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0일 일요일

계시 의존적 사색과 문자주의 질문을 접하고

황은영 전도사님, 아래의 신명기 8장 3절 묵상은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신 성도님들 모두가 이해하실 수 있도록 쓴 글인데 제 페북 담벼락이 휘청거릴 정도로 버티기 힘든 묵직한 물음을 주셨네요...ㅎㅎㅎ

1. 아래의 포스팅 묵상은 문자주의 개념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쓴 글입니다 (^^). 계시 의존적인 사색과 문자주의 사이의 연관성 문제가 황 전도사님 질문의 요지인 듯합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길이 논쟁은 전도사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구요. 현문우답 가능성을 무릎쓰고 제 생각을 몇 자 적습니다.

2. 라무스가 관뚜껑을 걷어차고 일어날 정도로 현란한 작금의 환원주의 분할과 물리학의 각종 상수들이 마지막 임계점에 이르는 '절대세계' 탐구가 저에게 준 인상은 절대적, 총체적 회의주의/상대주의 사상이 과거에 어떤 대상이나 주체에게 돌렸던 회의주의 개념과는 아주 단절적인, 우주 질서의 비밀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는 절망의 벽을 이제는 비가역적 사실로 입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수학을 조금 배웠지만 과학은 언제나 자연의 거절에서 시작되고 존재감을 얻습니다. 제가 역사신학 공부하며 느끼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관한 주님과의 질의응답 이후에 빚어진 욥의 정직한 고백처럼 각 시대의 최고급 지성이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문명의 꽃도 시들고 무성한 과학의 잎사귀도 마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이사야의 기록은 오늘날 최첨단 과학의 정밀한 활동이 봉착한 그 벽만이 아니라 오고오는 모든 세대들의 지적 단명에 대한 항구적인 예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원한 말씀을 편들지 않는 모든 것들은 마치 베드로가 영감의 살을 조금 추가한 증언처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전포괄적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3. 창세기 1장의 하루길이 개념은 히브리서 기자가 창조와 '칠일째' 날을 논하면서 창세기의 하루를 신약시대 당시 유대인의 하루 개념과 아무런 차이점 없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24시간과 다르게 생각할 보다 설득적인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제 생각이 옳다면, 이로써 애매한 구약의 하루길이 난제를 신약의 명료한 사도적 기록이 풀어준 셈입니다. 사실 '태양력의 하루' 개념도 굳이 태양이 만들어진 이후로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빛이 태양 이전에 있었듯이 빛과 어두움을 임의로 주관하는 분이 태양 이전에 하루의 길이를 정하시고 그 길이에 맞도록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설정한 수순으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두개골 바깥을 한 발짝도 출입하지 못하는 뇌가 밖을 보려고 소통의 눈을 형성하고 들으려고 청취의 귀를 형성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오늘날의 최근 과학적 가능성 추정과도 그리 충돌되지 않아 보입니다. 만약 창세기 1장의 하루 길이가 수천년 혹은 수억년일 것이라는 가정이 옳다면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가지게 된 것도 수천년, 수억년 이후의 일일 것이구요. 동일한 가정을 취한다면,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고 수천년 혹은 수억년 이후에 쉬신 셈입니다. 물론 영원하신 하나님의 어떠함을 시간에 근거해서 해석학적 족쇄를 채우는 게 무례한 일인지라 조심스런 면도 있지만요. 창조의 6일만 특별한 시간으로 본다거나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과 이후의 하루단위 길이가 다르다고 하는 의견도 그렇지만 그런 견해를 산출한 (소위 과학적) 전제들도 제 눈에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4. '문자주의' 용어가 교부나 종교개혁 인물들이 사용했던 그 시대 문맥 속에서의 의미와 의도를 다 살려내지 못한 채 통용되고 있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문자적 의미는 성경 텍스트의 역사적 의미와 신학적 의미와 도덕적 교훈과 그리스도 발견과 연합 등과 같은 임의적인 구분들 중에 어떤 특정한 것과의 배타적 동일시가 아니라 그 모두의 유기적인 포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믿음의 선배들도 설명상의 필요 때문에 언어적 구분을 활용하긴 했지만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들을 버리는 식의 단선적인 해석학을 문자주의 차원에서 옹호하진 않아 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최소한 저에게는 계시 의존적인 사색에서 문자적인 의미가 가진 비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모든 문자가 의미론적 유기체로 결합되어 있고 애매한 부분이 보다 명료한 부분에 의해 벗겨지고 벗겨지되 의미의 범위는 다른 성경 텍스트에 의해 제어를 당하는 식으로 도달한 의미의 성경 전체적 포괄성이 문자적 의미에 담겨 있다고 보는 탓입니다.

5. 황 전도사님, 저도 잘 모르는 분얍니다. 그냥 익숙한 개념의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틀에 갇힌 노예처럼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늘 성경을 읽고 묵상을 적습니다. 귀한 질문 감사 드리며 우답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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