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1일 월요일

겸손을 생각한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19:12)

여호와의 율법을 즐기며 주야가 따로 없을 정도로 묵상하던 다윗은 언어가 없고 소리가 없어도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여 온 땅에 통하고 세계 끝까지 이르기에 사람의 증언에 의존하지 않는 말씀의 자율적인 선포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눈을 밝히고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 말씀의 당도는 그에게 송이꿀과 비교할 수조차도 없었겠다. 그러나 말씀은 정죄의 검이기도 했다. 양날을 가졌음도 간과할 수 없겠다. 인간의 숨은 허물을 영혼의 차원까지 감별하고 도려내는 진단과 처방 때문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교만의 뻣뻣한 목을 떨굴 수밖에 없는 이유겠다.

그렇게도 달콤한 말씀과의 열애가 밤낮을 불문하다 보면 형언할 수 없는 영혼의 즐거움과 더불어 뾰족한 소름이 온 몸에 오르도록 육중한 분량의 허물이 내 안에 감추어져 있음도 경험하게 된다. 일곱번 단련한 은보다도 더 순결하고 정미하고 완전한 말씀의 빛으로 감지된 죄이기에, 당연히 사회법의 헐렁한 그물망에 걸러지는 발각된 과오와는 질과 분량에 있어서 비교를 불허한다. 보이는 허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다윗은 죄의 심각한 실상을 아무도 능히 깨달을 수 없을 정도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도 공감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겠는가."

자신도 알고 있는 약점의 덜미를 잡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반응이 가능하다. 첫째, 그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다. 둘째, 평생 그 사람 앞에서는 작아지는 것이다. 둘 다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흉악한 살인과 비열한 아부의 숨막히는 충만이 이를 입증한다. 문제는 자신의 의식적인 검열도 여과한 허물에 대해서는 양심을 떳떳하게 걸 정도로 판이 커진다는 거다. 대체로 끝장을 볼 결의에 차오른다. 불쾌한 하나님의 존재마저 지울 태세다. 그러나 양심도 시뻘겋게 달군 죄의 인두로 무수히 지져지면 무뎌진다. 우리의 떳떳함은 주로 그렇게 무뎌진 양심에 기초한다. 이 지점에서 말씀의 엄밀성과 필요성이 대두된다.

말씀 앞에서 다윗은 언어와 소리로 번역되지 않을 정도의 은밀한 죄가 자신에게 무더기로 감추어져 있음을 깨닫고 벗어나게 해 달라고 몸부림을 친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었고 전쟁터에 승리의 깃발만 꽂았던 다윗이라 할지라도 겸손의 무력한 허리를 구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말씀의 역사였다. 이는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진 죄인의 은밀한 추함을 보아서다. 자신의 의식조차 감지하지 못한 허물의 실재를 말씀의 빛 앞에서는 부인할 수 없어서다. 이는 전쟁의 부산함에 휩쓸려 망각했던 밧세바와 우리야와 관련된 단회적인 불륜과 살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간의 총체적 본성을 후비는 성찰이요 자각이라 하겠다.

오늘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적당히 꾸며진 겸손과 말씀의 신적인 엄중함 앞에서의 순전한 겸손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된다. 최소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전자의 겸손에 안주하고 그런 류의 겸손을 빙거로 자만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다윗을 통해 투영된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 인간이 스스로 측량할 수도 감별할 수도 없는 본성적 죄의 쾌쾌한 수치를 스스로 뒤집어 쓰신 그분의 겸손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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