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일 금요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

에임즈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일차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도다 (시4:7)

급박한 위험과 환란이 이 시편의 배경이다. 그런 환경과 마주친 다윗의 지혜로운 처신은 하나님께 의의 제사를 드리고 잠잠히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요 안전의 마지막 보루라는 것이 이런 처신의 밑바닥에 깔린 믿음의 전제였고. 에임즈는 이 시편을 강해하며 최고선(summum bonum)이 다윗에게 최고의 유일한 위로(Erlösung)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나는 교리문답 1문항의 '위로' 개념을 '최고선'과 연결한 다른 인물을 알지 못한다.

에임즈가 본문에서 끄집어낸 교훈들은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일평생에 숙려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다른 어떠한 것보다 최고의 선이다. 2) 이생에서 인간의 최고선은 재화에서 얻어질 수 없다. 3) 우리의 진정한 최고선은 주님과의 연합(unio)과 교통(communio)이다. 4) 주님과의 교통으로 얻는 우리의 지극한 즐거움은 그 자체의 짙은 감미로움 때문에 모든 인간의 덧없는 희열과 행복을 능가한다. 5) 이러한 기쁨과 거룩한 위로가 성도의 양심에 견고한 확신을 수혈한다.

진정한 최고선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과의 연합과 교통은 우리의 본질적인 복의 샘이며 때때로 하나님을 바라봄(visio Dei) 혹은 지복한 통찰(visio beatifica) 등으로 진술되는 경우도 있다. 성경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눈의 시각적 작용이나 지성의 뻣뻣한 사색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fruitio)을 일컫는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으며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그 거룩한 교통과 즐거움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찬(communio)이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통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이다. 타당한 문맥도 없이 우리의 삶을 강타한 위험과 환란은 그 거룩한 위로의 기운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우리 하나님의 아프지만 감미롭고 지고한 사랑이 원인일 경우가 대부분인 듯하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위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심과 속성과 연합과 교통이다. 목회자가 어떤 내용으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의 기록이 가슴 찡하게 울리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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