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6일 금요일

스스로 감추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셔서 맘놓고 죄짓는다.
그래도 탈이 없으니까 죄의 지속에 떳떳함도 더해진다.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분수를 월담하는 오만에 대해
주님께서 심판자의 위엄을 뚜렷이 보이셔서
적당한 겁박을 가할 법도 한데 그런 조짐은 전혀 안보인다.

물리적인 투옥과 몸의 질병과 관계성의 파괴를 경험하며
사람들은 운신의 폭을 조절하고 적정선을 찾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출입의 경계를 한하셨다.
그러나 말씀의 엄중함에 버금가는 감독이 뒤따르지 않아
사람들은 순종의 적정선 찾기가 곤란하다.
감독에 소홀한 정도가 아니라 감독의 유무까지 의심된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감시하고 보상과 처벌이란
필연적인 결과가 기다리고 있어서 행동이 조절되는 것은
아직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높은 도덕성 기대에
못미치는 비자발적 어거지에 불과하다.

자녀들 지도에 편달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그러나 편달 의존적인 인격의 피동적 상태를 넘으려면
외부적인 위협이나 강제의 틀은 제거해야 하고
자발적 검열을 촉발하는 생물학적 권위도
은근히 행사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부모의 관찰 앞에서 연출하는 자식으로 키우지 않으려면
외연적인 교육용 장치들의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방식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가르치고 기르시기 위해
스스로를 가리시되 당신 자신도 우리의 내적 자발성에
어떠한 조작이나 강제력이 행사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마치 없는 분이신 것처럼 너무도 꼼꼼하게 감추신다. 
모든 것을 지으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이
뭐가 아쉬워서, 뭐가 두려워서 공적인 노출을
스스로 억제하고 계신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반면 그분을 찾고자 하면 시간의 간격이 필요하지 않은
하늘의 속도로 만나 주신다는 사실도 이해가 불가하다.

그러는 중에 난 "그분의 지혜는 측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슬쩍 더듬고 말았다. 그분이 내 눈과 지각으로 가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뿌듯하고 든든한 평강의 좌소라는 것도
측량할 수 없는 대목이다. 

오늘 4장의 결론이 그려지지 않아 딴짓만 하던
못난 답답함을 달래시려 이렇게 큰 위로까지 동원하실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주님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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