사람을 벗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박학과 능변으로 지껄이는 모든 그리스도 지식은 거짓과 부정으로 가장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복음이 언어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non linguae doctrina sed vitae)이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들과 달리 복음은 지성적 기억으로 포섭되는 게 아니다. 복음은 오로지 그것이 영혼 전체(animam totam)를 장악하고 마음의 심연에 안식의 좌소를 마련할 때에 비로소 수용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과 무관한 것을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실의 중단을 택하든지 아니면 스승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합당한 제자답게 처신하라.

우리는 우리의 경건을 지탱하는 교리에 우선적인 자리를 내주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거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리는 우리의 가슴 속으로 이동하고 일상으로 스며들며 급기야 우리를 그 안에서 개조하니 어찌 교리가 우리에게 무익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심지어 철학을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며 자칭 철학자라 칭하는 자가 철학을 궤변적인 수다로 전락시킬 경우 그가 속한 무리에서 격분 속에서 축출되는 게 마땅한 일이라면, 복음의 효력이 마음의 정서적 심연을 관통해야 하고 영혼에 자리를 잡아야 하고 철학자의 차가운 교훈보다 몇 백배나 철저하게 전인격(totum hominem)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혀끝에서 굴리는 정도로 만족하는 이런 경박한 궤변가를 우리가 혐오하는 것은 훨씬 더 타당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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