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6일 목요일

은혜의 쓰나미

인종차별 문제를 법적인 노예제도 철폐로 해결하고 나니 그것이 사람들의 내면과 일상적인 문화로 파고들어 이제는 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며 안타까워 하던 마크 놀 교수의 강연이 생각난다. 문제의 외적인 제거가 본질적인 해법은 아니라는 교훈 되겠다.

1561년 존 낙스가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는 메리가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로 우상적인 미사가 부활하여 말씀의 권능으로 정결하게 되었던 땅이 다시 신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건을 가장한 외식과 대항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difficile fuerat adversus hipochrisim pietate fucatam pugnare)인 줄 몰랐다며, 이렇게 도움의 손길만 뻗는 자신이 칼빈에게 만성적인 골치(tibi perpetuo molestus sum)가 될 뿐이어서 미안한 맘을 드러낸다. 하지만 문제의 폭풍 중심부에 서 있을 때에라도 원수에게 두려움을 노출하지 않고 끝까지 소망의 끈을 붙들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배교의 살얼음판 위에서 겪는 창상이 너무도 커 영적으로 탈진할 정도란다. 하여 탄원과 원조의 붓을 들었고 제네바의 유사한 격정을 관통한 칼빈의 지혜를 구하는 서신을 띄웠던 것이었다.

낙스의 영국이 처한 상황에서 마치 한국교회 현실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짠하다. 이는 땅에 썩어 없어지는 것들을 부당하게 취득하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그것도 교회에 머리둘 곳을 찾았다는 참으로 불쾌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다. 한국만큼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또 있을까? 모든 외적인 핍박과 제도적인 족쇄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파고든 우리가 스스로 만든 어쩌면 경건의 탈을 쓴 우상숭배 습성이 진리와 참경건의 질식을 초래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회에 유일한 희망의 빛마저 꺼뜨리고 오히려 어두움의 산실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와 경제와 언론과 문화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되 십자가의 방식과는 무관한 바벨론의 달콤한 전술에 구걸의 추한 악수를 청하는 방식으로 그걸 도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의 소름이 돋는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향기가 사회에 거룩한 혼란을 촉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 은혜의 쓰나미가 성도 개개인과 조국을 휩쓰는 날이 앞당겨질 수 있도록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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