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3일 화요일

한겨레 안수찬 기자의 글을 퍼왔다

나는 어떻게 쓰는가②  안수찬〈한겨레〉탐사보도팀장

글은 자아의 노출이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기가 두렵다. 글에 담긴 자신을 누군가 폄훼할까 두렵다. 어떤 글도 독자를 한정짓거나 특정할 수 없다. 누가 읽을지 알 수 없고, 의도할 수도 없으므로, 글쓰기는 때로 위험천만한 모험이 된다. 불특정 독자가 나(의 글)를 간단히 오해할 것이다. 두려운 나머지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일기를 쓸 때조차 미래의 독자를 의식한다. 근본에 있어 글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이지 않다.

동시에 사람들은 글쓰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불멸에 대한 동경이다. 삶은 찰나의 시공간에 붙잡혀 있지만, 글은 그 올가미를 벗어버릴 수 있다. 글은 소통의 경계를 붕괴시킨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죽고 난 다음까지 나를 알릴 것이다. 글은 기본적으로 내가 주도하는 미디어다. 글 쓰는 이가 글 읽는 이를 지배한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아를 거리낌 없이 펼쳐 보일 광대한 영지를 갖는 일이다. 이 영토 안에서 나는 자유롭고, 그 땅에서 나는 세계의 주인이다. 글에 비하자면 말은 덧이 없다. 기껏해야 가족·연인·동료에게 나를 표현할 뿐이다. 매스미디어를 장악한 웅변가가 아니라면, 뭇 사람의 말은 공중에 흩어져 자취조차 남지 않는다. (실은 웅변조차 글로 옮겨야 ‘역사’가 된다) 글은 불멸의 미디어이므로, 사람들은 찰나의 삶을 글에 담으려 안달한다.

서로 충돌하는 공포와 열망을 잘 조절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는 자아 노출의 공포와 열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일이다. 글을 지탱하는 것은 그래서 문장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자아가 글의 정수다. 글은 ‘나’의 문제다. 김구의 <백범일지>,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등이 훌륭한 것은 그 문장과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은 문장연습을 거듭한 문필가도 아니다. 그들의 자아가 훌륭하므로, 이를 그대로 드러낸 그들의 글도 훌륭하다.

여기에 이르러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분명해진다. 글에 담기는 자아를 훌륭하게 갈고 닦으면 된다. 우선 10년쯤 면벽참선하며 수양하자. 그 다음 10년쯤 수만 권의 장서를 독파해 교양을 쌓자. 나머지 10년쯤 여러 직업을 거치며 연륜을 얻자. 그렇게 30년을 고행한다면 어지간한 자아에도 향기가 날 것이며, 그 향기가 밴 글도 읽어볼만 할 것이다. 물론 이 방식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언제쯤 고행이 끝날지 정확한 기약도 어렵다.

글쓰기는 자아와 타자가 섞이고 스미는 일

인내가 부족한 이들을 위한 둘레길이 있다. 게다가 그 길의 초입을 대부분 겪어봤다. 자아 대신 타자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자아와 대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반면 타자를 살피는 일은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자아를 노출하는 일에 비해 두려움과 창피함이 덜하다. ‘남’의 문제를 응시하면 어마어마한 고행을 건너뛰어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남’의 문제가 제 삶에 왈칵 달려드는 때를 사람들은 간간이 겪는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할 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낼 때, 누군가 자신을 해코지할 때, 한없이 증오할 때, 사람들은 가슴이 저리거나 치가 떨리거나 심장이 북받친다. 바로 그때, 사람들은 사무치게 글이 쓰고 싶어진다.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 겪는 그런 밤이면 명치에서 토악질처럼 글이 솟구쳐 오른다.

뭇 사람들은 이런 일을 평생 몇 번만 겪는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이런 일을 거의 매일 겪는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랑하고 실연하며, 투쟁하며 갈등한다. 타자로 인해 자아가 매일 뒤흔들린다. 매일 그들은 토악질하며 글을 쓴다. 이 대목에 이르러 글은 ‘자아’를 넘어서는 ‘타자’의 문제다. 글쓰기는 타자에 대한 감응의 표현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삼라만상을 향한 감성의 더듬이를 벼려야 한다. 주변의 이웃, 그들을 엮는 관계에 민감하게 감응해야 글을 쓸 수 있다.

세상 모든 길은 서로 만난다. 자아를 성찰하는 길과 타자에 감응하는 길은 어느 경지에 이르러 서로 섞이고 스민다. 둘의 팽팽하고도 적절한 긴장 가운데서 글이 탄생한다. 공교롭게도 저널리즘은 정확히 그런 글을 지향한다. 문학의 글(소설), 과학의 글(논문), 일상의 글(일기) 등과 비교된다. 모든 글은 자아와 타자가 교감한 결과이지만, 소설·논문·일기 등에서 자아는 종종 타자를 압도한다. 저널리즘의 글, 즉 기사에서 균형추는 반대로 기운다.

기사에는 자아가 (적어도 노골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타자, 관계, 공공이 기사의 주어가 된다. 기사를 쓰면 더 깊이 더 자주 타자를 응시할 수 있다. 삼라만상에 감응하는 더 예민한 더듬이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기사에서 자아 노출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본능적으로) 공공의 문제 뒤에 숨은 자아(기자)를 알아차리고, 그 인격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꽃을 뿌린다. 타자를 응시하는 기사는 소설·논문·일기보다 더 광활한 광장에 필자를 노출시킨다. 기사는 자아와 타자가 서로 섞이고 스미는 전형적 글쓰기다.

이 글에서 나는 기사 쓰기를 빌려 글쓰기를 설명할 것이다. 자아와 타자가 어떻게 교감하고 충돌했는지 보여줄 것이다. 타자를 통해 어떻게 자아를 노출했는지도 보여줄 것이다. 기사는 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글 쓰는 모든 이가 즐겁게 뛰어들 수 있는 하나의 장르다. 직업이 기자건 아니건, 글쓰기의 공포와 열망을 갖춘 사람 누구에게나 작은 영감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최근 2년여 동안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실렸던 기사를 주로 인용하겠다. 훗날 돌이켜 반드시 창피해질 글이지만, 지금으로선 내가 가닿은 최신의 지평이다.

1. 끊어 치면서 리듬을 탄다
지금 하얀 모니터에 검은 커서가 깜빡인다. 뭘 써야할지 막막하다. 빚쟁이처럼 아우성치는 커서를 오른쪽 끝으로, 저 아래로 밀어붙여야 글이 된다. 그 압박은 누군가를 밤 새게 만들고, 누군가를 술 마시게 한다. 그래도 돌아앉으면 또 커서의 압박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나는 중얼거린다. “끊어 치자.” 이 하나로 글쓰기의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끊어 치기는 글쓰기의 배터리다. 끊어 쳐야 글의 시동이 걸린다. 문장을 끊어 치는 것은 글쓰기의 출발이다. ‘주어-목적어-서술어’의 기본 단위로 하나의 문장을 끝내야 한다. 수학의 ‘소인수분해’처럼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때까지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줄이는 것이다. 짧고 간결한 문장을 쓰자는 이야기인데, 그렇게만 알고 있어선 짧은 문장을 쓸 수 없다. 모든 문장은 구질구질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어코 애를 써서 ‘끊어쳐 내는’ 호흡으로 써야 한다.

끊어 치기는 만병통치약이다.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쓰고 싶은가. 끊어 쳐라. 괜찮은 소설을 쓰고 싶은가. 끊어 쳐라.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기사를 쓰고 싶은가. 당연히 끊어 쳐라. 처음부터 제가 쓴 글을 끊어 치는 건 쉽지 않다. 제 글을 끊어 치면, 오장육부를 잘라내는 듯 고통스럽다. 이럴 때, 남이 쓴 글을 끊어 치면 도움이 된다. 싹둑싹둑 썰고 끊고 후려칠 수 있다. 문맥에 신경 쓰지 말고 기계적으로 끊어 쳐도 된다. 단 한번이라도 끊어 치고 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글이 그럴듯해 보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세상에는 유장하고 화려한 문장으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들의 길을 따르면 안 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훌륭한 자아’를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뭘 어떻게 써도 좋은 향기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매한 자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무조건 끊어 쳐라. 간단하고 빠르게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다.

문장을 끊어 치지 않으면, 손가락이 글을 지배한다. 커서의 압박에 시달리다 보면,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쓰는 일이 생긴다. 손가락이 글을 지배하면 문장이 길어진다. 일단 길어진 문장은 제 관성으로 더 장황한 글을 만든다. 장황한 글에서 생각과 느낌은 흩어지고 희미해진다. 결국 나의 글은 내 뜻과 상관없이 산으로 가버린다.

문장을 끊어 치면, 손가락 대신 생각과 마음이 글을 끌고 간다. 끊어 치면, 자아의 느낌과 생각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애초 느끼고 뜻했던 바대로 문장을 배치하고 글을 이어갈 수 있다. 끊어 치면, 독자는 필자의 세계에 보다 쉽게 몰입한다. 긴 문장은 독자의 시선과 호흡을 방해한다. 긴 문장을 따라가다 중도에 읽기를 포기한다. 유장하지만 읽히지 않는 글과 담백하여 잘 읽히는 글 가운데 어느 것이 훌륭한 글이겠는가.

문장을 끊어 치면, 리듬을 발견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고유의 리듬을 갖고 있다. 글만 읽어봐도 필자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일이 그래서 가능하다. 세상 모든 이에겐 문장의 리듬이 내장돼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그런 리듬을 자유자재로 끄집어낸다. 끊어 치기는 내장된 리듬을 발견하여 끄집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글의 리듬에 있어 정해진 악보는 없다. 오직 각자의 리듬만 있다. 내가 즐기는 리듬은 ‘짧게 – 짧게 – 조금 길게 – 아주 길게 – 다시 짧게’의 방식이다.

주의할 것이 있다. 끊어 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리듬을 담을 수 없다. 리듬을 욕심내기 전에 끊어 치기부터 해야 한다. 초보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으로’ 끊어 쳐야 한다. 그 다음, 짧은 문장 몇몇을 이어붙이면 리듬이 생겨난다. 이를 반복하면 자신만의 리듬을 찾을 수 있다. 글이 풀리지 않으면, 어찌 시작할지 막막하면, 어떻게 끝낼지 알 수 없다면, 일단 끊어 쳐라. 그러면서 리듬을 타라. 바로 이 글처럼. 

늦었다. 뛰어간다. “신분증 좀 봅시다.” 경찰이 막는다. 없다. 급하게 나오느라 주민등록증을 빠트렸다. 촛불집회가 열린단다. 나는 거기 안 간다. 성질 급한 B형 그녀가 저기 교보문고 앞에서 눈을 부라리며 서 있다. 이건 중요한 데이트다. 하소연한다. “그럼, 가방 좀 볼까요.” 승낙도 하기 전에 손부터 집어넣어 뒤적인다. 코끼리 그려진 콘돔 두 개 삐져나온다. 시청 앞 지하철역 출구에 늘어선 전경들이 킥킥댄다. 이런 십장생이 게브랄티 먹고 지브롤터 해협에서 염병하는 일은 10년 전, 대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다. 이빨 물고 신음하는 당신, 끝내 오도카니 서 있다 돌아갈 작정인가?
(‘쫄지 마! 실전 매뉴얼이 여기 있잖아 – 불심검문 대처법’ [2009.07.17 제769호])

2.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세상 모든 필자는 제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히길 원한다. 세상 모든 독자는 모든 글을 함부로 성의 없이 읽는다. 독자가 글에 완전히 몰입하길 원하는 필자의 기대는 대부분 배신당한다. 독자는 글의 대강을 대충 읽으려 한다. 이 비극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면 된다. 독자에게 상황을 설명하지 말고, 독자를 그 상황에 밀어 넣으면 된다. 그러면 독자는 ‘남의 글’을 읽는다 생각하지 않고, 글이 제공하는 시공간을 ‘내가 경험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글 속에 파묻힌다.

주제와 소재만으로는 특별한 글을 쓸 수 없다. 태초 이래 인간사의 중요 주제는 무수히 반복됐다. 눈에 쌍심지를 켜도 신선한 소재를 찾기 어렵다. 특별한 글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주제와 소재의 특별함이 아니다. 주제와 소재를 ‘특별하게 드러내는’ 힘이 특별한 글을 만든다. 대부분의 글은, 특히 기사는 인물·사건을 ‘설명하려’ 든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 밝혀 적으려 한다. 기자들의 기대와 달리, 이른바 ‘6하 원칙’은 독자들에게 거의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한다.

심지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독자를 글에 푹 빠뜨려야 한다. 독자를 글 속에 파묻히게 하려면 시공간과 인격의 디테일을 보여줘야 한다. “그는 슬펐다”고 설명하지 말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고 보여주는 방식이다. 보여주는 글을 쓰려면 보여주기 위한 취재가 필요하다. 디테일을 꼼꼼하게 살펴야 꼼꼼하게 보여줄 수 있다. 이는 눈썰미가 아니라 의지·의도·계획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터뷰를 할 때, 상대의 말만 적으면 설명하는 기사만 쓴다. 상대의 말과 함께 눈빛·표정·행동·시공간을 함께 적으면 보여주는 기사를 쓸 수 있다. 디테일 취재가 쉬운 것은 아니다. 더듬이가 많아야 가능하다.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더듬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중략) 노량진의 독서실은 금기투성이의 영토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과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 많다. 비닐봉지에 덧버선들을 담아 독서실 입구에 걸어두었다. 위에 안내문이 붙었다. “발뒤꿈치까지 감기는 이런 덧버선을 신고 다니세요.” 열람실 문에는 포스트잇이 여럿 붙어 있다. “발뒤꿈치 올리고 걸으세요.” 덧버선을 신어도 걸음마다 소리가 난다. “차가운 음료만 드세요.” 뜨거운 음료수를 마시면 훌쩍거리는 소리가 난다. “캔음료는 밖에서 따세요.” 딸깍거리는 소리가 방해된다. “점퍼·가방 지퍼는 밖에서 열고 들어오세요.” 지퍼 소리도 신경에 거슬린다. “담배 피우면 냄새 다 빠질 때까지 한참 있다 들어오세요.” 냄새조차 거슬린다.
(노량진 공시촌 블루스 [2010.11.26 제837호])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취재했다. 어느 고시원에 갔더니 게시판에 포스트잇이 빼곡하다. 고시 준비생의 말보다 그 메모가 더 절절했다. 작은 메모지를 모아 노량진의 본질을 드러내려 했다.

현장을 담는 르포 기사를 쓸 때, 나는 본능적으로 ‘작은 사물’을 탐색한다. 인터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옷과 버릇부터 살핀다. 르포 취재를 가게 되면, 그 공간에서 발견되는 작은 물건의 특징에 주목한다. 기사에 독자를 ‘밀어넣는’ 일의 출발이다.

부족한 더듬이를 보충하려면, 시선의 확장 단계를 염두에 두면 도움이 된다. 하나의 인물에서 군중으로, 작은 사물에서 큰 공간으로, 찰나의 에피소드에서 인생의 역정으로 펼쳐나가는 방식이다. 삶과 역사를 단숨에 받아들일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는 독자는 세상에 없다. 다만 독자는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순간과 소품을 인지할 수 있다. 작은 것부터 보여주고, 이를 거대한 것으로 확장해 보여주면 효과적이다. 때로 그 반대의 확장도 가능하다.

마을이 끝나는 좁은 들판 위로 느닷없는 돌산이 거대하고 멀끔하게 솟아 있다.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이다. 굽이치던 금강은 마이산 자락에서 용담호수를 만들어 쉬었다 간다. 산과 호수를 훑고 내려온 겨울 삭풍은 전북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읍내 사거리를 칼처럼 가로지른다. 오후 1시30분이 되면 아이들은 바람을 뚫고 진안초등학교 교문을 빠져나온다. 그 가운데 몇몇은 또박또박 걸어 ‘마이용 아동지원센터’를 찾는다. 마이산과 용담호에서 머리글자를 따온 ‘마이용 센터’는 민간이 운영하는 무료 아동돌봄 시설이다. 센터 맞은편에는 초·중등 보습학원이 있다.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학원’이라고 펼침막을 내걸었다. 마이용 센터 아이들에겐 공부하는 습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신발을 벗자마자 아이들은 주방으로 달려간다.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먹을 것을 찾는다. “선생님, 저희 언제 밥 먹어요?”
(날치기가 엎은 아이들의 밥상 [2010.12.24 제841호])

방중 아동급식 예산 삭감 논란과 관련해 지방 도시의 아동지원센터를 취재했다. 기사 첫 대목의 ‘시선’은 다음과 같이 흘러 간다. ‘시골 들판 – 마이산 – 금강 – 용담호수 – 겨울바람 – 진안읍내 – 진안초등학교 – 아동지원센터 – 아이들 – 주방 – 냉장고 – 밥.’  기사의 초점은 아이들이 먹는 밥에 있다. 그 밥이 어떤 의미인지 독자가 몰입하여 스스로 알아차리길 나는 원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자의 손을 잡고 아동지원센터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으니 그 시공간을 온전히 제공해야 한다. 아이들이 겨울 방학 때 먹는 밥 한 그릇의 의미에 몰입할 수 있도록 나는 산, 강, 바람을 등장시켰다. 시공간으로 보자면 거대한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동해갔다. 오직 밥을 위해서였다.  

3. 디테일을 전략적으로 배치한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려면 디테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디테일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세계는 무한한 사실의 연쇄 고리다. 작은 사실들이 끝도 없이 얽히고설켜 세계를 구성한다. 그 디테일의 전부를 기사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디테일은 기자의 ‘전략적 판단’에 의해 배치된다. 어떤 디테일은 버려지고, 다른 디테일은 생생하게 재현된다. 무엇을 드러낼 것인지 기자는 의도해야 한다. 디테일의 전략적 배치가 기사의 품질을 결정한다. 디테일이 세계를 입증한다.

수많은 디테일 가운데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나는 간단한 방법을 택한다. 취재 과정에서 내가 실제로 몰입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공연히 거창한 순간을 고르려 하지 말고, 실제로 기자가 몰입했던 순간을 돌아보면, 거기 전략적 디테일의 대상이 있다.

(중략)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종이 박스를 깔고 앉았다. 신문지로 싼 유리병을 꺼낸다. 원래 그 병에는 새우젓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 새우젓으로 김장을 했을 것이다. 돼지 머리고기에 새우젓을 올려 먹었을 수도 있다. 김순남(75)씨는 새우젓 말고 그 병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쌀밥과 볶은 김치가 담겨 있다. 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김씨는 밥을 먹는다. “우리는…” 하고 시작하는 게 그의 말버릇이다. ‘우리’는 차가운 걸 좋아한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차가운 밥을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짠 것도 좋아한다. 붉다 못해 까만 김치를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요즘 나오는 맛소금과 진간장이 참 맛이 좋아서 그것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고물 같은 내 인생 [2008.12.19 제740호])

70대 고물상을 24시간 따라다니며 취재했다. 그의 말, 행동, 표정을 샅샅이 살피고 메모했다. 모두 기사에 담을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새벽이 되자 도시락을 먹었다. “소금과 간장이 참 맛있다”며 꽁꽁 언 밥을 유리병에서 꺼내 먹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게 기사의 목적이었다. 할아버지가 겨울 새벽 도시락을 먹는 모습에 나는 완전히 몰입했다. 기자가 몰입했다면, 독자도 몰입할 수 있다. 그 순간을 기사에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디테일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다보면, 특정 시공간을 ‘쪼개어 펼치는’ 힘도 생긴다. 찰나의 순간, 한마디의 말, 얼핏 스쳐간 표정 등이 때로 거대한 일을 설명해낸다. 이 대목에 이르러 글의 위대함이 발휘된다. 순간을 쪼개어 펼칠 때, 글은 말·영상을 압도할 수 있다. 문학이 여전히 위대한 것은 영화가 담을 수 없는 섬세한 결을 활자로 표현하여 독자의 가슴에 무수한 울림을 각인하기 때문이다. 기사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중략) 그리고 공을 길게 툭 밀었다. 푸른 공간이 새로 열렸다. 그곳에 공간이 있다는 걸 박지성 말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창조한 공간 속으로 30m를 드리블했다. 여섯 차례에 걸쳐 공을 만지고 다듬고 깎았다. 마지막 순간, 그는 공의 자유의지를 믿었다. 수비수의 백태클과 골키퍼의 팔이 악다구니처럼 달려들자 그는 공이 굴러가는 대로 잠시 내버려뒀다. 공은 손과 다리의 정글을 마치 제 의지인 것처럼 헤집고 나왔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 박지성은 마침내 왼발 등으로 공을 토닥이듯 밀어 찼다. 골문 왼쪽 구석으로 공이 굴러갔다. 그리스인들은 헝겊인형처럼 서 있었다. 축 처져 있던 골 그물마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투지보다 아름다움! [2010.07.02 제817호] )

2010 월드컵을 맞아 축구의 ‘미학’에 대한 기사를 썼다. 축구가 아름답다는 느낌부터 공유하고 싶었다. 축구 미학의 카타르시스는 골 장면이다. 2010 월드컵에서 박지성이 그리스를 상대로 골 넣는 장면을 수십 차례 돌려봤다. 십여 초에 불과한 그 장면을 거의 0.5초 단위로 끊어서 살폈다. 박지성이 골을 넣을 때 환호했던 독자라면 이 대목에 집중할 것이다. 일단 집중하면 축구의 미학에 대한 나머지 기사도 착실히 읽어줄 것이다. 디테일을 미분하면 때로 ‘서사’가 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어떤 디테일을 미분할 것인지, 기자가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기사의 품질을 결정한다.

    4. 정보가 아니라 성격을 전달한다

기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건조한 단신 기사조차 사건·사고에 얽힌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근본적으론 모든 글이 그러하다)  독자가 기사를 읽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면 읽기 힘든 기사, 지루한 기사,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기사가 된다.

피노키오는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말도 한다. (적어도 소설에선)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피노키오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피노키오의 관절은 뻣뻣했다. 그는 두 발로 걸었지만, 사람의 걸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사에서 사람은 ‘피노키오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굴곡진 피부, 부드러운 관절, 다양한 표정이 없다.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그런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잘 살펴서 ‘전략적으로’ 기사에 배치해야 한다.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이력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다르다. 이상하게도 기자들은 이름·나이·직업·성별·고향·거주지·소득 등에 집착한다. 이런 것들을 나열해야 그 사람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생 떽쥐베리는 일찍이 <어린왕자>에서 그 허망한 믿음을 논파했다.

    (중략)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 친구의 목소리는 어떻지? 무슨 놀이를 제일 좋아하지? 나비를 수집하니?” 이런 말은 절대로 묻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가 몇이나 되니? 몸무게는 얼마지? 그 애 아버지의 수입은 얼마나 되지?”하고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고 생각한다.
(<어린왕자>)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어린이의 눈으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목소리가 어떤지, 어떤 놀이를 좋아하는지, 나비를 수집하는지 적어야 한다. 버릇·표정·취미·태도 등을 밝혀 적어야 한다. 그제야 독자들은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직접 만나는 것처럼 느낀다. 비로소 기사에 몰입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기사는 그저 사람(person)이 아니라 인물(character)을 드러내는 글이다. 인물에겐 반드시 성격과 태도가 있다. 사람의 정보가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 중요하다. 그것이 기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중략) 12살 태피소 마테는 패배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팀 코트렐랑 초등학교는 2년 전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때도 태피소는 팀의 스트라이커였다. 그런데 올해는 3·4위전에서도 졌다. “화가 나요. 아주 많이.” 태피소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씩씩거렸다. “나는 오늘 4경기에서 3골을 넣었어요. 기회만 온다면 또 골을 넣을 수 있어요. 미드필더 잘못이에요. 나한테 공을 공급하지 못했죠. 수비수도 제 역할을 못했어요.” 태피소의 키는 120cm가 되지 않았다. 스트라이커 치고는 작은 게 아닐까. “축구에서 키는 상관없어요. 기술이 중요하죠. 리오넬 메시라고 알아요?”
(소년의 꿈은 ‘바파나 바파나’ [2010.06.11 제814호])

물론 이 기사에는 ‘숫자’가 등장한다. 온전히 어린이의 눈으로 인물을 드러내진 못한 셈이다. 다만 태피소 마테를 소개하는 정보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씩씩’거린 일과 “미드필더 잘못”이라고 몰아 부치는 고집과 “리오넬 메시를 아는지” 묻는 당당함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태피소 마테가 얼마나 축구를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 다음부터 기사는 테피소 마테의 꿈을 둘러싼 남아공 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짚어 나간다.

영희는 말끝마다 “말이에요”를 붙이는 버릇이 있다. 그는 대학을 못 간 것에 대한 회한이 없다. “대학 나와 봐야 커피 심부름 하면서 90만원씩 받는단 말이에요.” 실업계 고등학교만 졸업한 영희는 주유소·노래방·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주유소에선 기름 냄새 때문에 토악질을 했다. 노래방 카운터는 ‘도우미’ 제안이 자꾸 들어와 그만뒀다. 손님들 술시중을 들다 흠씬 얻어맞는 노래방 도우미들을 영희는 자주 봤다. “불법 영업이니까 두들겨 맞아도 신고를 못한단 말이에요.”
(마트에선 매일 지기만 한다 [2009.12.11 제789호])

버릇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버릇은 그 사람의 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 표정, 몸짓, 걸음걸이, 옷차림 등에 드러나는 여러 종류의 버릇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그 사람을 설명한다. 영희는 부당함에 대한 불만을 본능적으로 토로할 때, “말이에요”라고 말을 맺었다. 항변이 입에 붙은 그의 삶과 관련이 깊다. 그 버릇을 나는 드러내고 싶었다. 독자의 코앞에서 빈곤 청년 영희의 토로를 들려주고 싶었다.


 5. 평범한 말에서 탁월한 문장을 찾는다

좋은 문장은 책 속에 있지 않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말 속에 참으로 훌륭한 문장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좋은 책을 읽어 좋은 문장을 배우게 되는 이유가 있다. (이 글의 맨 앞에 밝혔듯) 말은 공중으로 흩어져 자취조차 남기지 않는다. 오직 글만 사람에게 각인된다. 좋은 말은 사라지고 좋은 글만 기억된다.

기자는 이 비극을 해결할 수 있다. 기자는 남의 말을 듣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공연히 문학의 문장에 집착하지 않아도 (물론 책을 많이 읽을수록 좋은 글이 나오긴 하지만)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면 좋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

(중략) 큰아들이 죽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결혼까지 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그게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잘 모르겠네. 뭐 알 필요도 없고….” 황기백(가명)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웃에 사는 김형성(가명)씨의 딸은 26살 되던 해에 죽었다. “딸을 날려버렸다”고 김씨는 말했다.

(중략) 2006년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박씨는 말했다. 그래도 입에 무료 점심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삐거덕거리는 현관문을 열어 남편이 홀로 앉은 좁은 방으로 돌아간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 [2010.03.26 제803호] )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빈곤층을 취재했다. 그들의 말은 모두 탁월한 문장이었다. 평생의 가난을 응축한 문장이었다. 예컨대 “딸이 죽었다”가 아니라 “딸을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무엇이 힘든지 물었더니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이런 문장은 책상머리에 앉은 학자·문인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기자는 복 받은 직업이다. 이런 말이 널린 거리와 광장에 직접 나설 수 있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말을 그대로 글에 옮기면 방대한 분량이 된다. 위 기사에 등장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각각 1시간 이상 대화했다. 평범한 시민의 말은 정연하거나 논리적이지 않다. 기자는 그 말의 본질을 흐리지 않는 한에서 정돈하여 압축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말의 ‘요지’를 정돈·압축하면 절대로 안 된다. 취재윤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하면 말이 죽어버린다. 전체 요지를 잘 드러내는 어떤 말을 잡아채서 짧게 쓰면 된다.

아울러 그 말을 기사의 문장으로 옮길 때, ‘문어체’로 고쳐 잡지 말고, 최대한 ‘말 그대로의 생생함’을 살려 적어야 한다. 놀랍게도 많은 기자들은 “딸을 날려버렸다”는 말을 번연히 듣고도, 기사에는 “딸을 잃었다”고 적는다. 책상물림의 감각으로 생생한 말을 죽은 글로 대체해버린다.

인용문은 꼭 필요할 때만 악센트처럼 집어넣어야 한다. 따옴표가 많으면 독자가 몰입할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지식인은 온통 인용문으로 가득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문으로 점철한 글을 쓰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글의 진정한 본질일 수도 있다. 다만 그런 경우에 처하게 된다면, 나는 따옴표를 지워버릴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문이 아닌 문장’으로 가득 채우고, 그 전체가 인용문이라고 어디엔가 주석을 달아둘 것이다. 나는 따옴표가 싫다.

어느 면에서 따옴표는 글 쓰는 이를 위한 ‘면책’의 장치다. 기자가 대표적이다. 기자들은 인용문을 남발한다. 제 글의 책임을 피하고, ‘취재원’들에게 말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 따옴표를 붙인다. 이런 장치가 꼭 필요한 때가 있긴 하다. 대통령·정치인·기업인·학자 등이 중대 사안을 논할 때, 일부러라도 따옴표를 붙여 인용문을 만들어둬야 한다. 유력자·명망가·권력자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기록에 남겨야 한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들의 평범한 말은 평서문으로 옮길 때 더욱 설득력이 높다. 딸이 죽은 과정은 기자가 직접 서술하는 평서문에 압축하여 설명하고, 그에 대한 노인의 감정만 인용문에 담으면 된다. 이를 모두 인용문으로 처리하면, 노인의 훌륭한 말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린다.

예상치 못했던 말도 배척하지 말고 잘 담으면 좋은 문장이 된다. 종종 기자는 어떤 판단과 편견을 갖고 취재에 나선다. 기자가 생각하기에 적절치 않은 말도 듣는다. 많은 경우, 대부분 기자들은 그런 말을 기사에서 빼버린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고, 상황에 비춰 적절치 않은 말이 독자를 몰입시키는 놀라운 문장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위 기사에서 할아버지는 큰 아들이 언제 죽었는지 “잘 모르겠네. 뭐 알 필요도 없고…”라고 말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통속적으로 보면 노인은 엉엉 울어야 하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노인의 말은 다른 진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다른 식구를 건사하려면 아들의 죽음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노인은 용을 쓰며 다짐했을 것이다. 삶의 밑바닥에 있는 그런 진실을, 그리고 문장을 한낱 기자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그 노인의 말 속에 진실과 문장이 있다. 나는 그걸 옮겨 적었다.

6.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쓴다

(중략) 내 이름은 김순악. 그런데 일본 군인들은 자꾸 다른 이름을 불렀다.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또는 마쓰다케라고 불렀다. 요 한 장을 깔면 방이 꽉 찼다. 방문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주먹밥 서너 개를 넣어줬다. 틈틈이 먹으며 하루 종일 일본 군인을 상대했다. 내 나이 열여섯이었다. 나중엔 몸이 아팠다. 일본 군인들은 옷을 벗지 않고 지퍼만 내렸다. 허리에 매달린 칼집이 내 뱃살을 찔렀다. 생리 때도 상대했다. 가제나 솜을 구해 아래를 닦았다.
(내 이름은 김순악, 일제에 짓밟힌 소나무 한 그루 [2010.01.15 제794호])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취재했다. 할머니가 남긴 기록을 살피고 생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을 만난 뒤, 할머니가 직접 80여년 인생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기사를 썼다. 할머니는 해방 직후, 경찰과 사귀어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사라졌다. 이후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혼혈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다시 사라졌다. 서울 부잣집에 들어가 식모살이도 했다. 늙어서는 혼자 지냈다. 그 일생을 취재하고 글로 옮겨 적으며, 나는 많이 울었다.

기사에선 일부러 담담한 문장만 사용했다. 형용사와 부사는 최대한 덜어냈다. 감정이나 감상을 드러내는 문장도 덜어냈다. 일어났던 일만 적었다. 독자들이 메일을 많이 보내주었다.  글 가운데 가장 높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다. 즐겁고 기쁘게, 슬프고 애달프게 만드는 글이 위대한 글이다. 글 쓰는 모든 이는 그런 글을 쓰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

기사에서 그런 성취를 이뤄내려면 반드시 지켜야할 철칙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부터 문장까지, 철저히 담담하게 써야 한다. 울리고 싶은가. 울지 마라. 웃기고 싶은가. 웃지 마라. 필자가 먼저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정 이입을 부추기는 문장을 쓰면, 독자는 울고 싶다가도 눈물을 거두고, 웃고 싶다가도 미소를 지운다.

이와 관련해 종종 발생하는 잘못이 있다. 사람들은 도입을 `인상적으로‘ 시작하려 애쓴다. 마무리도 `그럴듯하게’ 매듭지으려 애쓴다. 그런 태도에는 잘못이 없지만, 그 방식에 문제가 있다. 공연히 형용어구를 남발하면 안 된다. 인상적 도입, 그럴듯한 마무리는 독자의 감정을  부추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철저하게 냉담을 유지하는 게 좋다.

특무대원들은 박진목을 나무에 묶었다. 새벽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무성하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보였다. 낙동강 줄기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육군 특무대원들은 그를 지프차에 싣고 대구 달성군 화원유원지 뒷산으로 데려왔다. 차 한켠에는 가마니, 삽, 괭이가 있었다. 그들은 구덩이를 파고 박진목의 눈을 가렸다.

(중략) 박진목은 3남5녀를 두었다. 세 아들은 농사를 짓거나 작은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으나, 지금은 특별한 직업이 없다. 단칸방의 움막은 지금 방 두 칸의 슬레이트 지붕집이 됐다. 오는 10월께 집 앞에 묘비를 꾸며 모실 것이라고 근처에 사는 큰아들이 말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며느리를 불러다 ‘내가 곧 돈 구해서 줄게’ 하며 웃으셨다”고 큰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평생 아버지 심부름만 했다”는 큰아들은 선하게 웃었다. 독립운동가·평화운동가의 자손이다.
(평화와 통일로 새겨진 92년의 삶 [2010.08.06 제822호])

평화운동가 박진목에 대한 기사를 썼다. 첫 단락은 기사의 도입이고, 뒷 단락은 기사의 마지막이다. 현대사의 역정을 오롯이 담은 인물이었는데 기사에선 수많은 곡절을 담담하게 쓰려고 애썼다.

인상적 도입과 그럴듯한 마무리를 결정짓는 것은 결코 수려한 문장이 아니다. 도입과 마무리가 막힐 때마다 나는 어떤 `장면‘을 떠올리려 애쓴다. 영화를 만든다고 상상한다. 전체 서사를 상징하는 특징적인 장면으로 무엇이 좋을지 고민한다. 위 기사에서 첫 장면은 총살 위기에 처한 박진목이고, 마지막 장면은 돌아가신 아버지 묘를 꾸미는 가난한 아들이다.

검박한 도입과 마무리가 가장 좋다. 더 검박할수록 더 감동적이다. 다만 나 역시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검박한 마무리에서 애를 먹는다. 언제나 차고 넘친다. 검박한 도입과 마무리를 연습하는 방법이 있다. 남이 쓴 글의 도입 단락과 마무리 단락만 떼어서 각 단락의 마지막 문장부터 지워보는 것이다. 예컨대 위 기사의 마지막 단락에서 ‘독립운동가·평화운동가의 자손이다’는 문장을 없애 보자. 더 여운이 남는 마무리가 된다. 그 앞의 문장, 다시 그 앞의 문장을 지워도 마찬가지다. 남의 글에 손을 대보면, 내 글의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7. 통찰을 담으려 애쓴다

이제 기사 쓰기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 남았다. 기사의 두 축은 프레임과 디테일이다. 디테일은 지금까지 거듭 설명했다. 무수한 사실의 연쇄 고리가 디테일이다. 프레임은 그 가운데 특정 사실을 담아 엮는 틀이다. 프레임 없는 기사는 세상에 없다. 기자 또는 언론은 특정한 프레임을 모든 기사에 적용한다. `객관적 기사‘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의 총체를 담으려 애쓴다는 차원에서 객관적 기사를 `지향’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런 객관을 `구현‘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누군가 “우리는 객관적으로 보도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거나 무식꾼이다.   

프레임은 이념, 논조와 조금 다르다. 오히려 사건, 사고,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가깝다. 철거 세입자가 농성을 벌이다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용산 사건‘의 경우, 당시 두 종류의 프레임이 경쟁을 벌였다. 남일당 망루에 누가 올라갔나, 얼마나 많은 화염병을 준비했나, 누가 화염병을 던졌나 등 사건 현장에 초점을 맞춘 프레임이 있었다. 이 프레임으로 기사를 쓰면, 독자의 관심은 ’폭력성‘에 맞춰진다.

다른 프레임이 있었다. 그들이 왜 망루에 올랐나, 여러 재개발 가운데 하필 용산이 문제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재개발은 무엇인가 등에 초점을 두었다. 이 프레임으로 용산 사건을 보면, 재개발의 전근대성과 폭압성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덕목들, 즉 끊어 치면서 리듬을 타고, 디테일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면서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고, 말 속에서 좋은 문장을 찾아 담담하게 적는다 해서 곧바로 훌륭한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방식으로 최악의 기사를 쓸 수도 있다. 프레임 때문이다.

올바른 프레임, 좋은 프레임이 무엇인지 논하려면 더 많은 글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강력한 프레임‘에 대해선 몇 자 적을 수 있다. 통찰의 힘은 강력한 프레임을 구성하는 기초다. 통찰의 힘, 즉 사건, 사고, 인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기사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런 통찰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에게도 그런 천부의 재능은 없다. 나름 노력은 하고 있다. 기왕의 상식을 뒤집어본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금기를 건드려본다. 여러 분야의 잣대를 교차하여 들여다본다.

태초에 원시 단세포동물이 있었다. 바다를 떠다니는 단백질 덩어리였던 녀석은 어느 날, 무작정 물결에 몸을 맡기는 대신 ‘하나의 방향’으로 헤엄치기 시작한다. 먹이를 섭취하는 데는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다. 녀석의 몸뚱아리엔 이제 앞과 뒤의 구분이 생긴다. 단세포동물의 ‘앞 몸통’은 모든 얼굴의 시초다.
(얼굴 관음증은 구별짓기 본능 [2009.02.13 제747호])

살인범의 얼굴 공개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인권, 공익 등의 가치가 충돌하는 가운데 나는 달리 보고 싶었다. 살인범의 손과 발이 아니라 왜 하필 얼굴이 문제인가. 사람들은 얼굴에서 무엇을 보나. 얼굴이 전하는 정보는 무엇인가. 사람의 얼굴은 어떻게 진화했나. 도대체 얼굴은 왜 필요한가. 이런 엉뚱한 생각으로 기사를 썼다. 생물학, 관상학, 의학, 역사, 문화인류학, 심리학, 법학의 자료를 검토하고 각각을 종횡으로 엮었다.

부족함이 많은 기사였지만, 내가 의도했던 것은 살인범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우리의 얼굴‘을 보자는 메시지였다. 정치사회적 불안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에서 ’악의 근원‘을 찾아내 응징하려는 욕망에 휩싸인다. 살인범의 얼굴을 들여다봐도 우리의 뇌는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누군가를 징벌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우리는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었다.

이것이 과연 `강력한 프레임‘이었는지 자신할 순 없지만, 뒤집어보고 섞어보면 전혀 다른 프레임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건, 사고, 인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끝없이 질문하면서, 이를 담는 효과적이고 정확한 틀이 무엇인지 거듭 궁리할 때, 비로소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어느 면에서 프레임은 다시 글쓰기의 본질을 묻는 일이다. 타자에 대한 감응, 자아에 대한 성찰을 거듭하지 않으면, 사건, 사고, 인물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다.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글로 적어 남에게 의미를 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혹시 흉내를 냈다 해도 아무짝에도 소용없거나, 외려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뿐이다.

프레임은 자아-타자 교감의 수준을 드러낸다. 수많은 기사 가운데도 번뜩이는 통찰로 생각지 못했던 대목을 면도날로 잘라내 생생하게 드러내는 글이 있다. 그런 기사를 쓴 필자는 자아에 대한 성찰과 타자에 대한 감응에서 오랫동안 절차탁마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 이 글은 되돌이표를 찍는다. 기사는 결국 기자의 노출이다.

옹기 빚는 장인의 마음으로

십수 년 동안 기사를 쓰면서 거듭 확인한 일이 하나 있다. 독자가 바라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점이다. 때로 독자는 편파 보도라거나, 정보가 충분치 않다는 불평을 한다. 그런 요구를 기계적으로 반영하면 (그조차 반영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좋은 기사를 평생 쓸 수 없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입하여 공감할 수 있는 어떤 타자다. 그 공감은 때로 분노, 때로 웃음, 때로 울음이다. 공감은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이뤄지는 게 아니다. 공감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있다. 독자는 기자에게 “타자, 이웃, 세계와 공감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정돈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기자들은 지금까지 ‘정보’에 방점을 뒀다. 앞으로는 ‘공감’에 주목해야 한다.

공감을 위한 정보, 정보를 통한 공감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다만 나는 몰입하려 애썼다. 프레임을 고민할 때, 취재할 때, 기사를 쓸 때, 최대한 몰입했다. 나중에 돌아보면, 몰입한 만큼 독자들이 공감했다.

그것은 예술정신이 아니라 장인정신에 가깝다. 화가는 백지에 페인트를 뿌리고도 작품이라 주장할 수 있다. 대중이 외면하면 그 대중조차 비난하며 독야청청 한다. 그러나 장인은 함부로 옹기를 빚지 않는다. 거듭 연습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옹기를 만든다. 흠이 있으면 서슴없이 깨버린다. 모든 소비자가 그 옹기를 쓰며 만족하길 기대한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불평한다면 장인은 깊이 상심할 것이다.

기사는 화가의 그림보다 장인의 옹기에 가깝다. 너무 흔하여 사람들의 발길에 차일 정도다. 그래도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적 필요에 반드시 부응한다. 희로애락을 항상 받아 담는다. 그런 옹기를 만들기 위해 장인은 수십 년을 거듭하여 빚고 굽고 깨고 다시 빚는다. 사람들은 옹기 귀한 줄 좀체 모르지만, 장인은 오롯한 자부심으로 평생을 버틴다. 기사 쓰기의 이치가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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