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4일 월요일

영광과 고난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했다 (욥6:10)

욥의 일대기가 구구한 사연으로 엮여 있지만 엔딩은 해피였다.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인생의 결론을 안다는 것이 두 가지의 생각을 조장한다. 첫째, 과정의 고통이 실제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둘째, 고통스런 과정은 지나가고 만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욥의 해피엔딩 인생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뚫고 지나가야 했던 고통의 실재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한편으론 고통이 최종적인 상태가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임을 확인한다. 욥은 인생의 하늘이 짙은 먹구름과 찬란한 햇살의 단절적인 교차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환란보다 허무하고 답답한 고통도 없을 것이지만 욥은 그런 성격의 '희비'가 부단히도 엇갈린 나날을 보내었다. 나의 관심은 그의 '비'에 쏠린다.

욥은 동방사람 중에 으뜸이다. 그런 그를 사단이 건드렸다. 욥의 인생은 자신에게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재앙의 끝모를 늪으로 삽시간에 함몰된다. 그는 태어난 날부터 탄식의 거친 도마에 올렸다. 멸망과 유암과 사망의 캄캄한 그늘이 그날의 소유권을 주장하면 좋을 뻔 했겠다는 창조의 질서 교정을 요청하는 언사까지 내뱉었다. 그에게는 은밀하게 낙태되어 빛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손바닥 사이즈의 차가운 무덤이 자신의 몸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극심한 기쁨과 즐거움 중에 뛰어들어 눕겠단다. 그가 당하는 분한과 재앙의 무게는 지구촌 전체의 해변을 뒤덮은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란다. 그가 직면한 고통의 정도가 대충 가늠되는 고백이라 하겠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의 틈바구니 속에서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던 욥의 신앙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신적인 눈으로 보기에도 심히 좋았던 복의 충만 속에서도 말씀을 거역한 것과는 너무도 노골적인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되지 않은 문맥 단절적인 재앙을 당하면 그 출처를 의례히 하나님께 돌리는 법인데도 욥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불평을 바가지로 쏟았지만 그래도 넘어가지 않은 경계선이 있었는데 말씀만은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풍요로운 중에 말씀이 존중되는 일의 아쉬운 점은 향기가 진동하지 않는다는 거다. 진리의 향기가 한 시대를 진동하는 것은 인간적인 통제의 손아귀를 벗어난 역경과 환란 속에서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은 빈말이 아닌게다. 주님의 뜻은 형통이고 불행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자의적인 도식은 '멍멍이'나 주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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