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9일 토요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8:3)

음식의 섭취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기발한 비유였다.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비유를 생략하고 본질만 취하는 취사선택 문제와 무관하다.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본질의 중요성은 비유의 필연성이 강화한다. 음식은 생존의 필연이다. 인간은 생존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고 조달하는 자존성이 없는 본성상 의존적인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 먹어야 산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생존의 그런 절박성과 결부되어 있다. 삼시세끼 식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존재가 보존되고 생존이 유지되고 있는지의 근원을 알고 하나님께 마땅한 감사를 드리는 격식이다.

음식은 입으로 섭취한다. 적당한 소화용 운동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섭취한다. 그에 어울리는 소화용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 음식을 섭취하면 어디까지 음식이고 어디까지 나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구별은 있는데 분리는 불가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 사이에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은 분명히 구별되는 것인데도 막상 선택의 기로에 서면 구분선이 모호하다. 이유는 주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되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기 때문이다. 말씀과 우리의 관계는 명령이 밖에서 눈을 부라리며 준행자의 행실을 노려보는 식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말씀이 '밖에' 있으면 아직은 강제요 강압이다. 밥상의 기름진 여유와 풍요를 떨면서 맞이하는 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건조한 명제이며 정보를 제공하고 행위를 촉구하는 몽학선생 정도로 여긴다면 아직은 말씀으로 사는 게 아니다. 음식과 소화기관 사이에 신비로운 조화와 연합이 있듯이 말씀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는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신비로운 상응이 있다. 말씀을 정보취득 소스로 여기며 거리를 두고 있다면, 아직 말씀을 입에도 넣지 않은 상황이다. 말씀은 먹도록 주어졌다. 박물관의 '고물(古物)'처럼 만지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심심풀이 관람용이 아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말씀은 이제 우리의 영혼에 새겨져 있고 성령의 조명으로 황홀한 의미의 세계로 진입한다. 이처럼 말씀으로 산다는 건, 강제가 아니라 자발성이 순종과 결합되는 삶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양식이 되신다고 하셨다. 긴 계시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의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씀이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나는 주님 안에 거하는 동거와 연합이 바로 말씀으로 산다는 궁극적 의미였다. 구별은 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머리와 몸, 남편과 아내, 나무와 가지의 연합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믿음의 선배들이 신학과 경건의 질퍽한 피눈물을 쏟으며 얻고자 고대했던 연합이다. 젖이 아니라 때때로 단단한 음식이 주어져도 연합을 접어서는 아니된다. 장성한 자에게는 지각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분별해야 하는 그런 류의 음식이 필요해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이란 밥상 앞에서 편식은 금물이다. 주님은 최고의 요리사다.

꿀을 만나거든 적당히 먹으랬다. 토하는 부작용 때문이다. 그러나 벌통에서 막 채취한 송이꿀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섭취량에 제한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바르게만 먹으면 부작용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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