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일 토요일

시험을 만나거든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2)

예기치 않은 일들이 터지면 손익부터 따지는 게 사람의 근성이다. 희로애락 선택도 대체로 그 근성의 산물이다. 사태의 전말이 주로 가까운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이해되고 그 이해에 충실한 행동은 타인의 공감을 낚는 호소력도 있어 이에 상충되는 다른 설명들의 접근은 문전박대 당하기 일수다. 맥락의 사이즈와 초점의 원근만 조정하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인데도 자신의 사태 해석학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아서다.

시험은 대개 고통과 손해를 수반한다. 기쁨이란 반응과 어울리지 않는데도 사도는 우리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란다.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성경의 이러한 어법은 책갈피가 멀다하고 수시로 등장한다. 시험에 환영의 비상식적 쌍수를 들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상식과 합리에 근거한 사태파악 습성을 뿌리채 바꾸라고 주문한다.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 차원이 아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진리의 넓은 밑그림에 근거한 주문이다.

시험은 야고보가 서술한 것처럼 인간의 욕심에서 자라난 죄와 결부되어 있다. 시험의 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늘 우리의 욕심과 죄를 고발한다.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기에 시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없다. 시험은 불가피한 것이고 그 씨앗은 우리가 뿌린 것이라면 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은 체념과 슬픔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야고보가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한 것은 우리의 인과율 중심적인 판단력을 무장해재 시키면서 하늘의 해석학을 이식하는 반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창세기 전체가 드러내고 로마서가 정리한 하나님의 속성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죄를 피로 씻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야고보의 권면 배후에 깔린 맥락이다. 시험은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어 시험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겸손과 경외의 지성소로 한 걸음씩 이동한다. 시험과의 불가피한 대면에서 온전한 기쁨을 고집하는 이유는 금전적 이해득실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다. 시험은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지식의 보고이기 때문에 기뻐한다. 추악한 죄성과 무한한 선하심!

이걸 얻으려고 시험을 만나기 위해 욕심에 적극적인 광기를 부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온전히 기뻐하는 것은 '시험을 만나거든' 사태에 대한 우리의 사후적인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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