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6일 토요일

여호와의 아름다움, 그 실상은?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27:4)

다윗이 하나님께 청구했던 단일한 소원이다. 곧장 흥분된 건축재료 수집에 돌입했다. 허나 성전완공 소망은 그의 손이 전쟁에서 흘린 무수한 생명의 피 때문에 거절된다. 그러나 그 거절은 다윗에게 절망이나 좌절과는 무관했다. 오히려 다윗이 구하지도 않았던 보다 고귀한 것을 찾고 구하라는 반전의 계기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는 바울의 기록처럼, 다윗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주께서 친히 조성하신 자기 자신이 성전이며 그 안에 주께서 좌정하고 계심을 깨달았을 듯하다. 주님을 뵈려고 인위적인 벽돌 무더기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되었다. 특정한 예배시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무시로 어디서든 여호와의 아름다움, 앙망할 수 있었다. 다윗은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사모할 다른 공간이나 시간대에 제한될 이유가 없었겠다. 

거절은 언제나 도약의 비상구다. 사람의 소원은 그 성취가 오히려 재앙일 수 있음을 지혜자가 잘 말하였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여기서 사망은 위엣 것이 아니라 '땅엣 것'과 결부되어 있음에 분명하다. 우리의 생각과는 하늘과 땅의 격차처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소원을 파고드는 방식은 결코 정상적일 수 없다. 대체로 그분이 우리를 거절하고 외면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한다. 당연히 삐지거나 불평의 거품 물 일이 아니겠다. 오히려 거절의 차가운 벽에 부딪히는 때가 사람의 두터운 욕망을 벗어나 생각에 지나도록 높은 가치의 세계로 진입하는 문이 열리는 때이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가 오히려 임박한 재앙의 때이기도 하다. 

사실 다윗의 유일한 소원은 아들에게 넘어갔다. 솔로몬이 성전건축 위업을 달성했다. 무엇이든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했고 마음의 즐거움도 묵살한 적이 없었던 무제한의 풍요까지 구가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솔로몬 평가는 냉담했다. 들에 방치된 백합화의 영광보다 못하단다. 형통의 대명사인 솔로몬의 영광이 고작 언제 꺾여 아궁이에 던져질지 모를 야생화 수준의 영광도 안된다는 주님의 언사는 마치 형통의 대로만을 골라 질주하던 인생의 환도뼈에 헤비급 일격을 가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앙망하며 그분의 영광을 사모하는 일은 근사한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 장미빛 진로가 뚫려야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의 부재가 보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환경일지 모르겠다. 이는 주께서 진정한 의미의 앙망과 사모로 이끄시는 준비가 형통과 정반대의 내용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드는 이유기도 하다. 

그분의 아름다움, 그 영광을 사모하는 마음, 다윗이 경험한 그 세계와 마음을 맛보고 싶은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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